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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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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당한 대지에 갇힌 칠레 광부들

칠레 수출의 49.4% 차지하는 구리를 캐다 지하에 갇힌 33명…
칠레 현대사의 영욕이 묻은 구리는 칠레인에게 무엇인가
등록 2010-09-09 11:58 수정 2020-05-03 04:26
지하에 갇힌 광부들은 살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칠레 북부 코피아포 광산 매몰사고 현장의 광부들이 피신처로 보내진 소형 카메라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오른쪽).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약 1650km 떨어진 라도미로 토미크구리광산에서 채굴 작업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REUTERS/ CHILEAN MINING

지하에 갇힌 광부들은 살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칠레 북부 코피아포 광산 매몰사고 현장의 광부들이 피신처로 보내진 소형 카메라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오른쪽).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약 1650km 떨어진 라도미로 토미크구리광산에서 채굴 작업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REUTERS/ CHILEAN MINING

지하 700m. 그 습한 어둠 속에 칠레 광부 33명이 8월5일부터 지금껏 갇혀 있다. 지난 8월30일(현지시각) 구조 통로를 뚫는 구출작업이 시작됐지만 구조 때까지 3~4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매몰사고, 가족의 눈물, 생존 확인, 구조작업…. 한국에서는 이제 낯선 모습이다. 지식경제부가 펴낸 ‘09년 광산재해통계분석’을 보면, 한국은 1979년 5776건의 광산재해가 발생해 24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지난해는 10명이 숨졌다. 사고가 줄어든 건 어찌 보면 광업 부문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0.19%(2009년·약 1조9천억원)밖에 안 되는 ‘덕택’이다. 강원도 정선의 탄광촌에는 카지노 네온사인이 번쩍인 지 오래다. 매몰사고 대신 도박중독이 위협한다.

아옌데, ‘칠레의 월급’ 국유화

칠레는 얘기가 다르다. 칠레는 와인이 아니라 구리로 먹고산다. 구리 생산 세계 1위. 세계 구리 소비량의 35% 이상을 공급한다. 구리는 2009년 칠레 수출의 49.4%를 차지했다. 칠레 하면 와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와인은 칠레 수출품목 가운데 6위로 비중이 2.8%밖에 안 된다. 수출품목 1위가 정제동, 2위가 동광(銅鑛)·정광(精鑛), 3위가 미정제동이다(표 참조). 모두 구리와 구리가 포함된 광석이다. 광업은 2008년 칠레 GDP의 17.5%를 차지했다.

당연히, 칠레 경제를 말할 때 구리 국제가격이 따라붙는다. 칠레는 호황기에 쌓아둔 구리 비축펀드를 활용해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를 조기에 벗어났다. 올해는 구리 국제가격 상승 등에 힘입어, 지난 2월 대지진의 여파를 뚫고 5% 안팎의 경제성장이 전망된다. 2009년 -1.5%의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기록한 원인으로 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와 함께 구리 국제가격 급락(약 55%)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월 칠레 지진 당시 국제경제 뉴스를 보자. ‘칠레 지진 여파로 수급 차질이 예상되는 구리 가격이 급등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칠레 광업은 외국인투자 분야에서 투자 기준 1974~2009년 누계 비중 32.8%로 최고의 외국인투자 산업분야다. 칠레 페소화의 환율도 구리 국제가격과 떼놓기 어렵다. 구리 가격이 상승세를 타면서, 올해 초 한때 달러당 500페소 이하로 떨어지는 등 환율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칠레 경제는 구리가 떠받치고 있다. 원자재인 구리를 수출해 최첨단 승용차와 휴대전화를 수입하는 데서는 칠레 경제의 한계가 드러난다.

1973년 9월11일 쿠데타. 구리는 칠레 역사상 최대 사건 중 하나인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과 붕괴에도 닿아 있다.

칠레의 노동운동은 북부 광산촌 광부들의 조직에서 시작됐다. 광산촌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1917년 민중운동가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이 주도해 칠레 최초의 노동자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창당됐다.

1970년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아옌데는 구리광산과 은행 등을 국유화하는 사회주의 경제개혁에 나섰다. 사회주의를 내건 아옌데의 구리광산 국유화는 예고된 수순이었다. 칠레는 1810년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했지만, 경제적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옌데는 구리광산 국유화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 칠레인들에게 빈곤과 경제침체라는 재앙을 안겨주고 결국 엄청난 양의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상황을 끝내야 합니다. 기초 자원의 국유화는 우리의 역사적 요구입니다. 우리는 수출의 80% 이상을 소수의 거대 외국 기업들의 손아귀에 맡겨두는 경제적 종속 상태를 이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옌데는 자신이 ‘칠레의 월급’이라 부른 구리산업을 외국자본의 노다지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책 제목처럼 칠레를 ‘수탈된 대지’로 남겨둘 수 없었다. 국유화된 미국계 해외자본 등은 이윤의 적정 한계가 헌법 조항에 연간 12%로 규정돼 있었지만, 어떤 해에는 205% 이상의 이윤까지 챙겨갔다.

REUTERS/ LVAN ALVARADO

REUTERS/ LVAN ALVARADO

외딴 지역에 갇힌 칠레의 밥

하지만 알다시피,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아옌데가 집권한 1970년 34.9%였던 물가상승률이 3년 만에 508.1%로 뛰고 성장률은 1972~73년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비판자들은 ‘아옌데 정부의 구리산업 및 주요 분야의 국유화, 다국적기업과 시장가격에 대한 제한과 통제, 재정지출 확대 등이 경제위기를 촉발해 기록적 물가 상승, 국제 신용도 추락, 심각한 국제수지 악화 등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미국의 농간이 컸다. 냉전시대 미국은 자신의 뒷마당으로 여기던 중남미에 사회주의 정권을 용납할 수 없었다. 쿠바의 악몽도 떠올랐다. 칠레의 핵심 수출국인 미국은 구리 재고를 있는 대로 풀어 칠레의 최대 수출품인 구리의 국제가격을 떨어뜨렸다. 결국 구리광산 국유화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에게 ‘경제 난국’ 타개라는 쿠데타 명분을 주었고, 1973년 9월 아옌데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가 자랑하는 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다. 칠레 민속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는 비올레타 파라는 이렇게 노래했다. “광부들이 사는 집을 보았을 때 나는 말했어. 차라리 달팽이 껍데기가 낫겠어.” 지금 칠레는 지진 복구 비용 마련 등을 위해 구리 채굴기업의 특별세를 순익의 4%에서 최고 9%로 올리는 법안을 놓고 뜨거운 논란을 벌이고 있다.

수탈당한 대지에 갇힌 칠레 광부들. 자료:월드 트레이드 아틀라스

수탈당한 대지에 갇힌 칠레 광부들. 자료:월드 트레이드 아틀라스

이쯤 되면 칠레인들에게 구리는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돌아가신 시골 아버지가 가을 수매 뒤 침을 발라가며 돈을 세던 쌀처럼, 그런 특별한 무엇인가? 칠레에서 유학한 중남미 문화연구자 정승희씨는 이렇게 말했다. “구리와 광산이 칠레인들의 무의식 속에는 있겠지만 그냥 삶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와 떨어진 낯선 광산촌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피부로 와닿지 않는 유리된 느낌이다.”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렇다. 구리는 칠레에 어쩌면 낯선 존재인지 모른다. 광산이 몰려 있는 북부 아타카마 사막지역은 원래 볼리비아와 페루의 땅이었다. 칠레는 1879~83년 페루·볼리비아 연합군과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해 이곳을 차지했다. 구리의 대규모 채굴도 이때부터, 곧 19세기 이후부터다. 이렇듯 칠레의 영토가 된 지 약 130년밖에 안 된 외딴 사막지역이 칠레 경제의 오아시스인 셈이다. 국토의 남북 길이가 약 4300km로 좁고 길게 뻗은 칠레에서 북부 사막의 광산촌은 남부는커녕 수도인 중부의 산티아고에서도 먼 세상이다. ‘외딴 이방인의 땅’에서 캐어져 곧바로 수출용 항구로 옮겨지는 구리는 칠레 일상인의 삶과는 또한편으로는 멀다.

광부들의 메리 크리스마스

구리로 먹고사는 칠레에 구리광산 매몰사고는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숙명이다. 이번에 사고가 난 북부 코피아포의 산호세 광산은 구리와 금이 생산되는 작은 광산으로, 최근 수년간 16명의 광부가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구리가 칠레를 먹여살린들 무슨 소용인가. 내 남편과 아들이 살아돌아올 수 없다면. 칠레 광부들이 아내와 딸과 엄마와 크리스마스에 뜨거운 포옹을 할 수 있기를….

참고 문헌: (장석준 지음, 살림 펴냄)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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