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갈등의 상징 된 화해의 상징

학살로 얼룩진 과거 치유하려던 터키-아르메니아 화해 조각상, 터키 총리 등

민족주의자들의 반발로 철거 논란 휩싸여
등록 2011-01-20 14:32 수정 2020-05-03 04:26

‘터키·아르메니아 100년 만의 역사적 화해’. 2009년 10월10일, 전세계 언론은 역사적 앙숙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관계 정상화를 이렇게 평가했다. 하지만 그 화해는 싹은 틔웠지만 꽃을 피우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화해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벌어졌다. 두 나라 사이 화해와 우정의 상징으로 제작하던 기념물을 놓고 철거 논란이 불붙었다.

터키-아르메니아 화해 조각상(REUTERS/ UMIT BEKTAS). 아르메니아(아래)

터키-아르메니아 화해 조각상(REUTERS/ UMIT BEKTAS). 아르메니아(아래)

총선 앞둔 정치적 노림수 의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들쑤셨다. 에르도안 총리는 지난 1월9일 문제의 기념물이 세워지고 있는 터키 동부 국경도시 카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흉물스럽고 괴상한 것을 세웠다”며 자신이 다시 이곳을 방문하기 이전에 기념물을 철거하고 대신 공원을 세우라고 시장에게 지시했다고 이 1월10일 보도했다.
논란이 커지자 터키 정부는 발언 취지가 왜곡됐다며 진화에 나섰다. 에르투그룰 귀나이 문화장관은 “어떤 예술가에 대해서도 무례함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고 예술작품을 부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조각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이슬람 성지 인근에 있다는 것 때문에 논란이 있어왔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야당들은 곧바로 반발하고 있다. 전직 문화장관이자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소속 의원인 에르칸 카라카스는 “그 조각은 이상하지도 보기 싫지도 않다”며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오는 7월 총선에서 고전이 예상되는 에르도안 총리가 민족 감정이 걸린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문제의 조각상은 약 30m 높이의 석조 조각이다. 인체를 세로로 길게 절반으로 자른 인간상이 다른 절반의 인간상에 손을 내미는 모양으로, 갈등의 고통과 화해의 희망을 상징한다. 2008년 건립 추진 당시 아르메니아 국경에서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 카스의 시장은 이웃 아르메니아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공을 들였다. 봉쇄된 두 나라 사이에 국경이 다시 열리면 국경 인접 지역으로서 혜택을 볼까 기대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화해 분위기가 피어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터키 민족주의자 등은 조각상의 이미지가 터키가 아르메니아에 사죄를 하는 듯하다며 건립에 반대해왔다. 현재 터키 당국은 조각이 세워지는 곳이 16세기 이 도시를 방어하는 진지가 있던 곳이라는 이유로 건립을 중단시킨 상태라고 〈AP통신〉이 1월11일 전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원한이 깊다.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5~17년 자신들이 지배하던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군을 지원했다는 등의 이유로 약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 이에 대해 터키는 30만~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숨졌고, 희생자들은 학살이 아니라 내전과 혼란으로 희생됐으며, 비슷한 수의 터키인들도 희생됐다고 주장해왔다.

150만 명 학살 진상 규명 안 돼

1993년 터키는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동맹국인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점령한 것에 항의해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을 폐쇄했다. 두 나라는 오랜 갈등 끝에 2009년 10월 국경 개방과 공동역사위원회 등을 설립하는 데 합의했지만, 인종학살 인정 여부와 나고르노카라바흐 철수 등을 놓고 갈등을 풀지 못해 이런 합의는 사실상 사문화됐다.
해당 조각가 메흐멧 악소이는 만약 조각상을 부순다면 “2001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계곡의 고대 부처 조각상을 파괴한 행위와 같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제 화해의 상징은 또 다른 갈등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