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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황제의 성채 무너지나?

해킹·도청 의혹으로 영국에서 최대 위기 맞은 머독… 우파이자 시장주의 파수꾼 언론에 대한 사회적 성찰 불러
등록 2011-07-21 19:10 수정 2020-05-03 04:26
소유 신문사의 도청 파문으로 궁지에 몰린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7월13일(현지시각) 승용차를 타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고 있다. 연합 AP

소유 신문사의 도청 파문으로 궁지에 몰린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7월13일(현지시각) 승용차를 타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고 있다. 연합 AP

7월10일 오후, 영국 런던 남동부의 대형 슈퍼마켓 ‘테스코’ 안은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로 붐볐다. 톰 체임벌린(32)은 이날 신문 판매대 앞에서 처음으로 1파운드(약 1700원)를 내고 (NoW)를 구입했다. 그는 “어떤 신문이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라고 말했다. 영국 경찰을 매수해 유명 축구선수와 배우, 범죄 피해자 등을 전화 도청한 사실이 드러나 영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에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이 신문은 이날을 끝으로 폐간됐다.

7월13일 오후, ‘머독, (BSkyB) 100% 인수를 포기한다’는 기사가 런던 지하철역 가판대 신문들의 1면을 도배했다. 반전이라 할 만했다.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도청 사건과 관련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의 청문회를 추진하는 등 여론에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이지만, 하루 전만 해도 ‘의 폐간은 위성방송 인수를 위한 극약 처방’이라는 분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위성채널 는 비교적 중립이다’라고 평가를 받지만, 소속 기자는 머독을 어려워했다. 7월10일 저녁, 뉴스인터내셔널사 앞에서 머독에 항의하는 시위대 5명을 취재하던 기자에게 다가갔다. 머독에 대해 묻자 이 기자는 “이름은커녕 나이도 밝힐 수 없다”며 단호히 인터뷰를 거부했다. “뉴스인터내셔널은 우리 회사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민영방송 (ITV) 기자 데이비드(30·가명)는 조금 달랐다. “뉴스인터내셔널은 우리 회사에 투자하는 수많은 사업적 파트너 중 하나다. 뉴스 간섭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머독, 영국 신문 시장의 40% 장악

머독이 운영하는 뉴스인터내셔널 산하 신문들은 폐간된 이외에도 영국에서 최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대중지 , 정론지를 표방하는 와 등이 있다. 뉴스인터내셔널이 영국 신문시장에서 점유한 비율은 약 40%인데, 영국판 ‘조·중·동’이라고 할 만하다. 미국이 벌인 전쟁에 영국군 파병을 촉구하는 등 머독은 이념적으로 친미 성향의 우파 언론인이다. 2003년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이라크전 파병을 결정하자, 머독은 “대단한 용기와 두둑한 배짱을 가졌다”며 블레어를 치켜세웠다. 그는 공격적 경영을 추구하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뉴스인터내셔널은 의 지분 39.1%와 의 지분 17.9%를 보유하는 등 신문과 방송 간 교차 겸영도 하고 있다. 두 방송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의 연간 수익은 9억7천만파운드(약 1조66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는 공영방송 <bbc>, 와 함께 3대 지상파 채널로 꼽힌다. 머독은 또 미국에서 뉴스인터내셔널과 같은 계열사인 뉴스코퍼레이션을 소유하고 등을 두고 있다. 공영방송 본사 앞에서 만난 피디 그레이엄(48·가명)은 “우편향된 신문과 달리 영국 방송은 중도라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며 “머독이 를 인수했다면 그 균형이 무너지고 전쟁을 찬양하는 프로그램들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모두가 머독을 나쁘게 보는 건 아니다. 미국 대외선전 방송 의 런던 통신원 아딜 샤(27)는 와 를 칭찬했다. 파키스탄 국적의 샤는 머독이 세간의 평가처럼 ‘인종주의자’라고 생각되면 두 신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영국 언론계에서 인종주의는 금기와도 같은데 는 앞장서서 그것을 지키는 신문 중 하나다. 100%라고 할 순 없지만, 머독이 편집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것 같다.” 14년째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인도 국적의 무케시 파텔(42)은 과 가 “돈다발을 안겨주는 고마운 신문들”이라고 말했다. 두 신문은 보통 하루에 100부 단위로 판매되는데, 7월10일치 마지막 는 30분 만에 100부가 팔렸다. 주말 수익이 떨어질 터라 불안할 법도 했지만 그는 가 곧 부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머독은 절대 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의 주말판이 곧 나올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정권 교체에도 영향 끼쳐

머독의 존재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있다. 7월13일 오후, 경찰관 대니(37·가명)는 경찰청 인근 술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대니는 경찰서 내부에서 머독의 흔적을 느끼는 현실을 전했다. “머독이 가담했든 안 했든 (도청 파문은) 뉴스인터내셔널이 영국 경찰에도 이미 손을 뻗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겨운 일이지만, 동료들 모두 인정하고 있다.”
머독은 1960년대 영국 언론계에 진출한 뒤 1970년대 후반부터 선거 때만 되면 자신의 신문을 통해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고 노골적으로 밝혀왔다. 머독은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를 철새처럼 이동했다. 1980년대에는 보수당을 지지하다가 1990년대 중반 노동당으로 돌아섰고, 지난해 총선 때는 고든 브라운이 이끄는 노동당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브라운이 전임 블레어보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머독은 여러 자리에서 “블레어가 브라운보다 낫다”고 밝혔다. 결국 총선에서 패한 노동당이 13년 장기 집권을 마치고 보수·자민 연합당으로 정권 교체된 배경에는 경제위기와 브라운의 우유부단한 리더십, 언론의 전방위적인 비판이 있었다고 영국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7월13일 저녁 무렵, 런던 북부에 있는 권위지 본사로 향했다. 은 2009년 7월 영국 신문사 중에 최초로 도청의혹을 보도했고, 지난 7월 초 치명타가 된 ‘살해당한 10대 여성의 휴대전화 해킹’ 등을 폭로하며 경찰의 수사를 끌어냈다. 마크 세이(51) 기자는 머독의 포기와 관련해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신문은 정치성을 가질 수 있지만 머독은 지나쳤다. 신문사 내부에서 머독을 견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머독, 영국에서 발 붙이기 힘들어져”

머독 논란은 한동안 사그라지지 않을 듯하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9·11 테러 희생자 가족 도청과 관련해 머독의 미국 회사인 뉴스코퍼레이션을 수사하겠다고 나섰고, 머독이 인수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아들 제임스와 갈등이 있었다고 영국 언론은 보도했다. 정치인들의 협조도 예전 같지 않은데다 독자들도 떠나갈 판이다. 지난 7월14일 밤, 런던 남동부에서 만난 데이비드 커밍(25)은 “우린 간단하게 대응하면 된다. 머독의 신문을 읽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영국 정치권이 좀더 왼쪽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노동당 당수인 에드 밀리밴드는 이번 사태에서 연일 강성 발언을 쏟아내며 머독만큼이나 영국 언론에 많이 언급되었다. ‘존재감 없는 지도자’라는 빈정거림은 언론에서 찾을 수 없다. 그는 지난해 경선에서 노조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등 진보 성향이 강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팀 크룩 런던 골드스미스대 교수(미디어학)는 7월14일 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밀리밴드는 이번 머독 사태에서 여야 정치인들을 모두 이끌고 머독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우파이자 시장주의자인 머독은 영국 언론에서 사실상 발붙이기 힘들어졌다. 사회 전반에 걸쳐 갑자기 좌편향이 되지는 않겠지만 과도한 시장주의적 발상은 많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런던(영국)=이승환 통신원 stevelee05@gmail.com</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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