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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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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째 여성 대통령은 고현정?

브라질 대선에서 노동자당 호세프 후보가 당선되면 지구촌 17번째 여성 정상…

고현정이 대통령으로 나오는 드라마는 한국에서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등록 2010-10-13 18:00 수정 2020-05-03 04:26
브라질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유력시되고 있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집권 노동자당 대선후보가 10월2일 상파울루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 함께 선거유세를 벌이고 있다. 연합

브라질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유력시되고 있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집권 노동자당 대선후보가 10월2일 상파울루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 함께 선거유세를 벌이고 있다. 연합

“대통령? 대~통~령? 건방지게 어데 여자가 대통령을 해? 빨래나 하고 밥이나 하는 거지…. 그러면 소는 누가 키워?”

한국방송 의 인기 코너인 ‘두분토론’에서 ‘남하당’ 박영진 대표가 여성 대통령을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면, 이렇게 케케묵은 소리를 질러대지 않을까? 아마도, “남자 대통령들 어떻습니까? 뻣뻣하게 모가지만 세워가지고 말이죠, 무조건 힘으로 팍팍 밀어붙이고…”라는 ‘여당당’ 김영희 대표의 면박을 당할 듯싶다.

임신한 국방장관이 사열하는 스페인

박영진 대표만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떠벌린다. 바야흐로 여성 대통령이 다시 세상의 화제다. 저 멀리 브라질에서는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에서는 10월6일 처음 방송된 SBS 수목드라마 에서 고현정이 여성 대통령(서혜림)으로 나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2009년 영화 에서 고두심이 첫 여성 대통령으로 연기했지만, 여성 대통령을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다루기는 처음이다. 브라질의 집권 노동자당(PT) 지우마 호세프(62) 후보는 10월31일 결선투표에서 당선이 유력하다. 10월3일 실시된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수에 못 미치는 46.9%를 얻어 결선투표를 치르게 됐지만, 32.6%로 2위에 그친 사회민주당(PSDB) 조제 세하(68) 후보를 크게 앞섰다. 19.42%를 얻은 3위 녹색당(PV)의 마리나 시우바(52) 후보가 열쇠를 쥐고 있으나 이변 가능성은 낮다.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는 한국에만 낯설지 외국에선 흔하다. 호세프까지 당선되면 여성 정상은 사상 최고인 17명이 된다. 현직으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대표적이다. 독일 첫 여성 총리로 2005년 11월 취임 이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줄리아 길라드 총리가 지난 6월, 코스타리카에서는 지난 2월 라우라 친치야 대통령이 첫 최고지도자에 선출됐다. 남미에서는 호세프에 앞서 2007년 12월 취임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지난 3월 물러난 미첼 바첼레트가 각각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이었다. 아이슬란드의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총리는 동성애자임을 선언한 첫 국가 최고지도자로, 지난해 2월 취임했다.

오늘 우리는 스페인에서 임신한 여성 국방장관이 불룩한 배를 내밀고 의장대를 사열하고, 유럽연합 의원이 갓난아기를 안은 채 의회에 참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이 장식용 ‘꽃’이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여전히 ‘유리천장’이 있다지만 금이 간 지 오래고 주저앉는 것은 시간문제다. 오로지 정치만 예외다. 2010년 외무고시는 최종합격자 35명 가운데 여성이 21명으로 60%를 차지했다. 누구 말마따나, 요즈음은 축구도 여자가 더 잘한다. 17살 이하(U-17) 여자축구 월드컵에서 지난 9월 한국 선수들이 우승하지 않았는가. 의 구본근 책임프로듀서는 “PD를 선발할 때 여성 지원자들이 실력이 좋아서 안 뽑을 수 없다”며 “방송일이 거친데도 ‘결혼도 안 하겠다. 밤새 일하겠다’고 나온다”고 말했다. 어쩌면 민주당 김성곤 의원이 10월7일 국세청 국정감사에서 지적했듯, “남성 성기확대 수술은 과세 안 하는데 여성의 가슴확대 수술은 과세하겠다고 한다”는 ‘잔재’만 우리 사회에 일부 남아 있는지 모른다.

치마 입은 남자에서 돌봄의 리더십으로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가 늘어날 조건은 무르익었다. 뻔한 얘기지만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활동이 늘면서 여성 정치인도 많아졌다. 유럽에서는 이미 1980년대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이 남성과 비슷하거나 앞질렀고, 1990년대부터 최고지도자가 등장했다. 가정의 영역에만 갇혀 있던 여성들이 사회문제를 정치로 풀어야겠다는 정치화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런 과정은 에서 그려지는 서혜림의 모습과 닮았다. 평범한 아나운서였던 서혜림은 방송사 카메라 기자인 남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돼 숨진 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정부를 비난하며 직접 정치에 뛰어든다. 서혜림은 “대한민국에서 더는 국가가 지켜주지 않는 국민들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게 내가 대통령이 된 이유입니다”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늘어나는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의 수보다 여성의 리더십이다. 21세기는 3F, 곧 여성성(Female)·감성(Feeling)·상상(Fiction)의 시대라고 한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빗이 세계적 베스트셀러 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나를 따르라’며 위계질서를 내세우는 남성적 리더십보다 ‘잘할 수 있다’며 격려하고 품어주는 여성적 리더십이 수평적인 21세기 네트워크 사회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김민정 서울시립대 교수(여성정치)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 중심의 강력한 상명하달식 개발주의 리더십이 1970~80년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면, 지식기반 사회는 새로운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21세기는 남성과 다른 대안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권력형 리더십이 아닌 이른바 ‘돌봄의 리더십’의 시대라는 얘기다. 과거에는 ‘발전’과 ‘안보’가 국가 최고지도자의 의제였다면 이제는 교육·복지·노인·환경 등 여성에게 익숙한, 여성이 강점을 가진 의제들이 주요한 시대다. 대통령학 권위자인 함성득 고려대 교수는 “여성 정치인은 섬세하고 부드럽고 타협하고 부정부패도 적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여성 리더십의 장점이다. 남자든 여자든 시대가 이런 리더십을 원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엄마 리더십’ ‘아줌마 리더십’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소수인 여성이 자신의 위치를 구축하고, 존재 이유를 인식시키는 데 전략적으로 유효하다는 지적이 있다. ‘여자라고 모두 엄마고 아줌마냐’는 반론도 있지만 말이다. 구본근 책임프로듀서는 “서혜림도 한편으론 오지랖 넓은 아줌마”라고 말한다.

과거의 여성 정치인은 일부러 여성성을 감춰야 했다. ‘치마 입은 남자’, 남성다운 강인함으로 포장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1979~90년 재임)는 남자보다 더 남성스러운 리더십을 보여줬다. 1997년 대선에 출마했던 남장 정치인 김옥선(76) 전 의원은 외모로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다. 1967년에 처음 국회의원이 된 그 시대 여성의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제 ‘치마 입은 여성’은 여성·엄마·아줌마 그 자체로 승부한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미사일 방어시스템 협정 체결 등을 위해 유럽 5개국을 순방하는 와중에 딸 첼시의 결혼식 준비를 챙겼다. 메르켈 총리는 후덕한 엄마 인상이지만, 4년 연속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를 차지했다.

주요 현직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주요 현직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게릴라 출신의 ‘아줌마 머리’ 정치인

브라질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유력한 호세프는 어떨까? 삶의 이력이 극과 극을 오가서 평가가 엇갈린다. 호세프는 2003년 1월 에너지장관에 임명된 뒤 ‘욕쟁이’ ‘증기기관차’로 불릴 만큼 거칠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7년 브라질 사회주의자당의 게릴라단체 ‘노동자 정치’에 가입했고, 혁명자금을 마련하려고 당시 상파울루 주지사의 집에 침입했다가 붙잡혀 복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세프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후임으로 낙점을 받은 뒤 달라졌다. 친근하게 연설하는 대중화법을 배우고, 바지 대신 여성스러운 차림을 자주 한다. 지난해는 뿔테안경을 벗고 친근한 아줌마형 머리 스타일을 선택하는 등 이미지를 뜯어고쳤다. 이제는 선출직에 한 번도 출마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부드러울지는 몰라도, 권력이라는 속성상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여전히 강조되는 탓이다.

부드러움과 카리스마, 언뜻 병립하기 힘들 것 같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떴다. 한국방송 에서 오합지졸을 모아 훌륭한 합창단으로 변신시킨 박칼린 감독의 리더십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에서도 서혜림은 국격을 높여줄 강한 대통령으로 그려진다. 구본근 책임프로듀서는 “서혜림 역시 평범한 여성이었지만 남성 위주 사회의 관문을 뚫고 살아남는 과정에서 전투적이고 강한 여성으로 바뀐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격이다”라고 말했다.

호세프는 ‘치마 입은 룰라’로 불린다. 룰라의 후광 없이 오늘날의 호세프가 가능했겠느냐는 비판이 뒤따른다. 실제 ‘이름도 모르지만 룰라가 지지한다니 찍었다’는 브라질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퇴임을 앞두고 지지율 80%를 넘나드는 룰라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지난해 2월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세하 후보에게 50.8% 대 16.6%로 뒤지던 호세프의 당선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여당의 유력 대선주자들이 잇따라 비리사건에 휘말려 물러나는 행운도 따랐다.

후광 없는 여성 정치인의 등장

사실 남미의 여성 지도자들은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등 1980~90년대 동남아시아 여성 지도자들처럼, 남편이나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이가 많다. 1990년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니카라과의 비올레타 차모로는 남편이 유력 야당 정치인이었고, 99년 파나마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된 미레야 모스코소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모두 남편이 전직 대통령이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처럼 여성 정치인이 확충되기 위해 거치는 단계인 셈이다.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과 친치야 코스타리카 대통령 정도가 ‘자수성가형’으로 분류된다.

의 첫 방송을 본 아내가 말했다. “자꾸 박근혜가 겹치네….” 제작진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 같은 여성일 뿐, 직업이나 환경이 전혀 다르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가 될 뻔했고, 최근 몇 년 동안 줄곧 여론조사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여성 대통령의 자리에 박 전 대표를 앉혀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첫 여성총리를 지낸 한명숙 전 총리를 포함해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금녀의 벽’을 허문 김영란 전 대법관과 강금실 변호사에게도 가능성은 열려 있다. 문제는 그들이 후광을 입었든, 스스로 개척해왔든 간에 한 나라를 이끌고 갈 자질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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