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하면 많은 사람이 그리스·로마신화를 떠올린다. 그림 같은 섬과 바다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문화방송 김주하 앵커도 생각난다.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당시, 그는 마치 여신처럼 차려입고 현지 소식을 전해 화제가 됐다. 그가 돋보인 것은 고대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파르테논신전(BC 447~438)이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찬란한 역사의 나라 그리스의 모습은 지금 무척이나 초라하다. 경제위기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의 위기로 허우적대고 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EU, 그리스에 긴축재정 압박 </font></font>지난 6월22일 유럽의 관심은 그리스 의회에 쏠렸다. 그리스의 명운이 걸린 내각 신임투표가 실시됐기 때문이다. 에방겔로스 베니젤로스 신임 재무장관 등 새 내각에 대한 신임투표 결과는 찬성 155표, 반대 143표, 기권 2표의 통과였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의 카드가 성공한 셈이다. 야당과의 거국내각 구성이 실패하고 사회민주주의 정당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사회당) 소속 의원 2명이 긴축계획 등에 반발해 의원직을 사퇴하는 등 궁지에 몰리자, 재무장관 등을 교체하는 개각을 단행하고 신임투표라는 초강수를 꺼내든 것이다. 보수우파 성향의 신민주당(ND)이 조기 총선과 내각 불신임을 주장하고, 사회당 안에서도 반란표가 예상돼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사회당 의원 155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내각 불신임에 따른 조기 총선 등 정치적 혼란이 초래되면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지원이 끊기고 디폴트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의 결과였다.
외신들은 내각 신임투표 통과를 놓고 한 고비를 넘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이제 그리스 내각은 긴축재정 방안을 담은 ‘중기재정계획’을 6월30일까지 의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 그리스 내각은 6월22일 2012~2015년 긴축재정 예산안과 관련 시행령을 승인하고 서둘러 의회로 보냈다. 긴축계획 및 관련 시행령의 의회 통과는 IMF와 EU가 지난해 승인한 1차 구제금융 1100억유로(약 170조원) 가운데 5차 잔여분 120억유로를 7월 중순에 지급하는 데 필요하다고 요구한 선제조건이다. 긴축계획은 2015년까지 예산 감축과 세금 인상으로 280억유로, 공공자산 매각으로 500억유로를 조성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그동안 정부가 소유한 항공·버스·지하철·철도·마사회 등도 민간에 매각할 예정이다. 그리스는 이를 통해 3550억유로에 이르는 국가부채를 줄이고,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하로 낮출 계획이다.
긴축계획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리스는 5차 잔여분 120억유로를 받지 못하고 7월 디폴트에 처할 것으로 예상된다. 6월30일까지 긴축재정 계획이 의회를 통과하고 관련 시행령을 마련해야, 지난해 받은 1차 구제금융에 더해 새로 1200억유로 남짓한 구제금융을 EU와 IMF에서 받을 수 있다. 긴축계획은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그리스가 디폴트라는 파국을 피하려면 삼킬 수밖에 없는 독배다. 이 때문에 베니젤로스 재무장관은 “우리는 6월30일까지 2개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래야 유로그룹이 7월3일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움직이고 7월8일 IMF가 지원을 결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스 의회는 6월27~28일 토론을 거친 뒤 28일 늦게 긴축계획을 표결에 부칠 예정이다.
[%%IMAGE2%%]<font size="3"><font color="#006699">시민들, “내핍 생활 요구 공정하지 않다”</font></font>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으로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장롱 속 돌반지와 결혼반지까지 꺼내들고 350만 명이 참여했고, 약 230t의 금을 수출해 21억달러를 조달했다. 그 실효성과 적절성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어찌됐든 위기 앞에 뭉치는 힘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이런 단결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잘 알려진 그리스 고대 유적 가운데 하나가 콜로세움이다.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대형 원형 투기장 겸 극장이다. 검투사와 죄수, 맹수들의 피로 얼룩진 곳이다. 지금의 그리스가 그 모습이다. 위기 앞에서 사회 갈등을 풀고 나라를 구해줄 그리스신화 속 지혜의 여신 아테나도 보이지 않는다.
내각 신임투표가 통과된 만큼 긴축재정 계획도 통과되지 않겠느냐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사회당 내부에서도 신임투표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긴축정책에는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의원들이 나오고 있다. 조기 총선을 우려한 의원들이 내각 신임투표에는 찬성했지만, 지역구 주민들을 의식해 긴축계획에 찬성하기를 꺼리고 있다. 특히 야당은 EU와 IMF가 제시한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는 게 옳으냐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안토니스 사마라스 신민주당 대표는 법안 통과에 반대하며 구제금융 지원 조건의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 안이 세금을 늘리고 소비 수요를 위축시켜 경기 후퇴를 부추길 거라는 것이다. 민영방송 여론조사에서 그리스 국민의 43%는 그리스 정부가 EU와 IMF, 유럽중앙은행과 구제금융 지원 조건을 재협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 사회당과 86석을 가진 신민주당이 단합하지 않으면 긴축정책이 결코 시행되지 않을 것을 유럽 각국은 우려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긴축계획에 비판적인 신민주당의 태도는 내년에 조기 총선의 가능성이 제기되자 집권을 염두에 두고 국민 여론을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도 일부에서 나온다. 6월21일 발표된 집권 사회당의 지지도는 20.1%로 바닥을 기고 있다.
공공 분야 임금 및 연금 삭감, 증세, 복지 혜택 축소 등이 국민에게 환영받을 리 없다. 그리스에서는 공공 분야에서 이미 8만2400명이 해고됐다. 공공 분야 일자리 보호와 전기·수도·가스 등 기간산업 통제는 사회당의 기본 정책이었다. 지난 5월25일 이후 수천 명의 시위대가 의회 앞 광장에서 시위를 벌여왔다. 의회에서 신임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의회 밖 광장에서는 “도둑놈들, 도둑놈들”이라는 시위대의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한 시민은 언론 인터뷰에서 “거리의 꼬마와 쥐꼬리 월급쟁이들에게 이 위기를 떠넘기며 끝도 없는 내핍 생활을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정치인 누구도 경제에 문제가 있다고 밝히지 않아서 문제가 있는지를 안 것도 얼마 전이다”라고 비판했다. “매주 긴축정책이 발표되고 있지만 어떤 조처도 그리스를 위기에서 구해준다는 보장이 없다. 이제 국가의 부와 우리의 기념비와 섬과 땅을 팔아치우고 모든 것을 민영화하려고 한다. 그것에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도 나왔다. 정부의 정책 실패 책임을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 없다는 반발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어두운 전망, 커지는 우려</font></font>노동계의 반발도 거세다. 전력 분야 노동자가 민영화에 반대해 파업을 벌여, 단계적 정전 조처가 이뤄지기도 했다. 그리스 최대 노조인 그리스노동자총연맹(GSEE) 지도자 스탈스 아네스티스는 “만약 긴축정책이 통과되면 그리스는 EU의 실험 대상이 될 것”이라며 “노조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투쟁에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GSEE는 6월23일 성명에서 의회의 긴축계획이 논의되는 6월28~29일에 48시간 총파업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파판드레우 총리도 긴축정책이 혹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길은 험하지만 터널의 끝에 빛이 있다. 그리스 각 가정의 불안정을 끝내고 이 위기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다하겠다. 우리는 계획과 전망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경제위기를 초래한 실정 탓에 국민의 불신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몸이 달아오른 쪽은 EU다. 그리스가 디폴트에 직면할 경우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스페인 등 다른 17개 유로존 국가의 재정위기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이 그리스 내각의 신임투표 통과를 놓고 “이미 힘겨운 상황에서 불확실한 요소를 하나 제거했다. 그리스와 EU에 좋은 소식이다”라고 환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6월22일 “만약 현 상황을 풀지 못하면 유럽의 금융체제는 물론 세계 금융 시스템과 유럽 정치 통합도 위협에 노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총리 출신 6명을 포함한 유럽 지도자 15명의 최근 성명은 유럽이 그리스 사태에 갖는 위기감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유럽은 요즘 좋은 상황이 아니다. 유럽 통합 심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가속도를 잃고 오히려 후퇴할 큰 위험에 처해 있다”며 “빠르게 변하는 국제사회는 분명히 유럽의 이익에 반하고 있고 유럽은 점점 더 주변적 역할에 내몰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우려했다. 6월23일 EU 정상회의에서는 그리스 위기가 집중 논의됐다. 유로화는 유럽 통합을 가속화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지금 유로화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자 EU의 통합도 덩달아 위협받고 있다. 이 때문에 알랭 주페 프랑스 외무장관은 “지난 50년간 이뤄진 것을 구하기 위한 단호한 결의가 있다”며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만약 유로존이 사라지면 EU 자체가 위기에 빠질 것이며 우리는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그리스가 디폴트를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bbc>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리스는 위기에서 벗어날까? 전망은 어둡다. 그리스가 결국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몇 달 또는 몇 년 안에 디폴트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고 영국 일간 등이 전했다. 그리스는 지난 1년간 EU와 IMF의 감독을 받고도 예산 감축 및 조세수입 목표를 여러차례 지키지 못했다. 경기 후퇴가 예상보다 심각하고 긴축 조처에 대한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경제성장률(GDP)은 2010년 -4.5%를 기록했고, 올해는 -3.0%가 예상되고 있다. 경상수지 적자는 지난해에 2009년보다 10.4% 늘어난 데 이어, 올해 8.2% 늘어날 전망이다. 반면에 물가는 지난해 4.7% 오른 데 이어 올해 2.5%가 인상될 것으로 예상된다. 실업률은 지난해 12.5%에 이어 올해는 14.8%로 나빠질 것으로 전망된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시시포스의 운명?</font></font>
고대 그리스인에게 세상의 중심이 됐던 도시 델피는 그리스 신의 예언의 장소로 유명하다. 지금 신은 어떤 예언을 할까? 는 6월21일 이렇게 전망했다. “언덕 위로 바위를 굴리고 가는 파판드레우 총리는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성공할 가능성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처럼 낮아 보인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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