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트로피처럼 꺼내놓지 않겠다.”
미군에 사살된 알카에다 최고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의 주검 사진을 공개하라는 요구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5월4일(현지시각) 이렇게 대답했다.
빈라덴 사살 뒤 오바마 지지도 급상승하지만 백악관이 숨진 빈라덴의 피투성이 주검 사진을 트로피처럼 공개하지 않더라도, 미국은 이미 승리감에 젖어 ‘축하 파티’에 흥청대고 있다. 오바마가 빈라덴 사살을 공식 발표한 5월1일 밤, 백악관 주변에는 “USA, USA”를 외치고 성조기를 흔들며 승리에 취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정의는 실현됐다”는 오바마의 연설은 트로피를 치켜든 승리 선언과 다름없었다. 그는 “우리가 전력을 다하고 함께 일하면 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도 밝혔다. 오바마에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찬사가 쏟아졌다. 심지어 강경 매파의 상징인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까지 오바마를 칭찬했다. 가 빈라덴 사살 하루 뒤인 5월2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6%가 오바마의 국정수행 방식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지난 4월 조사 때보다 9%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테러리즘 대처 방식에 대한 지지도는 조사 항목 중 가장 높은 69%를 기록했다.
‘테러의 수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비극적 죽음을 놓고 저토록 환호하는 모습은 낯설다. 미국의 반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미국은 지난 10년간 9·11 테러라는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공중납치된 항공기 2대에 들이받혀 화염에 불타 무너져내렸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생생히 방송된 이 장면은 3천여 명이나 숨진 사건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
상처는 깊었다. 9·11 테러는 지난 10년간 미국을 완전히 바꿔놨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잇따라 뛰어들었다. 제 무덤을 판 꼴이었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미국 역사상 최장의 전쟁이 돼버린 아프간전의 수렁에서 아직 헤매고 있다.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교수형시켰지만, 대량파괴무기(WMD)가 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축출한 뒤 항공모함에서 ‘임무 완수’를 선언했던 오판은 두고두고 조롱거리다. 두 개의 전쟁터에서 숨진 미군만 6천 명이 넘는다. 미군의 이라크전 수행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6만6천여 명으로 집계된 것으로 지난해 10월 ‘위키리크스’ 폭로에서 드러났다. 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두 전쟁에 전비로 1조2830억달러, 보안 강화 비용으로 6900억달러 등 직접 비용만 2조달러를 들였다고 5월4일 전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인 14조달러의 재정적자의 큰 원인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이런 물리적 비용은 미국이 치른 무형의 대가에 비하면 미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두 전쟁은 미국과 이슬람권의 증오와 대립, 갈등의 악순환을 낳았다. 이라크 침공 뒤 중동에서 반미 물결이 넘쳤고, 알카에다는 두 전쟁을 세계 곳곳에서 ‘이슬람 지하드(성전) 전사’를 끌어들이는 도구로 썼다.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지 못한 이라크 침공 등 일방주의 외교로 미국의 위상은 추락했다. 결국 부시의 공화당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민주당 출신의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주요 원인이 됐다.
“미국은 9·11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오바마의 대선 공약과 달리 아직도 폐쇄되지 않은 관타나모 수용소는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남긴 치욕적 유산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중국에 인권 개선을 요구해온 미국이 자신들의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활용됐다. 지난 4월 말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자료에서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 가운데 무고한 소년과 노인, 택시 기사 등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개처럼 가죽끈으로 묶여 끌려다닌 수감자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빈라덴의 은신처 파악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물고문으로 얻어낸 정보가 결정적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해 ‘퓨리서치센터’가 미국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터키에서는 2002년 30%에서 2010년 17%로, 이집트에서는 2006년 30%에서 2010년 17%로 떨어졌다. 무엇보다 지난 10년간 테러와의 전쟁을 벌여왔지만, 세계는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는 비판이 많다. 미국에 입국하려면 얼굴 사진과 지문을 찍고 전신스캐너까지 거쳐야 하는 공항검색은 빈라덴이 남긴 생생한 트라우마의 현장이다. 미국이 빈라덴이 놓은 덫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처럼 미국이 아직도 치르는 대가를 고려하면, 빈라덴의 사살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애초부터 승리의 트로피가 될 수 없는 셈이다. 하물며 빈라덴을 대체할 알카에다 지도자들은 줄을 서 있다.
이를 두고 시사주간지 은 5월3일 “빈라덴이 10년간 도피함으로써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큰 피해를 9·11 테러 이후 미국에 입혔다”며 “빈라덴의 죽음이 10년이나 늦었고 미국의 잃어버린 10년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9·11 테러 이전의 나라가 더 이상 아니며 이는 용맹한 해군 특수부대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마크 레빈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5월2일 아랍 위성방송 기고에서 “부시 행정부는 알카에다 공격을 미국의 정치·경제 체제를 군사·석유·금융 복합체제로 급격하게 바꾸는 구실로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이 이런 대가를 치르며 10년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기엔 빈라덴은 이미 쇠락한 존재였다. 빈라덴이 알카에다를 실질적으로 지도하기는커녕 제 한 몸 숨기기에 바빴음이 드러났다. 그가 사살된 은신처는 인터넷은커녕 전화조차 연결돼 있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그가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진두지휘할 수 있었을까? 미국의 퓨리서치센터 조사를 보면, 빈라덴의 지지도는 2003년에서 2011년 사이 터키에서는 56%에서 13%로, 팔레스타인에서는 72%에서 34%로 크게 떨어졌다. 필립 젤리코프 미국 버지니아대 역사학과 교수는 5월3일 기고에서 “아랍권이 친미가 아닐진 몰라도 친알카에다도 아니다. 빈라덴의 인기는 이미 쇠퇴해왔다”고 지적했다. 10년간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이 과잉 대응으로 평가받는 까닭이다.
민주혁명 ‘부아지지 세대’가 온다아프간에서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중동·아랍의 정치 지형은 바뀌고 있다. 중동에서 독재정권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 등 서방은 그동안 공공의 적이었다. 알카에다 등 극단주의 세력은 폭력과 테러가 잃어버린 아랍의 권위를 되찾고 이스라엘과 평화를 맺은 친서방·친미 독재정권을 쫓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최근 중동·아랍의 민주화 시위는 테러가 아니라 민주화가 독재자 축출과 같은 더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튀니지 과일상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로 비롯된 민주화 시위는 알카에다의 테러리즘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혁명적 변화를 일궈냈다.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 세력은 존재감이 없었다. 서방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했지만 과장된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중동·아랍의 젊은 세대가 요구한 것은 이슬람 통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정의였다. 중동의 친미 지도자들이 극단주의와 테러리스트를 차단해야 한다며 미국의 지원을 끌어들인 뒤 정권 유지의 도구로 활용하던 시대도 저무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더 이상 중동에서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적 세력이 발붙이기 어렵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알카에다는 지도력뿐 아니라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동은 민주화의 봄을 거쳐 새로 태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에 때마침 빈라덴이 죽음을 맞았다. 이제 폭력투쟁의 ‘빈라덴 세대’가 사라지고 민주혁명의 ‘부아지지 세대’가 떠오르고 있다. 라드완 사이드 레바논대 교수는 5월2일 기고에서 “이제 중동에서 이슈는 어떻게 파괴하고 저항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새로운 국가와 정권, 시민사회를 형성하느냐에 쏠리고 있다”고 밝혔다.
중동이 봄을 맞고 테러와의 전쟁 아이콘이 사라진 지금, 미국의 정책도 그 틀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극단주의 세력과 테러는 억압과 모순, 증오에 기생한다. 빈라덴이 반미주의자로 돌아선 것도 미국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 증오를 낳던 정책을 바꿔야 한다. 빈라덴의 죽음으로, 테러와의 전쟁과 지역 안정을 내세워 서방이 반민주적 정권과의 결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시대는 갔다. 출발은 팔레스타인 문제다. 아랍권으로서는 아랍민족의 땅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 건국을 허용한 것이 증오와 대립의 씨앗이었기 때문이다. 는 5월3일 “서방이 주장해온 자유를 부인하는 폭군과의 결탁을 서방이 끝내야만 이슬람 과격세력의 추종자 모집을 막고 지하드의 독이 무슬림 주류에 침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중동의 변화를 따라잡으려면 변해야 하며, 무엇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사설에서 지적했다.
빈라덴 사살, 또다른 증오의 씨앗될까미국은 빈라덴의 사진을 공개하지 못했다. 아직 9·11 테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달리고 있음을 고백했다. 미국이 9·11 테러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진정으로 ‘더 안전한 세상’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 오바마가 무슬림들과 진심으로 새 대화에 나서 온건 무슬림의 지지를 얻어야만 이슬람과의 화해가 싹틀 수 있다. 그것이 진짜 테러와의 전쟁 승리의 트로피다. 마크 레빈 교수는 5월2일 기고에서 “이제 오바마 대통령과 정치권, 언론이 빈라덴의 9·11 테러 이후 진행된 정책들을 되돌아볼 때”라고 지적했다. 는 5월2일, 한 무슬림 성직자의 “우리는 미국의 반응과 축하가 싫다. 빈라덴이 목표가 아니었고 미국과 우리 사이에 문은 닫혀 있다”는 말을 전했다. 1막과는 전혀 다른 테러와의 전쟁 2막의 문을 여는 것은 미국에 달렸다. 다만, 전망은 회의적이다. 빈라덴의 죽음에 환호하는 미국의 모습은 반인류적 테러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비무장 상태의 ‘적’을 잔혹하게 사살한 복수의 전쟁이었음을 드러낸다. 또 다른 증오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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