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아직도 우린 희생하고 있다. 전세계 언론이 민주주의를 향한 붉은 셔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 상징하는 혈액시위
지난 3월16일 오후 5시께 타이 방콕 중심가 정부청사 앞. 4곳의 출입구 앞에서 벌어진 ‘혈액시위’에 참가한 뒤 경찰 바리케이드에 막힌 취재진 앞으로 다가온 한 여성은 감정에 겨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피를 뽑은 오른팔을 들어올린 그는 목 놓아 구호를 외친 뒤 자리를 떴다. ‘아피싯 옥빠이!’(아피싯 웨차치와 총리 퇴진하라!)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이른바 ‘붉은 셔츠 시위대’ 몇천 명은 이날 시위용으로 피를 뽑았다. 이미 전날 오후, 시위 지도부는 “혈액 100만cc를 모아 ‘혈액시위’를 벌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을 상징한다”고 했다. 붉은 셔츠 시위대의 지도부 중 한 명인 웽 토지라칸(58)은 ‘혈액’이 상징하는 ‘희생’을 강조했다. ‘유혈시위’를 취재하기 위해 모여든 국내외 언론과 시위 인파로 이날 정부청사 앞은 북새통을 이뤘다. 타이 경찰당국은 소수의 시위대만 출입문 앞까지 다가올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뿐, 예상외로 순순히 전례 없는 방식의 시위를 허용했다.
붉은 셔츠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은 최근 몇 달 동안 여러 차례 ‘100만 명 시위’를 공언했다. 그러나 실제 모인 인파는 최대 15만 명 정도에 그쳤다. 붉은 셔츠 시위대는 지난해 4월 의도치 않게 아세안정상회의를 중단시키면서 ‘위력’을 보인 바 있다. 일부에서 타이 정부가 폭력 진압의 명분으로 삼으려고 이들의 회의장 난입을 가로막지 않았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이후 이어진 폭력 사태로 지도부가 해산 명령을 내리면서,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농민들이 이번에 다시 방콕으로 몰려온 게다. 탁신 전 총리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군부의 잇따른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이들에 동조하는 일부 군인·경찰도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위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느 때보다 시위 열기가 높아지면서, 예상보다 적은 인원임에도 시위대는 방콕 곳곳을 마비시켰다. 시위대가 진을 친 라차담논 왕궁길, 정부청사, 사남루앙 광장에서 란루앙으로 이어지는 일대의 상점과 은행 등은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연중 무휴 번잡한 여행자 거리인 카오산 로드의 상점까지 일부 폐점하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탁신 재산 60% 몰수에 자극받아주말이면 인파가 넘쳐나는 짜뚜짝 시장은 시위 지역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환전소 문을 닫아버렸다. 방콕의 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이 일대는 붉은 셔츠에 대한 지지세가 강한 곳으로 꼽힌다.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폭력 사태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시민들이 바깥출입을 삼가면서 ‘지옥’ 같던 주말 교통체증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만 도시 곳곳에 배치된 5만여 군경 병력이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시위대는 비폭력 시위를 약속했고, 정부는 평화적 시위는 보장하겠다고 화답한 터다. 그럼에도 대치 국면이 달아오르면서 긴장감을 극으로 치달았다. 단 한 차례도 속 시원히 파헤쳐지지 않은 의문의 수류탄 투척 사건도, 시위대가 방콕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3월12일 이후 세 차례나 꼬리를 물면서 위기감을 키웠다.
“아피싯 총리 개인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군부의 입김을 등에 업고 총리에 오른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기에 반대하는 것뿐이다.” 시내 중심가 ‘민주주의의 탑’ 아래서 퇴약볕을 참아가며 연설을 듣고 있던 피팟(36)은 “솔직히 지난해처럼 폭력 사태가 벌어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부인과 딸 2명 등 온 가족이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주말을 이용해 남부 송클라에서 방콕으로 올라왔다는 교사 키티팟(58)은 “(집권 민주당의 지지세가 강한) 남부 지역에도 붉은 셔츠가 많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 모두 탁신 전 총리의 최대 업적으로 빈민에게 의료 서비스의 문턱을 낮춰준 ‘30밧 의료제도’를 꼽았다.
시위 현장 주변에선 삼삼오오 패를 이룬 참가자들이 따로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부 시위대는 2006년 쿠데타로 폐지된 1997년 헌법을 복원하라고 외치며 ‘40’이라 적힌 펼침막을 들고 시위 장소 주변을 행진했다. 1997년 헌법은 타이 헌정 사상 가장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데, ‘40’은 타이력으로 1997년에 해당하는 2540년의 뒤 두 자릿수다.
낮에는 땡볕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지만, 밤이면 ‘아피싯 옥빠이’를 외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춤을 추는 이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시위가 아니라 축제로 보이기도 했다. ‘붉은 셔츠의 과격 시위’를 내심 ‘기대’했을 정부와 주류 언론으로선 아쉬움이 컸을 듯하다. 아피싯 총리는 시위가 벌어지기 며칠 전부터 ‘개인 안전과 치안 상황 점검’을 이유로 보병연대 기지에 머물렀다.
이번 시위는 지난 2월26일 타이 대법원이 탁신 전 총리 재산의 60%에 가까운 14억달러를 몰수하도록 판결한 게 결정적 계기였다. 재산 몰수 작업을 집행하는 ‘국가자산관리위원회’는 2006년 쿠데타 세력이 설치한 터다. 붉은 셔츠 시위대가 대법원 판결의 ‘합법성’을 따져묻기 위해 방콕으로 몰려든 이유다.
“보병연대 앞 시위로 아피싯 총리가 바로 의회 해산 요구를 수용할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시위대가 행진하는 과정에서 방콕 도심이 꽉 막혀 도시 기능에 장애가 초래되면서, 우리의 요구를 방콕 거리에 좀더 분명히 알릴 수 있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붉은 셔츠 시위대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짜란 디타피차이 박사의 설명이다. 기실 ‘의회 해산’은 붉은 셔츠 시위대가 지난 1년여 한결같이 주장해온 바다. ‘눈물의 회군’ 이후 지난 1년간 붉은 셔츠 진영은 북동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과 지역 단위로 조직화에 매진했다. ‘레드’ 꼬리표를 단 각종 상품 판매와 자활상점 운영 등 다양한 풀뿌리 운동을 병행하며 세를 키웠다. 정부의 거듭된 의회 해산 요구 묵살과 붉은 셔츠의 성장세까지. 대법원 판결이 없었어도, 붉은 셔츠의 방콕 귀환은 기실 시점의 문제였다.
붉은 셔츠 진영 내부의 분화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타이의 옛 국호인 ‘시암’을 딴 이른바 ‘시암 레드’란 좀더 급진적인 분파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붉은 셔츠 시위대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고 있지만, 이들은 주류가 고집하는 ‘비폭력 원칙’에 비판적이다. ‘시암 레드’에 가담한 이들이 시위 현장에서 붉은 셔츠를 지지한다고 밝힌 군 출신 카띠야(일명 세 댕)의 이름을 외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시암 레드’를 이끌고 있는 타이 공산당 게릴라 출신인 수라차이 단와타나누는 과 만나 “이런 형태의 시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붉은 셔츠의 비폭력·평화 시위는 벌써 일주일째를 맞고 있다. 이제 와서 폭력 시위로 돌아설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진압이 시작되거나, 왜곡된 정보가 퍼지면서 분위기가 격화한다면 상황을 장담하기 어렵다. 타이 영자지 가 3월16일 수텝 트악수반 부통령의 말을 따 전한 기사 한 꼭지는 그 ‘일말의 가능성’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여전함을 일깨워줬다. “미국이 탁신과 붉은 셔츠 지도부의 통화 내용을 도청한 결과, 친탁신 조직이 주도하는 폭력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파악하고 우리에게 경고를 해왔다.” 붉은 셔츠 쪽은 이튿날인 17일 이에 대해 즉각 해명할 것을 미 대사관 쪽에 요구했다.
북동부 농촌 지역에서 올라온 시위대는 종일 집회 현장을 지킨다. 밤이면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방콕의 붉은 셔츠들이 그들과 합류한다. 그럼에도 시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시위대 규모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중산층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한 친왕정-반탁신 ‘노란 셔츠’ 시위대와 달리 서민과 빈민층이 중심인 붉은 셔츠 쪽은 시위를 계속해나갈 ‘경제적 지구력’이 부족한 터다.
세계적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타이 담당 연구위원인 수나이 파숙은 “의회 해산이 문제의 근본을 해결해줄 순 없다”고 지적했다. 다시 선거를 치른다면, 친탁신 계열의 정당이 과반 의석을 따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는 다시 노란 셔츠의 ‘선거 결과 불복종 시위’를 불러올 게다. 지난 몇 년 새 되풀이돼온 악순환이다. 그럼에도 사태가 극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면 최소한의 협상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혈액시위’로 표현된 절박함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건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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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셔츠 진영의 지도부는 대부분 정치인이나 탁신 전 총리 정부에서 관료를 지낸 인물로 채워져 있다. 웽 토지라칸은 다른 이들과 달리 현직 의사다. 망설이던 그를 시위 대열로 불러들인 것은 지난해 4월13일 평화로운 시위를 벌이던 붉은 셔츠 시위대에게 가해진 무차별 폭력 사태였다. 1970~80년대 타이공산당(CPT) 소속 게릴라 전사로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한 그는 ‘혈액시위’를 맨 먼저 제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3월14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방콕 도심의 시위 현장에서 그를 만났다.
-100만 시위대를 공언했는데.
=100만에는 못 미쳤지만,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모인 시위다. 지도부에선 40만~5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부디 이 많은 인파가 왜 모였는지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기 바란다.
-정부가 의회 해산 요구를 수용할 기미가 없는데.
=최근 몇 년간 타이 사회의 계급 갈등이 두드러지고 있다. 심해진 계급 갈등이 계급 전쟁으로 번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정부가 의회를 해산하고, 공정한 선거를 치르는 것만이 이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끝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면.
=여기 모인 수십만 민중이 직접 답을 할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폭력 사태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
=우린 비폭력 원칙을 분명히 해왔다. 정부가 의회 해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민주적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붉은 셔츠의 더욱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정부에 최후통첩까지 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래서 혈액시위를 제안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을 의미하는 시위다. 정부는 이 처절한 투쟁을 더는 외면해선 안 된다.
-타이 언론의 부정적 보도가 강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내세운 명분이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였다. 미 주류 언론은 그 근거 없는 주장을 별다른 비판 없이 보도했다. 지금 타이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타이 주류 언론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와 권력자들의 이해에 복무해왔다.
-붉은 셔츠 시위를 이끄는 건 UDD이지만, 좀더 급진적인 ‘시암 레드’란 분파도 만들어진 것으로 안다.
=UDD는 여섯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첫째, 왕을 국가 원수로 하는 진정한 입헌군주제를 지지한다. 둘째, 정실주의와 엘리트 관료주의를 배척한다. 셋째, 비폭력이 투쟁 원칙이다. 넷째, 법과 정의가 실현되는 정치를 바란다. 다섯째, 사회정의를 실현한다. 여섯째, 2006년 쿠데타 세력이 파괴한 1997년 헌법의 복원을 원한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는 UDD가 아니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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