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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지만 착실한 민주화의 길

모로코, 국왕의 권한 총리·의회에 넘기는 헌법 개정 통과… 유혈 사태 없이 점진 개혁하는 아랍 민주화의 새로운 대안
등록 2011-07-21 19:06 수정 2020-05-03 04:26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6세(맨 왼쪽)가 지난 7월1일 왕권을 총리에게 대폭 위임하는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참여한 뒤 기표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 AP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6세(맨 왼쪽)가 지난 7월1일 왕권을 총리에게 대폭 위임하는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참여한 뒤 기표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 AP

지난 7월7일 한국 외교통상부는 ‘모로코 헌법 개정 국민투표 관련 외교부 대변인 논평’을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헌법 개정을 통해 권력분립, 국민의 권리와 자유 강화 등을 위한 모하메드 6세 국왕의 개혁 조치를 높이 평가하며, 향후 총선 등의 과정을 통해 모로코 국민의 여망이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정치 발전의 모범 사례로서 급변하는 중동 정세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평가한다.” 유럽연합(EU) 등 서방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북아프리카 왕정국가 모로코에서 7월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헌법 개정안이 98%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된 것에 대한 평가다.

국왕은 원수, 총리는 정부 대표로

모로코가 아랍 민주화 모델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에 떠밀리기는 했지만 위로부터의 개혁이 큰 충돌 없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정된 헌법은 국왕이 독점하던 권한을 총리와 의회에 넘기는 게 핵심이다. 모로코는 명목상 왕권이 헌법의 제약을 받는 입헌군주제지만 1999년 왕위에 오른 모하메드 6세가 의회 해산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 거의 모든 실권을 행사해왔다. 헌법 개정에 따라 모하메드 6세 국왕이 군대·종교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고 국가원수의 지위를 지키는 대신, 현재 국왕이 임명하는 총리는 총선에서 승리한 다수당에서 임명해 정부 대표의 지위를 부여한다. 총리는 국왕이 갖고 있던 주요 장관 임면권을 갖게 된다. 국왕은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법률을 시행할 수 있게 바뀌었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하려고, 국왕이 재판관 전원을 지명해오던 관행도 고쳐 지명 권한을 나눈다. 또 고문이나 임의 구금 및 남녀 차별 등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한다. 유혈 사태를 빚는 체제 전복이나 공화제 개헌 대신에 타협형 민주화에 합의해, 실질적 입헌군주제로 나가는 점진적 개혁을 선택한 것이다. 모로코는 1970년, 1972년, 1992년, 1996년에도 인권 개선 등 헌법을 개정하며 다른 아랍권에 비해 느리지만 착실히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애초 모로코도 ‘아랍의 봄’ 열기 속에서 모하메드 6세 국왕의 권력 이양 등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번져 이웃 국가들과 비슷한 길을 걷는 듯했다. 하지만 국왕이 시위대의 요구를 반영해 지난 3월 정치계·노동계·사회단체 등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구성한 뒤 헌법 개정안을 만들어왔다. 이런 점진적 개혁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에 정부가 사격을 하는 등 강경 대응하지 않았고, 시위대도 국왕 축출이 아니라 권력 분산을 통해 이름뿐인 입헌군주제를 실질적으로 시행하기를 요구했기에 가능했다. 물론 일부 반정부 시위대는 개혁 조처가 충분하지 않다며 헌법 개정 국민투표 뒤에도 시위를 벌였다.

시험대가 될 가을 총선

결국 이런 모로코의 사례는, 튀니지나 이집트 등에서 장기 집권한 독재자가 민중혁명으로 쫓겨난 뒤 혼란을 겪거나 리비아처럼 대립이 깊은 사례와 비교된다. 하오즈 세니거 리온 정치연구소 교수는 “리비아가 아랍인들이 피하고 싶은 사례라면, 모로코는 개혁을 통해 불만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반대 사례다”라고 평가했다. 는 7월11일 “모로코의 헌법 개정이 수백 년 된 군주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개정된 헌법 조문이 실제 정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선출된 지도자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는 헌법 개정은 유혈 대치로 얼룩지고 있는 ‘아랍의 봄’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오는 가을로 예정된 총선이 공정하게 치러지느냐는 하나의 실험대가 될 전망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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