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녹색당 바람이 불고 있다.
녹색당은 지난 3월27일 지방선거에서 중도우파인 집권여당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CDU)의 텃밭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24%를 득표해 역사상 첫 주총리를 배출하는 등 지지율 급상승세가 멈추지 않고 있다. 시사주간지 은 4월6일 “최근 여론조사기관 ‘포르자’에 따르면, 녹색당이 역사상 최고 지지율 28%를 얻었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중도좌파 사민당(SPD)을 5% 차이로 제쳤다. 지금 총선을 치른다면 녹색당 출신 총리를 배출할 기세다.
총리의 원전 시한 연장이 녹색당 지지 불러
독일에선 주말이면 크고 작은 도심에서 반핵 시위대가 가득 찬다. 오는 4월25일 체르노빌 원전사고 25주년을 앞두고 대규모 반핵시위 준비도 한창이다. 지방선거 전날인 3월26일 베를린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25만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분위기상 ‘원전 폐쇄’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정당들은 질세라 너도나도 원전 폐쇄를 외친다. 환경정책에서 후진적이던 우파 자민당(FDP)도 원전 폐쇄 대열에 가세했다. 자민당은 지지율이 5%대로 급격하게 떨어지자 10년째 당수인 기도 베스터벨레가 당수와 부총리직에서 밀려났다. 그는 불과 1년6개월 전 총선에서 14.6%의 득표율로 연방정부 부총리에 입성했다. 현 환경부 장관 노르베르트 뢰트겐도 최근 조속한 원전 폐쇄를 약속하며, 공식 석상에 녹색 넥타이를 매고 나타난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야당, 노동조합, 종교계를 비롯한 여러 그룹과 함께 에너지 관련 국민 합의를 끌어내겠다고 발표했다. 젬 외즈데미르 녹색당 당수는 4월3일치 시사주간지 과의 인터뷰에서 “총리가 실수를 인정하고 에너지 정책을 수정한다면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며 원전을 6년 안에 완전히 폐쇄할 것을 요구했다.
녹색당 내부 분위기는 어떨까? 지난 4월5일 베를린에 위치한 연방의원 사무실에서 녹색당 한스 요제프 펠(59) 의원을 만났다. 그는 지역 풀뿌리 환경운동에 참여하다가 1998년 정치에 입문한 에너지 정책 전문가다. 펠 의원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충격이 이번 바덴뷔르템베르크 선거 승리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사고 몇 달 전부터 녹색당 지지율은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현 정권의 에너지·환경 정책 등 다른 요소들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며 “특히 메르켈 총리가 2021년까지 원전을 모두 폐쇄한다는 기존 정부 정책을 폐기하고 가동 시한을 평균 12년 연장했기 때문에 유권자가 녹색당을 선택했다. 이런 분위기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녹색당은 2030년까지 독일에서 재생에너지만으로 100% 에너지 공급이 가능하리라고 전망한다. 펠 의원은 재생에너지는 경제에 부담을 주지 않고 오히려 원전사고, 환경변화 등으로 생기는 경제 부담을 덜어준다고 강조했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독일 국민의 지지율은 80%에 이른다. 반면에 핵에너지를 원하는 국민은 5%에 불과하다며 펠 의원은 녹색당의 밝은 미래를 강조했다. 그는 1998년 사민당과 녹색당의 적녹연정 탄생이 재생에너지 성장의 원동력이었음을 상기한다. 그는 “재생에너지 성장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엄청났다. 이는 곧 긍정적인 산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1998년 3만 개이던 재생에너지 관련 일자리는 현재 37만 개로 늘어났다. 12년 만에 재생에너지 관련 일자리가 10배 이상 창출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운동이 낳은 재생에너지 바람
독일이 과민하다 싶을 정도로 재생에너지 정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펠 의원은 시민운동과 그들의 자발적 참여에서 그 뿌리를 찾았다. “독일은 수십 년의 환경운동 전통이 있다. 우리는 핵에 반대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끊임없이 해결책을 찾았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재생에너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로써 지역 그룹들이 형성되고 진짜 큰 시민운동이 됐다. 한 예로 재생에너지 주요 투자자본은 에너지회사가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나왔다. 태양열 지붕, 시민 풍력발전소 등 재생에너지 시설의 80%가 개인 투자다. 특히 2000년에 제정된 재생에너지개발법을 통해 재생에너지는 더욱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자리잡았다.”
펠 의원은 한국의 재생에너지법에도 밝았다. 그는 “한국에도 독일과 비슷한 재생에너지 개발법이 제정됐지만 몇 가지 세부 규정 때문에 현실적으로 재생에너지 개발이 어렵다. 정부가 원전, 석탄, 천연가스, 석유경제의 이해를 대변하기 때문”라고 비판했다. 또한 “까다로운 재생에너지 개발 관련 규정이 재생에너지 개발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세계적으로 많다”며 “한국이 하루빨리 원전을 폐쇄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유럽에 끼친 영향의 경험에 비춰볼 때 한국이 장기적으로 후쿠시마 사고의 영향을 받아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펠 의원은 “한국 원전도 다른 원전과 마찬가지로 안전 문제를 안고 있고, 조정할 수 없는 위험이 항상 뒤따른다. 더 이상의 원전 건설은 안 된다”며 “현재 가동되고 있는 원전도 이른 시일 내에 중단할 것을 충고한다. 한국도 20년 안에 태양열·수력·지력·조력 발전 등 재생에너지를 통해 에너지를 100%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산업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2030년까지 전세계 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100% 공급하자는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제안서를 소개했다. 기술적·산업적으로 가능하고, 기존 에너지 공급원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펠 의원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여러 국가들이 에너지 정책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도 5년간 새로운 원전 건설 계획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원전 건설 완전 중단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중국이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자력에너지는 세계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는 “재생에너지가 핵에너지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사실을 세계인 모두가 인식하게 된다면 분명 원전은 사라질 것이다. 원자력에너지는 싸다고 알려졌지만 폐기물 처리 과정에 드는 비용은 엄청나고 세금 납부자가 이 비용을 지급한다”며 “모든 비용을 고려하면 원자력에너지는 결코 저렴하지 않다. 특히 후쿠시마 사고를 보면 피해가 막대하지 않은가. 원전을 건설하는 것보다 태양열 발전시설을 건설하는 게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다”라고 단언했다.
기민-녹색 연정 ‘원전’ 태도에 달려
앞으로 집권여당 기민련이 녹색정치를 펼 준비가 된다면 기민련과 녹색당의 연립정부도 가능할까? 펠 의원은 “지난해 10월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재생에너지 시대에 들어섰다고 표명하면서도 원전 가동을 연장했다. 겉으로는 재생에너지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안으로는 그 반대의 정책을 펼쳤다”며 “우리 당은 재생에너지 정책을 실질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당과 협력해서 일할 것이다. 메르켈 총리가 진심으로 재생에너지 정책을 펼 것이라면 연정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 진심인 것 같지 않다”고 일침을 가했다.
글·사진 베를린(독일)=한주연 통신원 juyeo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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