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 대지진이 발생한 지 100일이 지났지만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도무지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고 발생 뒤 2개월이 지나자 마침내 도쿄전력은 ‘멜트다운’을 인정했으나 지금 사태는 더욱 악화돼 원자로 바닥이 녹아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핵연료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멜트스루’ 상태가 됐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은 이제 파국 일보 직전에서 줄타기를 하는 형국이다.
정치도 ‘멜트스루’한 일본그럼에도 지난 6월18일 가이에다 반리 경제산업상은 점검을 위해 가동 중단 중인 원전이 안전하다고 선언하고 재가동을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간 나오토 총리도 이 방침을 승인했다. 나는 이 뉴스를 후쿠시마현 호텔에서 들었다. 일본에서는 원전만이 아니라 정치도 ‘멜트스루’한 모양이다.
지난 6월16일부터 나흘간 후쿠시마를 다녀왔다. <nhk> 교육텔레비전의 라는 프로에 출연하게 돼 취재와 촬영을 위해 스태프와 동행했다.
6월16일, 대학에서 강의를 마친 뒤 고리야마를 향해 떠났고, 저녁 8시께 그곳에 도착했다. 밤거리는 얼핏 평온해 보였다. 어둑한 길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여고생들이 눈에 띄었고, 귓가에 들리는 그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는 해맑기조차 했다.
3월12일 집으로 찾아온 한국 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텔레비전에서 원전 수소폭발 영상을 봤다. 파국적 사태의 도래를 고하는 뉴스였으나 그날 이후로도 당장 내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바뀐 것은 ‘현실감’이었다. 주변 풍경이 기묘할 정도로 또렷하게 보였는데 어쩐지 모조품 같아서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집힌 느낌. 고리야마의 거리에서 여고생들 모습을 본 순간 다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되살아났다.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스태프와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갔다. ‘야키니쿠 호르몬’(불고기 내장)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에 들어갔다. 아직 30대로 보이는 젊은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걸자 일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는 자이니치(재일동포) 3세였다. 고리야마에서 태어나 자랐고 도쿄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조선학교 교사를 했으나 몇 년 전부터 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원전 사고 영향은?” 하고 묻자 원전 작업 관계자들이 식사를 하러 오는데 장사가 괜찮은 편이라고 다소 뜻밖의 얘기를 했다. 다만 그에겐 아직 소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어린아이 2명이 있는데, 아이들만이라도 방사선량이 적은 어디 다른 곳으로 피난시키고 싶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날, 우리는 고리야마에서 이다테무라를 거쳐 미나미소마로 향했다. 이다테무라는 방사선량이 높아 ‘계획적 피난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에는 차들이 오가고 있었으나 집들은 사람의 기척조차 없이 조용했다. 길에서 보이는 논밭은 아무 심은 것도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 방사선 때문에 올해 농사를 단념한 것이다. 미나미소마시에 들어가니 딱 한 사람, 논두렁 풀을 베고 있는 이가 눈에 띄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니 시미즈라는 75살 농부였다. 그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풀 베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가능한 한 방사선 피폭을 피하려고 야외 작업은 하루 1시간씩만 한다는 원칙을 정했단다. “내버려두면 저렇게 돼버려” 하고 그가 가리킨 근처 밭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썰렁해” 하고 시미즈가 내뱉었다. “여느 때 같으면 지금쯤 논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해서 밤에 잠도 잘 수 없을 지경일 거야. 한데 올해는 논에 물이 없어 개구리도 울지 않아. 썰렁해.”
비정한 힘에 저항하는 사람들
미나미소마에 들어가 사사키 다카시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은 스페인 사상 연구자다. 몇 년 전 도쿄에 있는 대학을 퇴직해 어머니 고향인 이곳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선생이 사는 지역은 원전에서 반경 20~30km에 있다. ‘긴급시 피난준비지역’이다. 언제든 피신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는 얘기다. 원전 사고 발생 직후 이 지역 주민 다수가 황급히 피난을 갔으나 사사키 선생은 마음을 다잡고 그대로 남았다. 앞으로도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원전으로부터 획일적인 동심원을 그리며 위험지역을 지정했지만, 실제로 이 지역 방사선량은 고리야마나 후쿠시마보다 낮다고 한다. 정치권력의 관료적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며 우왕좌왕하고 싶지 않다. 위험이나 불편을 각오하더라도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고 싶다. 이것이 사사키 선생의 생각이다. 그는 인지증(認知症·치매)을 앓는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우왕좌왕하면 아내의 병이 더 악화될까 걱정하는 것도 그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다. 아내라는 존재 덕에 ‘영혼의 무게중심’을 확실히 잡을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사키 선생은 초대면인 나를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2층 서재 한켠에는 벽 쪽 한가득 컴퓨터와 텔레비전, 전기밥솥, 전기포트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낮은 의자에 앉은 인지증을 앓는 아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빠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사키 선생은 아내의 손을 잠시도 놓지 않은 채, “늘 함께합니다. 산책할 때도, 잠잘 때도. 기억이란 건 한 사람이 잃어버리더라도 또 한 사람이 갖고 있으면 문제없어요. 아무 부자유도 없습니다”라며 웃었다.
사사키 선생은 홋카이도 태생인데, 나중에 일가가 만주로 이주했다. 부친은 만주국 관리였으나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현지인들을 비적이라 해서 쫓아내는 일을 한 듯합니다만 만년에는 자신이 한 일에 큰 의문을 품게 된 것 같습니다”라고 선생은 말했다.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와 고향인 미나미소마에 거처를 정했다. 도호쿠에서 홋카이도로, 다시 만주로 갔다가, 패전 뒤엔 또 귀국길에 오르는 등 사사키 일가가 밟아온 궤적은 대외 팽창을 거듭해온 일본 근대사의 궤적과 겹친다. 그 후예인 그가 인생 막바지에 병든 아내와 함께 정착하려던 땅에서 지금 뿌리가 뽑힐 지경에 처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좋든 싫든 직업, 자식들 학교, 이웃이나 벗과의 사귐, 땅과 집 따위 작은 계약관계 등의 그물망 속에 자리잡고 일정한 땅에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다. 그것은 향토애나 애국심 같은 것과 때로 혼동되기도 하지만 본래 다른 것이다. 이 땅이나 나라를 사랑해서 여기에 있는 건 아니다. 여기에 생활의 기본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전쟁이나 재해 등 외부적 힘으로 그 ‘뿌리’가 뽑히는 건 곧 생활의 기반 자체를 파괴당하는 것이며, 난민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논의 잡초를 베는 농부도, 인지증을 앓는 아내도, ‘농성’하는 노학자도, ‘뿌리’를 뽑으려는 비정한 힘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원전 지키려고 주민 접근 막는 정부
사사키 선생 댁을 나와 국도 6호선을 따라 남하하자 곧 경찰이 쳐놓은 봉쇄선이 나타났다. 해가 지고 점차 어두워지는 도로 위에 경찰차의 적색등이 요란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20km, 출입금지구역의 경계다. 옆 도로에는 자위대와 경찰 긴급차량들이 빈번하게 오갔다. 차를 탄 사람들은 모두 빈틈없이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들어갈 수 없는 도로 앞쪽에는 바로 그 순간에도 방사능을 계속 뿌려대는 원전이 있었다. 젊은 경관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신분과 온 목적 등을 캐물었다. 가나가와현 경찰에서 파견돼 24시간 교대로 근무한다고 했다. 젊은 경관들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는 걸까? 일반인이 위험지역에 들어가 피폭당하는 걸 막는다는 게 공식적 설명이리라. 하지만 그 지역은 본래 주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땅이다. 시각을 바꾸면 원전을 추진해온 정부와 기업이 인간들로부터 원전을 지키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원전 재난은 당초 ‘상정 외의 천재’라고들 했으나 지금은 인재였다는 게 명백해졌다. 원전 재난을 “핵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것과의 전쟁”에 비유한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정확한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하늘’이나 ‘자연’이 인간에게 가한 폭력이 아니다. 어떤 종의 인간이 이윤 추구와 잠재적 군사력을 향한 욕망 때문에 다른 인간의 ‘뿌리’를 파괴한 사건이다.
다음날 우리는 고리야마시 교외의 조선초·중급학교를 찾아갔다. 지난 40년간을 이 학교와 함께 살아왔다는 이사장은 자이니치 2세로,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방사선 측정기로 매일 방사선량을 자세히 측정해 기록하고 있었다. 측정기는 일반 학교라면 문부성이 대여해주는 것이지만, 조선학교는 그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일본 정부가 학교교육법상의 정식 학교(1조 학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갖가지 행정 정보도 조선학교에는 전해주지 않는다.
조선학교에서는 보호자 희망에 따라 아이들의 피폭 방사선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니가타의 조선학교로 아이들을 피신시키고 있다. 아이들은 니가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2주에 한 번 주말에만 고리야마의 보호자와 재회하려고 돌아온단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기엔 자금이나 정신 면에서 무리가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날 오랜만에 부모와 재회하려고, 교장이 운전하는 왜건차로 니가타에서 아이들이 돌아왔다. 마중 나온 어머니들은 실외에서 방사선에 노출될까 두려워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갔다. 한 어머니가 얘기해주었다. 들어보니 그 어머니는 재일 조선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온 사람이었다. 남편이 일본 사람이었다. 이와키시에서 재난을 당했다고 한다. 그날 하룻밤만 부모와 아이가 함께 지내고 일요일 오후에는 다시 아이들이 니가타로 돌아가야 한다.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는 일본인, 아이는 한·일 이중국적이다. 왜 조선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한 걸까? 그 이유를, 어머니는 심플하게 “우리말(조선어)을 배우게 하려고”라고 했다. 심플하지만 온당한 바람이 아닌가. 아버지도 기꺼이 그 선택에 동의했다고 한다. 그 온당한 바람 덕에 모자에게 요구되는 대가는 부당하게도 높다. 일본에서는 조선학교를 위험시하는 몰이해와 편견이 있다. 진학이나 취직 면에서 불리하다. 공적 교육 지원도 적어서 보호자의 학비 부담이 크다. 한국에서도 남북 분단이 계속되고 있어서 조선학교를 위험시하는 시선이 많을 것이다.
사고 현장에도 여전한 조선학교 차별
축구를 좋아한다는 이 아이에겐 이제부터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을 상상하는 내 마음은 솔직히 말해 무겁다. 일본은 일찍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한 나라다. 일본 국민 다수는 그 역사를 모르거나 무관심하다. 그런 나라에서 아이는 일본인과 조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살아가게 됐다. 그가 다니는 조선학교는 일본 사회에서 적으로 간주되거나 적어도 경계 대상이다. 게다가 그는 ‘후쿠시마의 아이’로 살아가야 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이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사회적 차별에 앞으로도 계속 노출될 것이다. 지진 직후부터 소리 높이 외치는 ‘일본은 하나’ ‘일본은 강한 나라’라는 슬로건은 얼마나 공허하고 자기중심적인가.
후쿠시마 체류 마지막 날, 나는 가야하마 해안으로 가봤다. 아직 낡아 보이지 않는 커다란 노인정이 쓰나미에 직격당해 완전히 파괴돼 있었다. 흙탕물 파도가 창과 벽을 때려부수고 천장까지 닿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노인들이 몇이나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을까. 불교의 100일 기제 때문인지 죽은 이들에게 바친 꽃다발이 남아 있었다.
거기서 해안으로 가는 몇km의 길에는 시커먼 건물 잔해들만 끝없이 쌓여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가, 있을 수 있었던가….”(하라 다미키의 시구)
소설가 하라 다미키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과 조우한 뒤 불타버린 들판 같은 거리를 방황하며 눈에 보이는 참상을 ‘여름꽃’이라는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그 작품의 기술은 자주 뒤틀린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초현실주의 회화’ 같았기 때문이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집히고, 비현실이야말로 진실이라는 사실이 속속들이 드러난 것이다. 몇km나 되는 건물 잔해가 이어지는 가야하마 해안에서 나는 그 하라 다미키를 떠올렸다.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해안을 때리고 있었다. 25km 정도 남쪽에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있다. 바다로 흘러간 방사성 물질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확실하게 인간과 자연환경을 위협할 것이다. 바다나 하늘에는 경계가 없다. 방사선 피해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에게 미칠 것이다. 그 으스스한 미지의 위험에 대해서는 ‘알레르기’나 ‘히스테리’야말로 걸맞은 반응이 아닐까. 하지만 일본 정부도 기업도, 그리고 어리석게도 수많은 시민도 벌써 위험이나 불안으로부터 눈을 돌리려 한다. 계속 경고를 발한 증인들은 고립당하고 피로에 지쳐 절망에 빠져든다. 하라 다미키는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자살했다. 또 얼마나 많은 하라 다미키가 죽음으로 내몰려야 하는 걸까.
후쿠시마(일본)=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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