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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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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향한 김정일의 성동격서

1년 사이 세 차례나 중국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북-중 경제협력 강화로 한국과 미국 견인하려는 포석?
등록 2011-05-26 15:23 수정 2020-05-03 04:26

5월20일 아침 8시(중국 현지시각 아침 7시)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별열차가 두만강 쪽 접경도시인 북한의 남양을 거쳐 중국 투먼으로 들어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비공개 방문할 때 이용해온 특별열차다.

오보로 드러난 ‘김정은 단독 방중’

그런데 는 이날 오전 9시11분 “북 김정은, 투먼 통해 방중”이라고 긴급 타전했다. 곧이어 YTN 등 다른 한국 언론매체들도 ‘김정은 방중’이라고 보도했다. 와 등 석간들은 1면 머리기사로 ‘김정은 단독 방중’을 기정사실화했다. 언론 보도만 보면 5월20일 저녁 6시 넘어까지 특별열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넌 이는 김정일 위원장이 아닌 그의 셋째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된다.

지난 5월20일 아침 특별열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방문길에 나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이날 밤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의 한 호텔을 나서고 있다. 김 위원장 뒤편 왼쪽엔 최태복 북한 노동당 중앙위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모습이 보인다. 교토/연합

지난 5월20일 아침 특별열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방문길에 나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이날 밤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의 한 호텔을 나서고 있다. 김 위원장 뒤편 왼쪽엔 최태복 북한 노동당 중앙위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모습이 보인다. 교토/연합

하지만 정부 고위 관계자는 5월20일 오후 과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의 특별열차가 두만강을 건넌 건 사실”이라며 “김정은이 혼자 타고 갔다고 하면 오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석하자면,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 방문길에 나섰다는 뜻이다. 한국 언론사들의 ‘김정은 단독 방중’ 보도는 오보라는 얘기다.

왜 이런 ‘참사’가 빚어진 것일까. 배경이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해 5월과 8월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다. 김 위원장이 이 시점에 다시 중국을 방문하리라고는 정부 핵심 인사는 물론 전문가들과 언론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신 김정은 부위원장의 방중 가능성은 지난해 말부터 꾸준하게 제기돼왔다. 중국 쪽은 김정은이 지난해 9월28일 제3차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임명되며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 자리에 사실상 오른 뒤 여러 차례 그의 방중 초청 의사를 밝혀왔다. 저우융캉 상무위원(2010년 10월), 다이빙궈 외교담당 국무위원(2010년 12월), 멍젠주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2011년 2월) 등이 방북했을 때 그랬다. 특히 멍젠주 부장은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김정은 동지께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추대돼 조선 혁명의 계승 문제가 빛나게 해결된 데 대해 열렬히 축하한다”며, 북한의 3대 세습을 공식화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던 터다. 이쯤 되자, ‘김정은이 단독 방중을 통해 후계자 지위를 안팎에 공식화하려 할 것’이라는 추론에 기대 김정은의 방중 가능성과 관련한 각종 설이 난무했다.

늘 그렇듯이 북-중 양국은, 기사를 쓰고 있는 5월20일 밤 11시 현재까지 아무런 말이 없다. 관례다. 북-중 양국은 이전에도 김 위원장의 방중 사실을 그가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북-중 국경을 넘어 평양으로 돌아간 뒤에야 언론 매체를 통해 동시에 공개해왔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인터넷을 타고 빛의 속도로 세계 구석구석 전파되는 21세기 지구촌의 정보기술도 이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김정일 위원장은 왜 이 시점에 두만강을 건넌 것일까. 워낙 알려진 정보가 없는 탓에 정부 당국자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권위 있는 해석을 자신 있게 내놓지 못한다. 이 또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김 위원장의 방중 목적을 추론하기에 앞서 지난해 8월30일 김 위원장의 방중 결과라며 중국 관영 을 통해 공식 발표된 김 위원장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3개 항 합의’ 내용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쌍방 고위층의 상호 교류 유지. 둘째, 정부 주도, 기업 위주, 시장 활동, 공동 이익의 원칙으로 경제무역협력 발전에 노력. 셋째, 중대한 문제에 제때, 충분히 깊이 있게 교류하는 것이 동북아 지역 평화 안정을 보호하고 공동 발전을 추진하는데 매우 중요.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 목적도 원칙적으로 이 ‘3개 항 합의’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남한과 미국에 보내는 신호?

낙관적 시나리오는 이렇다. 지난해 8월 방중 이후 본격화한 중국 동북지역의 북-중 경제협력에 힘을 실어주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있다. 북-중 무역의 70%를 소화하는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신압록강 대교 건설공사가 5월 초 시작됐고, 중국 훈춘과 북한 나진선봉 지역을 잇는 도로 착공식이 5월 말 열릴 예정이다. 중국 당국이 힘을 쏟고 있는 ‘창지투’(長吉圖·창춘~지린~두만강) 지역과 북쪽 나진선봉 지역의 연계 개발 방안을 협의할 목적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 김 위원장이 지금껏 중국이나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대외정책과 관련해 대체로 온건 메시지를 밝혀온 전례에 근거를 두고, 이번 방중 과정에서 한반도 정세를 진전시킬 긍정적 메시지를 밝히리라는 전망도 있다. 김 위원장의 구체적 방중 일정이 드러나지 않은 5월20일 밤까지는 이런 전망이 다수설에 가깝다.

하지만 비관적 시나리오에 무게를 두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북-중 경협 문제는 이미 큰 문제가 없이 진행되고 있어, 김 위원장이 직접 중국까지 갈 이유가 없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상당하다. 정부 당국자도 “아직 단정하긴 어렵지만, 북-중 경협 강화가 이번 방중의 제1목적이라고 보기는 무리”라고 말했다. 북-중 경협보다는 꽉 막힌 한반도 정세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최근 6자회담 당사국들은 ‘남북대화→북-미 대화→6자회담 재개’라는 3단계 해법에 공감대를 넓혀왔다. 하지만 중국 쪽이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 3단계 해법은 남북대화 불발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남북 당국 간 대화에 앞서 북쪽의 천안함·연평도 관련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며 강경 기조를 굽히지 않는 사정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6자회담은 2003년 8월 시작된 이래 교착 국면에 빠질 때마다 대체로 북한 대 나머지 당사국의 5 대 1 구도가 형성됐지만, 이번엔 한국 대 나머지 당사국이라는 ‘역 5 대 1 구도’라는 지적이 많다. 이런 교착 국면을 돌파하려면 북쪽의 전통적 무기인 ‘비대칭적 도발’이 불가피하다고 김 위원장이 중국 최고위층에게 직접 설명하려는 것일 수 있다는 우려가 힘을 얻는 까닭이다.

서로 방향이 다른 두 시나리오 가운데 무엇이 사실에 부합할지는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게 하나 있다. 김 위원장은 후계자 시절인 1983년 6월 첫 방중 때를 포함해 이번까지 모두 8차례 방중했는데, 그 가운데 세 차례가 지난 1년 사이에 몰려 있다. 이 예외적 상황 전개는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실마리가 있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김 위원장이 보낸 특사조문단으로 서울을 찾은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한국의 전직 고위 인사들을 만나 속내를 가감 없이 밝힌 바 있다. 요지는 이렇다. ‘미국과 남조선이 우리와 협력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는 건 우리도 바라지 않는다. 남조선도 그걸 원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남북협력을) 잘해보자.’

그 뒤 남북 간에는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둘러싼 비밀 협의가 진행되는 등 한때 훈풍이 불었다. 하지만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과 2010년 11월 북쪽의 연평도 포격 사태를 거치며 오히려 악화됐다.

이제 선택은 MB의 몫

하여, 김 위원장은 이번 방중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던지려고 하는지 모른다.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권에 완전히 빨려들기를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미국과 남조선은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기 바란다.’ 손자병법에 빗대 말하자면, 성동격서다. 북-중 협력 강화 제스처로 한국과 미국의 전략적 선택을 견인하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공이 북쪽에 넘어가 있다고 하지만, 김 위원장은 공이 오히려 남쪽 코트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늦었다고 느낄 때가, 움직일 시점이라는 말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중 남북관계 드라마의 대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극적 반전인가, 파국인가. 선택은 이명박 대통령의 몫이다.

이제훈 편집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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