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11일 경남 마산 앞바다. 한 고등학생의 주검이 떠올랐다.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까지 관통한 처참한 상태였다. 3·15 마산시위 당시 강제해산을 시키던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가 행방불명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이었다. 처참한 그의 주검은 3·15 부정선거에 들끓는 국민의 분노에 불을 댕겼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제2 마산데모’에 이어 서울에서 학생 2만여 명이 총궐기에 나서며 4·19 혁명은 타올랐다.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이승만은 5월29일 망명길에 올랐다.
중동·이슬람권의 시민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낸 4·19 혁명을 여러 면에서 떠올리게 한다. 김주열의 죽음은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 이후 12년째 장기 집권하며 1954년 대통령 3선 금지를 면제해주는 사사오입 개헌까지 통과시킨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온 계기였다. 시민혁명을 되돌아보면, 이처럼 김주열의 죽음과 같은 ‘우연한’ 기폭제가 오랜 폭정에 대한 저항이라는 ‘필연’을 끌어냈다.
죽음 혹은 죽음의 소문이 일군 혁명이번 중동·이슬람권 시민혁명의 출발점이 된 튀니지 ‘재스민 혁명’은 과일과 좌판을 빼앗긴 한 노점상 청년의 분신이 도화선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얻지 못한 20대 청년의 분신 항거는 독재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고 23년 독재를 끝장냈다. 그의 분신 항거는 이집트 등 이웃 나라들의 반독재 저항으로 번져, 여러 지도자가 위기에 몰려 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도화선은 1978년 이란의 한 극장에서 수백 명이 불타 숨진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 무렵 팔레비 왕조의 부패와 빈부격차 심화, 서구화에 대한 반발 등으로 왕정체제는 고비를 맞고 있었다. 1978년 8월 반국왕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됐는데, 아바단에서 영화관 방화 사건이 벌어졌다. 시위 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극장에 불이 나 400여 명이 숨지자 시위대는 당시 비밀경찰의 소행으로 의심했다. 이 사건으로 팔레비 왕조에 대한 저항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해 9월 테헤란 광장의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발포로 2천여 명이 숨지는 ‘검은 금요일’ 사건은 팔레비 왕조의 몰락을 예고했다. 그때까지도 팔레비 왕조와 협상을 통한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이란인들도 돌아섰다. 반왕조 시위는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갔다. 결국 국왕은 이집트로 달아나고 1979년 2월11일 혁명정부가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수많은 시민혁명에서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혁명의 열기와 저항의 힘을 뭉쳐왔다. 1998년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시위에서도 비슷한 점이 드러난다. 수하르토 대통령에 저항하던 시민들의 시위는 1998년 5월 학생 4명이 총에 맞는 사건이 벌어진 뒤 격화됐고, 1천 명을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1989년 체코에서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린 ‘벨벳 혁명’은 실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소문’이 기폭제가 된 경우다. 1989년 11월17일 폭동 진압 경찰이 프라하에서 일어난 평화적인 학생 시위를 진압했고, 공산당 비밀경찰이 학생 2명을 폭행해 숨지게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후 시위가 확산되면서 결국 11월28일 공산당은 권력을 포기하고 일당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12월 초에는 오스트리아·서독과 체코 국경에서 철조망이 제거되고 그해 말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 대통령에 올랐다.
되돌아보면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된 것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그해 1월 대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다 숨진 사건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에 불을 붙이면서 6월 항쟁을 불러왔다. 1987년 6월9일, 연세대에서 열린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진 이한열의 죽음도 6월 항쟁을 격화시킨 계기였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은 독재정권의 만행에 시민들이 떨쳐 일어나게 했다.
측근의 배반과 외부 압력이 정권 무너뜨리기도시민혁명과 독재정권의 붕괴에는 측근 세력의 ‘배반’도 자리잡고 있다. 9월 차기 대선까지 퇴진을 거부하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2월11일 퇴진을 전격 발표한 데에는 그가 의지한 군부의 압력이 있었다. 군부는 사퇴를 거부하는 무바라크에게 “물러나지 않으면 쫓아내겠다”고 최후통첩을 했고, 이것이 조기 사퇴를 거부하는 연설을 한 지 몇 시간 만에 무바라크가 사퇴로 돌아선 배경으로 전해진다. 군부는 몰락 직전의 무바라크를 지지하는 대신 그에게 등을 돌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1989년 12월21일 수도 부쿠레슈티의 공산당중앙위원회 건물 발코니에서 10만 명 넘는 군중을 향해 소요사태를 비판했다. 하지만 군은 그의 발포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는 믿었던 군부에 의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튀니지에서도 군부가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벤 알리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렸다. 박정희 체제는 최측근이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무너졌다.
미국 등 외부의 압력도 낡은 정권의 몰락을 앞당겼다. 무바라크의 막판 퇴진에는 그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의 거듭된 사퇴 촉구가 작용했다. 오랫동안 지원하던 친미 독재자라도 몰락이 자명한 순간 등을 돌린 것은 미국이 수차례 선택한 길이었다. 옛 소련도 1989년 동유럽 민주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더 이상 소련군으로 동유럽 공산당 체제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밝혀 공산권의 해체를 재촉했다.
배고픔에 죽어가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낡은 독재자들의 ‘경맥동화’도 정권 몰락 직전에야 사태를 깨닫게 만들어, 발버둥쳐도 사태를 되돌리지는 못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혁명 뒤에는 정치적 단죄가 따르기도 한다. 마크 앨먼 영국 옥스퍼드대학 역사학 교수는 언론 기고에서 “혁명 뒤 대중은 몰락한 통치자를 처벌하기를 원하고, 후임 지도자들도 정권 교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제·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전임자 단죄에 나서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아랍의 박정희’가 나타난다면 위험시민혁명이 민주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민혁명이 독재자를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혁명이 추구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 미국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2005년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1972년 이후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진 67개 나라를 분석한 결과 35개 나라만 ‘자유 국가’로 분류됐다. 알바니아와 우간다 등 23개 나라는 ‘부분 자유 국가’, 벨라루스와 짐바브웨 등 9개 나라는 ‘비자유 국가’로 분류됐다.
또 이집트와 튀니지에서처럼 비폭력 시민연대를 통한 정권 교체가 엘리트들에 의한 하향식 정권 교체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67개 체제 전환 및 정권 교체국 가운데 50개국에서 비폭력 시민 저항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50개국 가운데 32개 나라에서는 정치적 권리와 시민의 자유가 상당한 수준으로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스칸디나비아반도와 가까운 발틱국가들은 소련에서 분리한 뒤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이룬 모델로 꼽힌다. 반면 마케도니아와 우즈베키스탄 등 하향식 정권 교체를 이룬 14개 나라의 경우 3개 나라만이 2005년 조사에서 ‘자유 국가’로 분류됐다.
지금 이집트도 성공적 민주화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다. 무바라크 대통령 하야 뒤 국가 운영을 맡고 있는 이집트 군 최고위원회는 2월13일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면서, 개정 헌법에 따라 대통령과 의회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6개월 동안만 국정을 운영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군 최고위원회는 “군부는 이집트를 통치하지 않을 것이고, 민간 국가로 향하는 길로 매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약속은 지켜질까? 한국의 4·19 혁명은 5·16 군사 쿠데타로 물거품이 됐다. 4·19 혁명 뒤 1년 만인 1961년 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 등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2공화국이 무너졌고, 한국은 오랜 독재의 시절로 접어들었다. 대니얼 소어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 교수는 2월13일 인터뷰에서 “이집트 국민이 무바라크 축출을 군부의 힘에 의지한 면이 있다. 따라서 군부가 혁명이 완수될 수 있도록 허용할지 지켜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집트가 1987년 한국의 사례를 따른다면 성공적이다. 1987년에는 민주화 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관철했고, 노태우 정부라는 ‘과도기’를 거쳐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인도네시아도 군 출신의 수하르토가 축출된 뒤 민주주의 안착에 성공했다.
혁명 이전에 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있느냐도 성공적 정권 교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필리핀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1986년 축출된 뒤 민주화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진행된 것은 그나마 마르코스가 선거를 통해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민주주의 경험이 있었던 게 도움이 됐다. 1970년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수립됐던 칠레는 1990년 3월 대통령 선거를 거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민주화 전환기 무사히 넘긴다면…미국 최고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의 스티븐 그랜드 국장은 2월10일 “시민혁명 뒤 동유럽 등의 사례에서 보듯 기존 정권 내부자와 극단주의자, 정치적 기회주의자 등이 전환기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활용한 사례가 있다”며 이를 이집트 등의 민주주의 정착 과정에서 경계할 요소로 지적했다. 프리덤하우스 보고서는 “권위주의 통치가 무너진 뒤 많은 정권 교체가 견고한 민주주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전환기에 폭넓은 지지를 받는 비폭력 시민연대가 등장하도록 국제사회가 지원하는 게 필수적”이라며 “시민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만들어지도록 국제사회가 외교적 압력 등을 행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외부의 지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제 이집트 민주화의 성패는 무바라크를 쫓아낸 이집트인의 손에 다시 달렸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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