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죽어도 떠나는 사람들



물에 빠져 죽고 돌아와 맞아 죽어도 스리랑카를 탈출하는 보트피플…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타밀족 난민 인정을 회피해
등록 2010-11-04 02:26 수정 2020-05-02 19:26
글 싣는 순서
1회: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2회: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3회: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 2009년10월 인도네시아 해군에 억류된 스리랑카 보트피플이 배 위에서 난민 인정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REUTERS/ DADANG TRI

» 2009년10월 인도네시아 해군에 억류된 스리랑카 보트피플이 배 위에서 난민 인정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REUTERS/ DADANG TRI

“엄마가 죽었어.”

처음 만난 필자에게 구나세카람 수젠드란(27)이 ‘대뜸’ 건넨 인사가 딱 그랬다. 20대 후반 청년이라기보다는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의 어린애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2009년 10월 초 말레이시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난민 밀항선에 올랐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스리랑카로 돌아온 건 오로지 엄마의 병 때문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외아들은 공항에서 연행됐고, 고문에 시달렸다. 그리고 올해 1월 풀려났다. 고문 후유증과 여전한 협박을 견디며 엄마를 간호해왔는데, 귀국의 이유였던 엄마는 9월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살.

4년가량 지속되던 휴전이 어긋나고 스리랑카 내전이 고조되던 2006년 이래 타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납치와 고문의 위협에 노출된 수많은 젊은이들이 각종 브로커선을 타고 인근 국가로 빠져나왔다. 타밀족이 인구의 7%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는 잘하면 일자리도 얻을 수 있는 ‘선호국’이다. 수젠드란도 2009년 6월 말레이시아로 갔다. 거기서 밀항선 브로커를 만나 10월 초 난민 선박에 올랐던 게다.

그는 말레이시아 남부 도시 조호루바루 인근 정글에서 짧게는 열흘, 길게는 한 달가량 숨어지내던 253명의 또 다른 타밀 난민과 함께 ‘제야 레스타리’(Jeya Lestari)호에 올랐다. 그런데 열흘도 되지 않아 배가 엔진 고장을 일으켰다. 많은 짐들을 바다에 버렸고, 인도네시아에서 엔진을 갈려던 참에 해군 경비정에 걸렸다. 자와섬 끝자락 메락에 강제로 정박한 난민들은 시위를 벌였다.

난민을 거부하는 ‘호주 머니’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는 스리랑카에서 살 수 없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니면 내리지 않겠다.”

그즈음 78명의 타밀 난민을 태운 또 다른 배 한 척이 조난을 당해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에 구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군은 구출 난민을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인도네시아 영해로 데리고 갔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케빈 러드는 난민들의 배를 막기 위해 인도네시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까지 걸었다. ‘돈을 댈 테니 인도네시아 손에서 해결하라’고. 난민들이 세월 모르고 갇혀 있는 인도네시아 빈탄섬의 탄중피낭 수용소는 그렇게 난민을 거부하는 ‘호주 머니’로 지어진 것이다.

타밀 난민에 대한 혐오 반응은 캐나다까지 이어졌다. 지난 8월13일 492명을 태우고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난민 선박 ‘엠브이 선 시’(MV Sun Sea)호는 3개월 전 타이 남부 송클라항을 출발해 1명만 목숨을 잃은 기적 같은 항해를 했다. 캐나다 영해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지 방송들이 생중계를 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던 이 선박을 두고 캐나다 공공안전부 장관 빅 토는 “테러리스트와 인신매매단이 배후에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스리랑카 정부의 프로파간다까지 더해지면서 ‘테러리스트 보트’가 언론을 달궜다.

냉정히 말해보자.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돈 있는 이들은 미화 4만달러를 주고 가짜

비자를 여권에 박아 비행기를 타고 간다. 그게 안 되는 이는 1만6천달러를 주고 보트를 탄다. 공항에 도착하는 이들은 감금 생활 없이 난민 심사를 받는 반면, 보트피플은 온갖 인종주의적 수사(修辭)에 직면함은 물론 난민 심사 기간에 이민국 수용소에 갇혀 지낸다. 올해 초 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트피플 중 난민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한 해 평균 200명에 불과한 반면, 비행기를 타고 온 이들은 평균 2200명이 난민으로 인정받는다고 전했다. 또 주로 영어권 나라에서 관광객으로 들어와 장기 불법체류하는 이들이 약 5500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보트피플에 대한 인종혐오적 반응은 올해 4월 보트피플의 다수를 이루는 스리랑카인과 아프간인(다수는 소수민족인 ‘하자라족’) 난민 심사를 각각 3개월, 6개월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밀항선에 탔다가 우여곡절 끝에 스리랑카로 돌아온 구나세카람 수젠드란은 여전히 조국에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이유경

»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밀항선에 탔다가 우여곡절 끝에 스리랑카로 돌아온 구나세카람 수젠드란은 여전히 조국에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이유경

두 달 된 아기를 단속하기도

이런 차별에도 보트피플이 ‘죽어도’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 등에 닿길 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이 스리랑카를 탈출하면서 도착하는 말레이시아·타이·인도·인도네시아 등은 제네바 난민협약에 가입하지 않아 난민 보호는커녕 대량 구속과 본국에 강제 송환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 10월6일 방콕에서 130명가량의 타밀 난민이 대거 연행된 건 본보기다. 일부 언론은 “또 다른 타밀 난민들이 보트를 탈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방콕 내 캐나다 정보국의 제보로 단속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방콕 사무소의 키티 매킨지 대변인은 과의 전화 통화에서 두 달 된 아기까지 연행한 이 단속을 강하게 비판했다. “18명이 4살 미만이고, 임산부 4명도 끼어 있다. 작금의 단속은 밀항 브로커를 제대로 겨냥하고 있지 않다. 진짜 난민과 불법 이주자도 구분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연행되는 난민들이 갇히는 방콕 이민성 감옥에는 ‘7년 장기수’가 있고, 인도네시아 난민 수용소에는 ‘10년 장기수’가 있다. UNHCR가 인정한 난민카드를 지니고 있어도 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스리랑카 난민들은 전세계 24개 국가가 난민의 재정착을 받아주는 ‘난민 제3국 정착’ 프로그램에서도 찬밥이다. 타밀호랑이 반군이 전세계 32개국에서 테러리스트로 찍힌 효과는 내전이 끝난 뒤에도 지독하게 적용되고 있다.

정체된 난민 심사와 ‘제3국 정착’ 프로그램의 차별 속에 타밀 난민들이 피난처를 찾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이들의 절박함은 여러 차례의 조난사고에 반영돼 있다. 지난 6월 초 12명의 난민을 태운 보트가 뒤집혀 몰사당한 사건을 비롯해 5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당국이 모니터하던 5명이 탄 난민보트가 대양에 잠겼다. 2009년 11월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영해 코코스섬 부근에서 보트가 뒤집혀 12명이 빠져 죽었고, 그 한 달 전인 10월에는 100명의 타밀 난민을 태운 보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지만 감감무소식이다.

고문을 말하면 또 고문을 당하고

“물론! 기회만 되면 다시 탄다. 안전하게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이렇게 호언하던 4명의 타밀 청년은 말레이시아 남부 조호르바루에서 오스트레일리아행 밀항선에 오르기 하루 전인 2009년 9월8일 단속에 걸렸다. 그러나 ‘다음 선박’을 타겠다는 이들의 의지는 강고했다. 친정부 타밀 민병대가 설치는 와우니아 지방에서 마을 남자들의 연쇄 실종을 보며 아들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온 칸다사미 마니발라완(44)은 “말레이시아에선 아들이 교육을 받을 수 없다. 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배를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인도네시아 메락에 정박했던 수젠드란의 보트 동료 3명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 사망했다. 1명은 응급조처를 받지 못해서, 2명은 오스트레일리아로 밀항하려다 물에 빠져서 죽었다. “봐라. 다시 밀항 브로커에게 또 다른 돈을 지불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오지 않나.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지금 밀항업자들의 배를 불려주고 있는 꼴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난민운동가 세라 네이선의 지적이다. 또 다시 탈출을 갈구하는 건 수젠드란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일찌감치 국제이주기구(IOM)가 마련해준 항공권으로 IOM 가방을 들고 귀국한 수젠드란에게 전쟁이 끝난 스리랑카는 전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9년 11월26일 낮 1시, 콜롬보 외곽 반다라나이케 공항 입국심사대에 도착해 여권 심사를 받던 수젠드란은 범죄수사국(CID) 직원들 손에 끌려 공항 내 한 사무실로 갔다. 얼마 뒤 동부 바티칼로아 억양의 타밀어를 말하는 이가 들어와 수젠드란을 ‘패기’ 시작했다. 정부 편으로 전향한 타밀호랑이 출신 ‘카루나당’에서 온 이가 분명했다. “네가 갖고 있는 그 IOM 가방… 걔네는 구호물자로 가장해 타밀호랑이에게 무기를 조달한 단체 아냐. 네가 그 일에 관여했고! 맞아, 안 맞아?”

한바탕 구타를 치른 뒤 수젠드란은 다시 CID 직원들 손에 이끌려 녹색 지프차에 올랐다.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져 죽으러 가는 줄 알았는데, 도착한 곳은 고문실의 상징인 ‘4층’, CID 사무실이었다.

“눈 부위를 특히 많이 맞았어. 지금도 정부 운영 병원에 가면 의사가 어쩌다 눈이 그렇게 됐느냐고 물을 거고 그러면 고문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그 기록이 들어가면 또 나를 잡아갈 거야. 게다가 싱할라족 의사들은 타밀어를 못해.” 이렇게 수젠드란은 ‘민주사회주의공화국 스리랑카’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료 혜택을 ‘거부’하고 있었다. 의료비가 비싼 개인 병원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정부 병원’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과대망상만은 아닌 듯했다. 인권운동가들에 따르면, 부사 캠프에 도착해 만나는 의사에게 이전 감옥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밝힌 이들은 더 심한 고문을 당한다. 수젠드란 역시 고문을 받은 뒤 ??로 옮겨졌을 때 ‘고문을 당했느냐’고 묻는 의사에게 ‘아니요’라고 답했단다. 그런데도 의사가 떠난 뒤 거꾸로 매달려 철체 파이프와 자전거 부속품 등으로 다시 맞았고 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2009년 12월3일 오후, 지옥 같은 3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지난 1월20일 수젠드란은 30여 명의 수감자와 함께 석방됐다. 그러나 그와 함께 석방됐던 이들 중 2명은 다시 실종됐다.

국제기구 호소도 소용없어

그리고 지난 10월6일, 수젠드란과 같은 배에 탔던 난민 3명이 다시 자발적으로 귀국했다. 이들 역시 공항에서 ‘실종’됐고, 수소문 끝에 ‘4층’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IOM과 UNHCR 모두 탄중피낭 수용소 난민들에게 본국으로 가지 말 것을 권고한 상태다. 국제위기그룹 역시 지난 5월 발표한 스리랑카 전범보고서에서 국제사회를 향해 타밀 난민 신청자들은 물론 (해외로 빠져나온) 타밀호랑이 대원들까지도 본국으로 송환하지 말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밀항 브로커보다는 반군 유령을 좇는 스리랑카 정부, ‘국경 보호’를 내세우며 전범 논란에 휩싸인 스리랑카 정부와 협력하는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등 난민협약국가들, 이들 사이에서 스리랑카 보트피플이 처한 처참한 현실은 “난민이 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라는 UNHCR 구호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콜롬보(스리랑카)·방콕(타이)·조호르바루(말레이시아)=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