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5년 4월19일 바티칸.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숨죽여 지켜보던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서 흰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새 교황이 선출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78살의 고령으로 제265대 교황이 된 독일 출신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자신의 교황명을 베네딕토 16세로 정하고 성무를 시작했다.
즉위 직전까지 24년 동안 바티칸 교리신앙성 장관을 역임한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교회의 정화와 핵심적 가치의 수호를 강조해온,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리관을 지닌 인물이다. 즉위 두 달 뒤 미사 강론에서 그는 “오늘날 교회와 휴머니티가 직면한 핵심적 도전은 ‘상대주의의 독재’”라고 선언하며, 정통 신앙으로의 복귀와 절대 진리로서의 교리 확립을 강조했다. 바티칸이 정하는 교의와 원칙 외에 어떠한 이견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피임, 낙태, 생명복제, 종교 다원주의, 여성 사제, 동성애, 성직자 독신주의 등 숱한 현안들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쾌했다.
#2. 그로부터 꼭 5년이 지난 2010년 4월. 등의 저서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오는 9월 교황이 방문할 예정인 영국의 경찰 당국에 교황을 체포하라고 청원했다. 죄목은 ‘인간성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다. 교황 자신과 고위 성직자들이 미국 내에서 제기된 한 신부의 아동 성추행 혐의를 은폐하고 문제의 신부를 감쌌다는 이유다. 성추행 피해자들의 법률대리인 제프 앤더슨 변호사는 며칠 뒤 실제로 미국 연방법원에 교황을 고소했다. 이 때문에 한 나라의 수반이 타국에서 체포되지 않을 권리인 ‘외교적 면제권’이 교황에게도 적용되느냐는 논란이 일었다.
바티칸의 면책특권 요청도 거부당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최근 몇 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잇따라 터져나오는 과거 가톨릭 성직자들의 성추문 앞에서 몹시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져 있다. 교황이 과거 성직자 성추문에 대해 가톨릭 수장으로서 공식 사죄를 했지만, 과거에 이미 그런 일들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덮으려 했다는 폭로까지 나온다. 교계 전체에 견줘 극히 일부의 예외적 일탈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교황 자신이 성추행 은폐 혐의로 고소를 당하고, 성소로 인정되던 성당과 주교회의 현장에 경찰이 들이닥치는 지경에 이르면, “비바 파파!”(교황 만세!)라는 연호가 “쿠오바디스, 파파”(교황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우려와 탄식으로 바뀔 만도 하다.
지난 6월24일 벨기에 경찰은 브뤼셀-메켈렌 교구의 본부 건물과 주교좌 성당, 올 초 은퇴한 고트프리트 다닐스 전 대주교의 집무실과 자택,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전 주교들의 묘소까지 전격 압수수색했다. 마침 주교단 회의 중이던 현직 주교 9명은 몇시간 동안 현장에서 억류된 채 침묵을 강요받았고, 컴퓨터와 휴대전화, 교구 회계장부 등이 압수됐다. 바티칸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치욕과 충격이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사흘 뒤 벨기에 주교단에 친서를 보내 “(경찰의 행태가) 놀랍고 개탄스럽다”며 “이 비통한 순간에 나의 친밀감과 연대감을 전한다”고 위로했다. 그 전날에는 바티칸 국무성 장관이 바티칸 주재 벨기에 대사를 불러 “옛 공산 정권에서조차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벨기에 법무장관은 즉각 “압수수색은 적법한 절차였고 주교들도 전적으로 정상적인 예우를 받았다”고 반박했다.
벨기에에선 지난 4월 한 주교가 과거 남자아이를 상당 기간 성추행한 사실을 시인하고 사임하는가 하면, 콩고 출신의 한 신부가 본국의 부인과 자녀들까지 불러들여 이중생활을 하다가 탄로나 파문이 일었다. 벨기에뿐 아니다. 독일·아일랜드·오스트리아·스위스·이탈리아 등 유럽의 여러 나라, 그리고 미국과 브라질 등 미주에서까지 주렁주렁 줄기감자처럼 잇따라 가톨릭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폭로가 터져나왔다.
미국 대법원은 6월28일 사제의 아동 성추행 소송 사건과 관련해 바티칸의 면책특권 요청을 거부했다. 해당 소송의 원고는 10대 청소년 시절인 1965년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한 신부에게 여러 차례 성추행을 당했으나 교황청이 그 신부의 성직을 박탈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전출시키기만 한 책임이 있다며, 베네딕토 16세가 신앙교리성 장관이던 2002년 교황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소송을 맡은 하급 연방법원들이 성추행 사제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자 교황청은 주권국가 바티칸으로서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중단해달라고 대법원에 항소했지만, 대법원이 이를 기각한 것이다.
앞서 6월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가톨릭 성직자의 해’ 종료 기념미사에서 “하느님과 (성추행) 피해자들에게 절실하게 용서를 구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바티칸 지도부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닦아내지 않은 채 앞으로 엎지르지 않겠다는 다짐만으로 사태가 수습될 수준을 넘어섰다.
교황의 해법은 복음주의 강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복음주의 강화에서 해법을 찾고 있는 것 같다. 교황은 지난 6월30일 교세가 급속히 기울고 있는 유럽과 북미 등 서구권 국가의 세속화와 싸우고 가톨릭 신앙 부흥을 전담하는 ‘새로운 전도 촉진을 위한 주교위원회’ 신설을 뼈대로 한 바티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세상에는 가톨릭이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선교 영토가 있는 반면, 유럽 같은 다른 지역에선 수세기 동안 진행된 세속화가 크리스천의 신심과 교회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위기감을 낳고 있다”고 지적한 지 이틀 만이다. 바티칸 교황청 기관지 도 “서구의 재복음화가 교황의 주된 관심사”라고 확인했다.
2000년 전 제1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오다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자 당혹해하면서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네가 나의 어린 양들을 버렸으니,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는 답변을 들은 베드로는 그 길로 발길을 되돌렸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에 나오는 이야기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금 전세계 가톨릭 신자와 시민들로부터 “쿠오바디스, 파파”라는 심각하고 본질적인 물음을 받고 있다. 소설이 아니라 엄혹한 현실이다. 양떼들을 지혜롭게 인도하는 ‘은총’(베네딕투스)이 노 교황에게 허락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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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준 기자 한겨레 국제부문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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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