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시티즌스유나이티드’(CU)란 단체가 있다. 보수적 정치평론가이자 열정적인 공화당원이며 선거운동 전문가이기도 한 플로이드 브라운(49)이란 인물이 1988년 창설한 ‘비영리’ 시민단체다. 이 단체 누리집(citizensunited.org)을 보면 “작은 정부와 기업의 자유, 결속력 강한 가정, 국가 안보라는 미국의 전통적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 “정직과 상식, 시민의 선의에 바탕한 자유로운 나라라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비전을 복원”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하고 있다.
주요 현안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여론을 모으는 것도 물론이지만, 이 단체가 가장 집중하는 활동은 ‘공익 다큐멘터리’ 제작인 듯싶다. 그간 이 단체가 만든 ‘작품’은 모두 12편에 이르며, 9·11 동시테러를 다룬 와 등 2편을 올봄 선보일 예정이란다. 앞서 나온 ‘작품’에서 이 단체의 뭇매를 맞은 건 유엔과 미국민권연맹(ACLU),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을 제작한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 등이다. 반면 ‘신’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등은 한껏 치켜세웠다.
뜬금없이 이 단체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지난 1월21일 미 연방대법원이 2002년 통과된 ‘선거자금 개혁법’(매케인-파인골드법)을 무력화하는 내용의 판결을 내렸는데, 그 원고가 시티즌스유나이티드였기 때문이다. 미 연방대법원이 누리집(supremecourtus.gov)에 공개한 ‘시티즌스유나이티드 대 연방선거관리위원회’ 사건 판결문을 보면, 사건의 발단은 대충 이렇다.
지난 2007년 말 CU는 9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화 를 완성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 현 국무장관의 ‘감춰진 얼굴’을 들춰내기 위한 ‘야심작’이었다. 이 영화는 일부 극장에서도 개봉됐고, DVD로도 출시됐다. 거기서 만족할 순 없었다. ‘좀더 많은 미국인들이 작품을 감상할 순 없을까?’ 이 단체는 작품 출시에 앞서 이를 ‘비디오 온 디맨드’(VOD) 시장에 내놓을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IPTV을 떠올리면 되겠다.
2007년 12월 어느 케이블 텔레비전 업체가 이 단체에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의 VOD 판권으로 120만달러를 내놓겠다는 게다. CU 쪽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작품 방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각 10초 분량 두 가지와 30초 분량 한 가지의 홍보영상 3편을 제작했다. 일종의 ‘광고’였다. 문제는 미 연방법인 ‘선거자금 개혁법’이 영리행위를 하는 단체가 특정 후보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광고를 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CU가 의 판권으로 영리를 얻었고, 그 방영을 알리는 광고가 힐러리 당시 상원의원을 반대하는 광고에 해당한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CU 쪽은 이같은 규정이 에 적용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연방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광고만 봐도, 힐러리 클린턴 (당시) 상원의원이 공직에 부적합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보수 5 대 진보 4’ 비율로 연방대법관 의견 갈려논쟁은 엉뚱하게 ‘표현의 자유’ 쪽으로 번져갔다. CU 쪽은 미 수정헌법 제1조를 들먹이며 “의회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떠한 법도 만들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선거자금 개혁법’에 대한 위헌 시비가 자연스레 불거졌다. 결국 CU 쪽의 항소로 사건은 최종심인 미 연방대법원으로 무대를 옮겨갔다. 지난해 3월24일 첫 심리를 시작한 연방대법원은 1월21일 이렇게 결정했다.
“어떤 사람은 를 깊이 있고 교훈적인 작품이라 여길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 작품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판단을 유보할 수도 있다. 선택과 평가는 정부의 몫이 아니다. …지난 2003년 대법원은 ‘매코넬 대 연방선거관리위원회’ 사건에서 시민들이 의사표현을 위한 새로운 실험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판시한 바 있다. 시민적 담론은 시민에게 부여된 것이며, 정부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수단을 제어하려 해선 안 된다.”
이로써 연방법원의 앞선 판결은 뒤집어졌다. 대법관 9명이 5 대 4로 갈라설 만큼 첨예하게 맞섰지만, 결론은 CU 쪽의 승리였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임명한 앤터닌 스캘리아·앤서니 케네디 대법관, 그리고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이 ‘기업의 표현의 자유’ 쪽에 섰다.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임명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 그리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소냐 소토마이어 대법관은 그 반대편에 섰다.
대법원의 결정에 민주당과 개혁적 시민사회단체는 일제히 “가뜩이나 영향력이 막강한 기업 등 이익집단에 정치를 내맡기겠다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반면 공화당 지도부와 상공회의소 등 기업단체들은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더욱 신장됐다”고 환호성을 올렸다. 파급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는 1월23일치에서 “대법원 결정이 나온 뒤 위스콘신·콜로라도·켄터키 등 미 전역 24개 주에서 보수적 친기업 단체들이 일제히 기업체의 정치광고를 규제하는 주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한 소송을 벼르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백악관으로선 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정치전문 인터넷 매체 는 1월25일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 쪽이 기업을 포함한 특정 이해집단의 과도한 선거 개입을 막기 위한 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며 “기업체가 공금으로 정치광고를 하려면 주주총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는 방안 등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주 대법원은 한 세기 동안 유지돼온 법리를 뒤집고, 특정 이익집단이 정치에 과도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줬다. 미국의 선거가 힘있는 집단의 자금에 좌우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미국민의 결정에 따라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고 믿는다. 민주·공화 양당 의원들에게 이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법안 마련을 촉구한다.”
로비업체 관계자 “이제 수문이 열렸다”1월27일 밤(현지시각)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뒤 첫 새해 국정연설을 하는 자리에서 대법원의 결정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연단 바로 앞에는 9명의 대법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에 의사당에선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울려퍼지는 새, 법복 차림의 얼리토 대법관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어느 쪽의 평가가 더 현실에 가까울까? 는 1월24일 인터넷판에서 한 로비업체 관계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대법 결정이 나온 뒤) 마치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무슬림 최대 명절인) 라마단이 한꺼번에 찾아온 듯한 분위기다. 그동안 각급 기업체의 정치광고 요청이 있을 때마다, 선거자금 개혁법 관련 조항 때문에 번번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수문이 열렸다. 벌써부터 문의가 폭주해 전화가 녹아날 지경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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