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 달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얼굴에 큰 ‘×’자가 그려져 있다. 군복을 입고 가스총을 찬 이들이 ‘타도 북한’을 외친다. 그의 사진은 환호 속에 불탄다. 미국 성조기가 펄럭인다. 잊을 만하면 벌어지는 서울시청 광장의 풍경이다. 한국 극우세력의 준동은 가끔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불안한 수준은 아니다. 아직 한국에서 이런 세력이 주축이 된 극우정당은 의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무슬림 이민자 증가에 대한 적대감
유럽은 다르다. 극우세력의 성장이 불안한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4월17일 실시된 핀란드 총선에서 극우정당 ‘진정한 핀란드인’(TF)은 19.0%를 득표해, 4.1%를 기록한 2007년 총선 때보다 5배 가까이 득표했다. 핀란드 의회 전체 200석 가운데 39석을 차지했다. 이번 돌풍이 주목되는 이유는 유럽에서 극우정당의 성장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스웨덴 총선에서 극우정당 스웨덴민주당(SD)은 5.7%를 얻어 처음으로 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같은 해 6월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극우자유당(PVV)이 15.5%를 득표해 15석을 늘리며 24석으로 제3당을 차지했다. 2009년 노르웨이 총선에서는 역시 극우정당 진보당(FrP)이 22.9%를 기록했고, 2007년 덴마크 총선에서도 덴마크 인민당(DVP)이 13.9%를 얻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극우정당 북부동맹이 2008년 총선에서 8.3%를 얻은 뒤 연립정부에 참여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극우정당의 성장이 북유럽에서 두드러진다는 사실이 우려스럽다. 북유럽은 프랑스나 독일 등에 비해 이민자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다문화 사회 해법을 논의하며 북유럽의 사회 통합 프로그램 등을 모범적 모델로 여겨왔다.
한국의 극우세력은 특이하게도 ‘반북·친미’ 편향이 강하다. 반면 유럽의 경우는 전형적인 극우의 얼굴을 띤다. 민족주의, 인종주의, 타민족 혐오, 반민주주의, 국가주의가 핵심 요소다. 구체적으로는 이민에 반대하며, 유럽통합에 반대한다. 제노포비아(외국인혐오증), 이슬람포비아(이슬람혐오즘), 유로포비아(유럽통합혐오증)로 정리된다.
유럽에서 극우정당의 득세에는 갈수록 늘어나는 이민자, 특히 무슬림 이민자 문제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톨릭이 주류인 유럽에서 무슬림 이민자와의 문화·종교적 차이, 노동시장 경쟁 심화 등은 적대감을 키운다. 유럽은 과거 대규모 이민 유출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복구 이후 경제성장 과정에서 인구가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 서유럽의 무슬림 인구는 2008년 기준 프랑스 10%, 네덜란드 6%, 독일 4.9%, 오스트리아 4.2%, 스위스 4.0%, 덴마크 3.7%, 스웨덴 3.0% 등에 이른다. 영국은 2004∼2010년 외국인이 140만 명에서 440만 명으로 늘었다. 영국 일간지 는 4월15일, 지난해 영국에서 태어난 8명 가운데 1명이 이민자 후손이라고 보도했다.
유럽 극우정당의 최대 슬로건인 ‘반이민’은 사실 인종주의의 다른 얼굴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서유럽 국가는 인종차별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극우정당들은 대부분 인종차별이라는 이름 대신 ‘정체성 보호’를 내세운다. 자국 문화를 보호해야 하고 동화되지 못하는 외국인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은 독일인에게, 외국인은 나가라’는 구호가 잘 보여준다. 이민자에 대한 반감은 통계로 잘 드러난다. 유럽연합(EU) ‘기본권리청’(FRA)의 2011년 차별 보고서를 보면, ‘지난 1년간 차별을 받은 적이 있다’는 이민자 응답이 북아프리카 출신의 28%,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의 18%, 집시의 16%, 터키 출신의 15%로 나타났다. 기본권리청 2010년 연차 보고서를 보면, 극우세력에 의한 범죄는 독일에서 2001년 1만54건이었지만 2008년 1만9894건으로 10.6% 늘었다. 특히 2008년은 1년 전에 비해 15.8% 느는 등 급증하고 있다. 스웨덴은 2000~2008년 7.7% 늘었는데, 특히 2007년 387건에서 2008년 667건으로 72.4% 급증했다. 프랑스는 2000~2007년 사이 17.9% 증가했다. 차별은 인종범죄로 이어진다. 2000~2008년 덴마크 87.8%, 아일랜드 24.2%, 프랑스 20.5%, 핀란드 14.2%, 오스트리아 11.6%, 스웨덴 9.7% 등 인종범죄가 크게 늘어났다.
“정체성 혼란과 경제 위기가 원인”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화낼 일이 없다. 제노포비아에 불을 지른 것은 경제 위기 속 먹고살기 힘든 현실이다. 극우정당 지지자들은 고실업, 주택난 등의 문제를 이민자 탓으로 돌린다. 최근 오스트리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노동시장 개방으로 외국인이 증가할 것을 우려했고, 특히 교육수준이 낮은 45%가 일자리를 빼앗길까 걱정했다. 오스트리아의 실업자 일리 말리(26)는 지난 4월19일 과의 인터뷰에서 “이민자들이 싼값에 일자리를 얻다 보니 급여가 떨어지고, 결국 전체 시스템을 망친다. 정부가 이민자를 다루는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정부의 재정 적자가 쌓여가는 상황에서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자국민을 과거처럼 사회보장제도가 충분히 흡수하지도 못한다. 김응운 한국외국어대 교수(프랑스어과)는 “세계화나 유럽통합 가속화에 따른 정체성 혼란, 값싼 노동력 유입 등에 의한 위기감이 유럽 사회를 우경화하고 있다”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적 주장이 금기시됐지만, 세월이 흐르며 경계감이 잊혀져가는 것도 우경화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유럽은 1980년대 대처리즘과 헬무트 콜의 우익 보수주의가 압도했지만 1990년대 이후 퇴색했다. 2000년대는 사회민주주주의가 붐을 이뤘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제3의 길’을 내세웠고,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는 ‘좌파 현실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신중도’를 내걸었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잇따라 보수 정권이 집권하며 유럽은 뚜렷이 우경화되고 있다.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번갈아 집권하는 전통도 깨지고 있다.
우경화 속에서 극우정당은 서민의 불안감과 좌절감을 부추겨 철저한 이민자 통제와 이민자에 대한 사회보장 혜택 폐지나 축소를 주장한다. 또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 부패 정치 엘리트에 대한 반감, 투표율이 낮은 시기 대의정치의 폐해 등을 지적하며 파고든다. 지난 4월17일 총선에서 극우정당이 돌풍을 일으킨 핀란드는 2009년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고, 지난해 6월 총리가 불법자금 수수 의혹으로 물러나는 등 주류 정당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다. 그나마 소수 정당의 진출이 어려운 소선거구제가 극우정당의 급격한 의회 진출을 막고 있다.
국민의 반이민 정서에 맞춰 표심을 잡으려는 유럽의 각 정부도 맞장구를 치고 있다. 프랑스가 무슬림 여성의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지난 4월11일부터 금지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집시 수천 명을 강제 추방한 프랑스는 이민 수용자를 연 20만 명에서 18만 명으로 줄일 계획이다. 금융위기설이 나도는 스페인은 외국인 실업자가 3년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각서를 쓰면 항공권과 1만달러 이상을 지원하는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3개월 이상 실직하면 강제 추방하는 법안을 마련 중이다. 이탈리아는 불법 이민자를 보호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추진하고 있다.
각국 지도자들은 아예 다문화정책 실패를 잇따라 선언하고 있다. 지난 2월 “영국에서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고 선언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4월14일 “영어를 못하거나 영국 사회에 통합될 의지가 없는 이민자들이 불편과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월 “‘프랑스식 이슬람’이 아닌 ‘프랑스 안에서의 이슬람’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해 10월 “다문화사회로 공존하자는 접근이 완전히 실패했다”며 “독일어를 못하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우경화는 악순환을 낳는다. 인종차별 등에 따른 증오범죄는 또 다른 증오범죄의 보복을 낳으며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2005년 7월 52명의 목숨을 앗아간 런던 지하철 테러사건은 소외된 파키스탄계 이민 2세들이 저질렀다. 2005년 10월 프랑스 파리 교외지역(방리뉴)에서 벌어진 대규모 차량 방화 소요는 차별받은 이민자들의 분노가 표출한 것이다. 이제 이민자와 이들의 2세는 동화교육을 거부한다. ‘2등 국민’ ‘3등 국민’ 취급받는 자신들에게 어차피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극우 경계하던 국민들도 우경화?극우정당의 득세는 ‘하나된 공동체’라는 유럽 통합의 정신조차 위협하고 있다. 극우정당들은 EU 탈퇴를 주장하거나 EU의 간섭 최소화를 주장한다. EU 역내 자유로운 이동 보장과 EU 확대에 따른 동유럽 이민자의 대거 유입 등에 대한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반EU 정서는 EU 안에서 공조를 가로막고 있다. ‘진정한 핀란드인’당은 재정위기에 빠진 포르투갈 지원에 반대하고 있다.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지원은 유로존 17개 회원국 전체의 승인이 필요한데, 핀란드는 의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 아랍권 반정부 시위 뒤 난민이 대거 유입하자 이탈리아가 EU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나머지 EU 회원국들은 ‘자국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며 지원을 거부했다. 프랑스는 튀니지 난민이 이탈리아로 몰려들자 지난 4월17일 이탈리아 기차의 자국 통과를 가로막아 갈등이 빚어졌다. 유럽 통합의 핵심 가치인 자유로운 이동조차 막은 것이다.
EU는 전쟁의 폐허 뒤 새로운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싹텄다. 1957년 로마조약 체결로 시작된 유럽 통합은 자유와 평화와 번영의 길을 걸으며, 지역 통합의 모범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제 ‘극우세력과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김응운 교수는 “과거에도 극우의 목소리는 있었지만, 우려스러운 것은 극우정당의 주장을 경계하던 (유럽 각국의) 국민이 경제 위기를 계기로 귀기울이는 현실”이라며 “극우정당의 지속적인 성장 여부는 유럽의 지적 성숙도가 어느 정도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 겉으로 비치는 유럽의 성숙도는 그리 미덥지 못하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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