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피노체트냐 아옌데냐 문제가 아니다”

브란테스 주한 칠레대사 “가난에서 벗어난 이들이 대학교육을 요구하는 것이 사태의 본질”
등록 2011-09-29 15:40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21 정용일

한겨레21 정용일

에르난 브란테스 주한 칠레대사는 칠레 시위와 관련해 학생들의 교육비 부담이 크다고 인정하면서도, 정부 재정 균형을 고려할 때 교육에만 투자를 확대하기는 어려운 여건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9월21일 서울 중구 주한 칠레대사관에서 진행됐다.

-과도한 교육비 부담이 문제가 돼왔기 때문에 이번 시위는 예고된 측면이 있다.

=교육비가 각 가계에 오랫동안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하필 (세파스티안 피녜라 우파 정권이 집권한) 지금 문제가 불거져 시위가 벌어지는지 봐야 한다. 정치·이념적 갈등이 숨겨져 있다. 교육 문제를 현 정부를 반대하는 일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학생들의 절대다수는 동조하지 않는다. 정부와 타협할 의사가 없는 일부 급진 세력이 문제다.

-시위가 넉 달 넘게 이어지고 있지만 정부가 요구를 수용할 의지가 없다는 비판이 있다.

=더 좋은 교육 여건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다. 정부는 재정 균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칠레는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뿐 아니라 의료와 연금, 가난 등 다른 문제가 많다. 당장 지난해 지진 피해를 입고 살 곳조차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정부의 재정 안정이 중요하다. 정부는 지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정부라도 수입보다 더 지출하면, 지금 경제적으로 무책임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보듯 심각한 재정적자 위기를 겪게 된다.

-칠레는 경제발전을 이뤘지만 비싼 교육비 탓에 사회적 불평등은 오히려 심각해지고 있다.

=칠레는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룬 세계적 사례다. 불평등은 해결하는 데 수세대가 걸리고 하루아침에 해결할 마술 같은 방법은 없다. 지금 많은 계층이 20년 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을 받고 있다. 칠레는 유럽과 비교할 수 없고 칠레만의 문제가 있다.

-교육 민영화와 심각한 불평등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 시절 도입된 신자유주의 발전모델이 영향을 끼친 측면이 있다.

=무슨 모델을 말하는 것인가? 경제·정치적 자유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모델과 상관없다. 나눠주려면 생산해내야 한다. 기업이 잘되고 경제가 발전해야 불평등을 줄이는 데 투자할 수 있다. 피노체트냐, (사회주의 정부를 세운) 살바도르 아옌데냐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껏 여러 정부에서 파탄 난 칠레를 회복시켜왔다. 피노체트가 집권한 1973년 당시는 전국에 8개 대학뿐이어서 엘리트만 다녔지만 지금은 70개 넘는 대학에 과거에는 기회가 전혀 없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아 진학한다. 경제적 자유, 개방경제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이런 정책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칠레가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고 기본적 삶의 수준을 달성한 것을 좌파든 우파든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가난에서 벗어난 많은 이들이 중산층에 진입했고 이제 대학교육을 요구하고 있는 게 사태의 본질이다. 결국 정부의 재정 균형을 해치지 않고 지원할 여건이 되느냐가 관건이다.

-중남미에서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안정의 모델로 꼽혀온 칠레에 이번 시위가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겠나.

=심각한 게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칠레는 더 강해질 것이며 다른 나라에 해법을 제시할 것이다. 경제발전이 필요하다. 우리는 2018년에는 지금 한국과 비슷한 1인당 국민소득을 달성할 것이다. 한 단계 더 발전하려면 한국처럼 교육 수준 향상이 필요하고 교육에 투자해나갈 것이다. 칠레 정부는 공교육 투자 및 장학금 확대, 대학생 대출이자 인하 등 중요한 조처를 이미 발표했다. 이제 학생들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