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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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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등록금 인하 요구 피노체트 독재종식 이후 최대 시위로 번져
나누지 않는 성장에 화난 학생들, 신자유주의 모델 혁신 요구
등록 2011-09-29 15:33 수정 2020-05-03 04:26

역사학과 199만7천페소(약 457만원), 화학과 285만6천페소(653만원), 법학과 321만8천페소(734만원). 국립 칠레대학교 학부의 한 해 등록금이다. 칠레의 한 달 최저임금이 17만2천페소(약 39만원)다.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등록금을 댈 수 없다. 그러니 중산층 이하는 자녀 1명을 대학에 보내려면, 허리가 휘는 게 아니라 부러진다. 대학생을 둔 가정의 83%가 한 달 약 48만원 미만으로 살아간다. 칠레 최고 사립대인 가톨릭대와 큰 차이가 없다. 국립 칠레대는 전체 예산의 14%를 정부에서 지원받고 나머지는 등록금에 의존한다. 외신에는 대학을 다니느라 자신의 1년치 소득의 2~3배에 이르는 빚을 떠안게 된 대학 졸업생들의 사연이 수두룩하게 소개되고 있다.

76% 국민 시위 지지
지난 5월 이후 4개월째 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칠레에서 벌어지는 배경이다. 9월22일 서울에서 열린 ‘학업포기 대학생 증언대회’에서는 대학생들이 비싼 등록금 때문에 학업을 포기할 위기에 몰린 사연을 밝히며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참다 못한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돌멩이를 집었다. 학교 점거로 수업이 파행을 겪고, 8월25일 등 수차례 수천~10만여 명의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수도 산티아고 등이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9월11일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숨진 38주기를 맞아 거센 시위가 벌어져 280명이 검거됐다. 9월22일 약 10만명이 참가한 시위에 이어 9월29일 노동계 등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다. 학생들은 공교육 지원 강화, 사립학교의 수익 금지 및 교육 재투자, 헌법에 양질의 교육권 명시, 저소득층 장학금 확대 및 현 5.8%인 학비 대출금리 인하, 초·중등학교의 중앙정부 통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칠레 정부는 7월5일 40억달러의 교육투자 방안에 이어 8월1일 헌법에 양질의 교육권 보장 및 지자체 대신 중앙정부의 중등학교 지원 등 대책을 내놨다. 학생들은 여전히 부족하다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교육 개혁 요구는 이제 동성애 권리 강화, 환경파괴 댐 건설 반대, 마푸체 원주민 보호 요구 등까지 더해져 전방위적 반정부 시위로 번지고 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우파 정부는 학생들이 10월7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유급시키겠다고 경고하며 맞서고 있다.
가파른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의 모델로 꼽히던 칠레에서 1990년 민주화 이후 일어난 최대의 시위다. 9월5일 발표된 여론조사기관 Adimark 설문에서 국민의 76%가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했다. 촛불 대신 냄비를 두드리는 ‘냄비 시위’(Cacerolazo)가 벌어지고 있다. 시위를 이끄는 칠레학생연맹(FECH)의 카밀라 바예호 회장은 학생시위가 시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는 데 대해 “그들이 바로 우리의 부모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파블로 롱게이라 재무장관은 “아이들의 교육비를 댈 수 없다면 나 역시 시위를 할 것”이라고 인정했다. 피녜라 대통령의 지지도는 9월5일 조사에서 27%를 기록했다. 피노체트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 최저다. 2년여 뒤 차기 대선에서 중도좌파 미첼레 바첼레트 전임 대통령의 복귀까지 점쳐지고 있다.

화려한 통계 이면의 불평등
왜 이렇게 됐나? 칠레는 전체 교육비 가운데 가계의 교육비 부담률이 3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칠레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4%만 교육에 투자해서 유엔이 권고하는 7%에 못 미친다. OECD 조사 결과, 다양한 사회계층을 학교 안에서 통합하는 수준은 50% 이하로,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89%는 물론 OECD 평균인 74.8%을 크게 밑돈다. 사실 칠레는 교육열과 교육수준이 높다. 칠레는 대학 입학 연령의 약 50%가 대학에 다닐 만큼 중남미에서 최고의 교육수준을 자랑한다. 2009년 OECD ‘국제 수준 학업성취도 비교연구’(PISA)에서 중남미 최고를 기록했다. 하지만 다른 면이 숨겨져 있다. PISA에서 65개국 가운데 교육 차별 면에서 64위를 기록해 “교육 아파르트헤이트”라 불릴 정도다. 상류층 자녀는 값비싼 완전 사립학교에, 중간계층은 정부와 학부모가 같이 부담하는 사립학교에, 빈곤계층은 교육 여건이 열악한 완전 공립학교에 다닌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83%는 부모의 월수입이 18만페소 이하다. 부모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받는 교육의 질이 차이 난다. 이 때문에 2006년에도 공교육 강화 등을 요구하며 ‘펭귄 혁명’이라 불린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근현대 사회에서 교육은 사회적 계층 이동의 유력한 수단이다. 하지만 많은 중남미 국가가 그러하듯 칠레에서 양질의 교육은 부유층만 누림으로써 불평등 구조를 고착·악화시키고 있다. 이번 시위는 칠레의 고질적인 사회적 불평등 문제가 교육이라는 계층 상승의 최대 통로에서 터져나왔을 뿐이다. 칠레는 현재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50으로 OECD 회원국 평균 0.31보다 크게 높아 회원국 가운데 최대 소득 격차를 보이고 있다. 국립 칠레대의 조사 결과, 칠레에서 상위 10%는 하위 10%보다 78배 높은 소득을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은 9월11일 전했다. 국민의 40%가 노동시장 불안 등으로 민영인 연금제도에 가입하지 못했다. 지난해 2월 대지진으로 2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해 격차가 더욱 심각해졌다.
가난은 줄었지만 빈부 격차는 줄지 않는다. 지난해 8월 취재를 위해 칠레를 처음 방문했을 때 몇 번 놀랐다. 최신형 한국차들이 시내를 달렸다. 한 주 전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본 낡은 중고차들은 없었다. 노천카페에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 이들이 북적이고, 주택가에는 강아지를 끌고 산책 나온 이들이 눈에 띄었다. 시내에는 100층 넘는 중남미 최고층 빌딩이 세워지고 있었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자, 이곳이 같은 수도인가 싶었다. 5층 넘는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잔디가 깔리고 승용차가 세워진 시내의 주택가 대신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 늘어섰다. 당시 한 택시기사는 자랑스레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집에도 다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있다. 칠레는 살 만하다. 지진만 빼고.” 대통령궁 앞 광장에서 만난 대학생은 또 이렇게 말했다. “칠레에서는 가난하면 대학도 못 가고 아프면 죽는 수밖에 없다.”

시스템 개선 vs 근본적 변화
이번 대학생 시위 사태로 피노체트 집권 당시 도입된 칠레의 신자유주의 발전모델에 대한 논쟁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리카르도 라고스 전 칠레 대통령(2000~2006년 재임)은 이번 사태로 칠레의 경제·사회적 모델이 “수명을 다했음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학생시위 지도자 카밀라 바예호는 이렇게 밝혔다. “교육의 위기는 독재시절 도입된 모델의 위기이고 현 정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반대다. 우리는 현 시스템을 개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육을 제품 취급하는 것을 멈추고 정부가 보장하는 권리로 보는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
칠레는 규제 완화와 정부 개입 최소화 등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던 밀턴 프리드먼이 이끈 이른바 ‘시카고 보이스’ 주도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실험실이었다. 교육 민영화도 그중 하나다. 당시 군사통치에 반대하던 핵심 본거지였던 국립대학에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워 재정 지원을 삭감했다. 칠레에는 100%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거나 등록금이 무료인 대학이 단 한 곳도 없다. 그만큼 교육조차 시장에 맡겨져 있고 정부 역할은 제한적이다. 피노체트 당시 민간 연금제도 도입을 감독한 사람이 현 피녜라 대통령의 형이다. 미첼레 바첼레트 전 대통령(2006~2010년 재임) 등 피노체트 독재정권 종식 이후에 들어선 중도좌파 ‘콘세르타시온’(1990~2010,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 협력체’) 정부에서도 20년간 이런 모델을 버리지 않았다. 콘세르타시온 정부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며 기존 모델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다. 이 때문에 피녜라 정부의 인기가 바닥을 기고 있지만 콘세르타시온에 대한 지지는 17%에 그친다. 저명한 정치사회학자인 마누엘 안토니오 가레톤 교수(국립 칠레대)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칠레의 정권 이양은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재생산하는 경제·사회적 모델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 모델을 옹호하는 쪽은 성장과 민주주의 안착을 강조한다. 지난 20년간 칠레의 GDP는 3배 이상 올랐고, 빈곤율은 40%에서 15%로 줄었다. 올해 상반기에는 1995년 이후 최고 수준인 8.4%의 경제성장을 기록했고, GDP의 1.3%에 해당하는 재정흑자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는 9월16일 전했다.
칠레의 경제·사회적 발전 모델을 둘러싼 해묵은 이념 논쟁이 다시 맞부딪치고 있는 셈이다. 그 한쪽에 정부가 있고 반대쪽에 학생들이 있다. ‘오늘의 발전을 가져다준 모델에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주장과 ‘다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없는 모델은 갈아치워야 한다’는 논리의 충돌이다. 칠레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학생 시위의 지도자 바예호는 대법원 결정에 따라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고 있다.
이런 주류적 분석과 달리, 저명한 정치학자인 파트리시오 나비아 교수(디에고 포르탈레스대)는 이번 사태를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반대나 불만의 표출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기존 모델에 대한 수정 요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시장친화적 경제모델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그 모델 안에서 통합의 문제이자 계층 상승 등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기회와 구조로 모델을 개선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며 “대학생의 70%가 가족 가운데 처음으로 대학 교육을 받는 1세대로 이들은 칠레에서 사회적 계층 상승이라는 꿈을 상징한다. 질 높은 교육을 받아 신분 상승을 하고 과도한 부채를 지지 않도록 정부가 지원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시위를 칠레의 경제발전과 높아진 기대 수준, 커진 계층 상승 욕구가 맞물린 결과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차기 대선을 규정할 의제
분석은 다소 엇갈리지만 지금 칠레 국민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좀더 공평하게 나눌 수 있도록 정부의 역할을 확대하는 시스템을 요구하고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내가 밥을 굶어도 화가 나지만, 나는 판잣집에 사는데 대저택에 사는 사람이 늘면 분노가 더 치솟는 법이다. 그럼에도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안겨준 경험은 칠레 정부를 확신의 덫에 빠뜨려 그 시스템 수정에 발목을 잡고 있다. 가레톤 교수는 “차기 대선은 새로운 사회냐 현 시스템 유지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지향을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제3의 길’ ‘자본주의 4.0’ 등 무엇이라 부르든. 1년 전 칠레 광산 매몰사고로 33명의 광부가 69일간 매몰됐다가 구조될 때처럼, 칠레 국민이 하나 돼 ‘치치치! 레레레! 비바 칠레!’를 다시 외칠 수 있을까.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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