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폭설로 몸살을 앓은 독일 베를린의 지하철 6호선 울슈타인역에서 내려 슈프레강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옆 샛길을 따라갔다. 복합생태문화공간 ‘우파파브리크’(UFA Fabrik)가 자리한 베를린 남쪽 템펠호프 지역은 베를린의 다른 지역에 비해 ‘흥미롭다’고 하긴 어렵다. 상점 하나 없이 컨테이너 같은 건물들이 늘어선 길목은 황량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또 화물운송역과 냉장고·철강·초콜릿 공장 등 산업시설이 모여 있고, 주택가는 소시민을 대표하는 주거 형태인 연립주택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평범하고 볼품없는 회색지역이 될 뻔했다. 우파파브리크가 없었다면 말이다.
전설의 영화가 무너진 자리에
도심 속 오아시스 ‘우파파브리크’가 수북이 내린 눈에 하얗게 덮여 있다.
우파파브리크는 이 지역의 ‘녹색 오아시스’라 할 만하다. ‘지속 가능한 삶’과 서로 소통하며 돕고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재미있는 놀거리·볼거리를 제공하는 복합생태문화공간이다. 약 1만8천㎡(약 5400평) 넓이의 대지에 1~2층짜리 건물 7채가 모인 이 공간에는 삭막한 주변과 달리 울창한 나무들과 어린이 농장, 자체 발전기, 옥상 위 공원인 녹색 지붕, 유기농 제빵소, 카페 등이 있다. 여기서 매일 공연과 워크숍이 열리고, 동네 주민들의 만남도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원래 1920년대 독일 영화의 전설 에서부터 마를레네 디트리히 주연의 , 나치 시절 선전 영화, 전후 서독 영화까지 편집·녹음·복사 작업장으로 쓰이며 독일 영화사의 한 자락을 장식했다. ‘우파’(UFA)는 1920∼60년대 독일 영화계를 주름잡던 거대 영화사 이름이다. 그러나 화려한 시절은 지나가는 법. 1964년 영화사가 문을 닫으며 폐허로 변했다. 1979년 새 주인들이 오기 전까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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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파브리크가 운영하는 ‘자연식품’ ‘베이커리’ 등 노란색 간판이 달린 가게를 지나 우파파브리크 안으로 들어섰다. 안내사무실 바깥 전시판에는 화려한 서커스와 댄스 등 공연 사진들이 걸려 있다. 여기에 우파파브리크의 30년 문화교육 사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놨다. 재미·활기·유머는 우파파브리크의 성공 열쇠다. 곡예와 팬터마임을 배울 수 있는 어린이 서커스 교실은 20년간 큰 인기를 끌며 지금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또 매주 코미디와 버라이어티쇼 등 재미와 볼거리를 주는 행사를 열어, 지역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까지 끌어들이는 베를린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오는 1월 말에는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포커스 코리아’ 행사가 열린다. 국악예술 그룹 ‘노니’의 그림자 연극도 선보인다. 이날도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낭랑한 판소리가 울려퍼졌다. 지난해 10월부터 사물놀이·판소리 등 한국의 전통 음악과 무용 관련 워크숍이 진행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삶’은 우파파브리크의 중심 테마다. 약 700㎡에 달하는 태양열 지붕은 해마다 6만5천kW의 전력을 생산한다. 이 지붕과 자체 발전기로 우파파브리크에 필요한 전력을 조달한다. 정기적으로 환경 관련 세미나·강연·토론회를 열어 생태와 환경에 대한 주민의 관심을 일깨운다. 지난해 9월에는 도시 안에도 콘크리트가 아닌 흙과 나무 등으로 건물을 짓는 대안 생태 건축의 유용성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들은 초기부터 호신술·팬터마임·음악·외국어 코스와 건강식 관련 모임을 만들어 지역 주민과 소통했다. 우파파브리크의 ‘이웃친교센터’는 문화를 통해 고립된 개인들을 만남의 장소로 이끌어낸다. ‘가족네트워크’는 장애아동이 있는 가족, 긴급히 간병이 필요한 노인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역할도 한다. 이날 아기 수중체조 교육을 받으러 온 소피 슈미트는 “이곳에서 다른 엄마들과 만나 육아 정보를 나눌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고립된 개인을 모으는 지역의 중심우파파브리크의 창립 멤버이자 국제문화센터 팀장인 50대의 지그리트 니머는 “부모 세대와 달리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인간적인 따스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며 자랐다. 우리는 다양한 좌파 세력에게서 나온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이었고, 뭔가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고 창립 당시를 회상했다.
68운동의 열기가 남아 있던 1973년, 베를린에 생태적이고 예술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여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후 1976년 슈에네베르크 지역의 폐허로 남은 공장에 ‘문화·스포츠·수공업 공장’이라는 생활 공동체를 만들어 살다가 그곳이 강제 철거된 뒤 1979년 우파파브리크에 들어가 ‘평화적 재가동’을 시작했다. 전기·상수도·난방 시설이 전무한 폐허 공간을 40명쯤 되는 젊은이들이 점거해 생태·예술·문화운동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 시작한 것이다. 대대적 캠페인을 통해 여론의 지지를 얻은 다음, 시정부와 협상해 2037년까지 장기 임대 계약을 맺었다. 직접 트럭을 개조해 발전기를 만들고, 빗물을 받아 물을 충당했다. 생활은 구성원이 번 돈을 한데 모은 공동 재정으로 꾸렸다. 처음엔 베이커리와 카페를 운영하고, 서커스로 필요한 수입을 얻었다. 개인 수입은 포기하고 공동 이익은 프로젝트 규모를 넓히는 데 투자했다. 유쾌한 웃음을 주는 서커스와 풍자 코미디를 통해 처음엔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던 주민들과 소통하며 호응을 끌어냈다. 지금은 행정 업무를 맡고 있는 니머도 초창기에는 서커스에서 광대 역할을 하고 바이올린 연주, 탭댄스를 하던 예술가다. 니머는 지금도 가끔 무대에 선다. 이곳에 있는 카페 ‘카페 올레’의 운영자도 팬터마임을 하는 광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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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공동체는 2004년 유엔에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최고의 시도’로 인정받았다. 현재까지 20여 명이 공동체 구성원으로 이곳에 거주하고 카페, 베이커리, 게스트하우스, 주민모임센터, 생태·환경센터, 국제문화센터 등 각 분야에 종사하는 일꾼이 모두 200여 명이다. 각 조직은 독립적이지만 서로 긴밀한 관계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물론 현재는 초기 공동체 모습과는 좀 다르다. 창립 멤버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떠나고 있고, 초창기처럼 엄격한 공동 수입·분배로 생활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우파파브리크의 창립 정신인 대안적·실험적 삶의 형태인 민주적 인간관계, 문화를 통한 교류, 지속 가능한 삶, 사회 안전망 강화 프로젝트는 사회적 인정을 받으며 성공리에 진행 중이다. 니머는 “지금은 창립 당시같이 엄격한 생활비 분배는 하지 않지만, 우리는 가족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를 이웃으로 확대하는 게 소망이다”라고 말했다.
베를린(독일)=한주연 통신원 juyeon@gmx.de
‘우파파브리크’ 국제문화센터 팀장 지그리트 니머
‘우파파브리크’ 국제문화센터 팀장 인터뷰
“모든 문화 활동은 정치다”
‘우파파브리크’의 국제문화센터 팀장 지그리트 니머는 “공동 재정 운영을 하지 않는 등 창립 초기와는 다소 달라졌지만, 개인화된 사회에 비해 사회 안전망이 튼튼하다”고 말했다.
우파파브리크는 68운동의 한 줄기인가.
‘68세대’라고 하기에 나는 좀 젊다. 그래도 68운동으로 대안적 삶에 대한 토론의 장이 열렸다는 점에서 그 영향은 무시 못할 것이다.
문화 활동을 넘어선 정치적 활동도 하고 있나.
인간은 문화적 존재고, 문화를 누리는 것은 인권에 속한다. 그래서 모든 문화 활동은 정치적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공동체 자체가 위계질서 없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점에서 정치적이었다. 초창기에 우리는 개인 소비를 포기하고 공동 재정으로 살아갔다. 사회 안전망이라는 관점에서도 그렇다. 대가족 형태를 벗어나 점점 개인화되는 현 사회와 비교하면, 아프거나 힘들 때 서로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 안전망이 튼튼한 편이다.
지금은 수입 관리를 어떻게 하나.
초창기에 카페와 베이커리 사업으로 어느 정도 수입이 생기자 세무서와 문제가 생겼다. 공동 재정 관리가 어려워져 조정해야 했다. 지금은 각 조직이 독립된 단체로 운영되고, 개인은 직책에 따른 급료를 받는다.
우파파브리크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요즘은 환경·생태 문제가 사회의 큰 관심거리지만, 우파파브리크를 시작할 당시는 사회적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이제 동네 아파트 임대 광고에서 ‘우파파브리크 근처’임을 밝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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