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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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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다시 혁명 전야

몬타제리 사망 8일째, 성스러운 아슈라에 뿌려진 8명의 피…
사망 40일째 대규모 시위 피할 수 없을 것
등록 2010-01-06 13:48 수정 2020-05-03 04:25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국민과 발걸음을 맞춰라. 권리를 일깨워줘야 한다. 성직자의 책무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성직자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약해지고 흔들릴 것이니….”
영국 이 운영하는 는 지난해 10월19일 인터넷판에 ‘아마디네자드의 신학적 적수’란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당시 넉 달째 이어지고 있던 이란의 시위 사태에 대한 심층 분석 기사였다. ‘화두’를 던져준 것은 이란 개혁파의 거두인 그랜드 아야톨라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 2009년 12월19일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한 그이다.

‘아슈라여, 순교자의 피여!’ 2009년 12월27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7세기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무참히 살해된 시아파 시조 이맘 후세인을 기리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REUTERS/ MORTEZA NIKOUBAZL

‘아슈라여, 순교자의 피여!’ 2009년 12월27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7세기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무참히 살해된 시아파 시조 이맘 후세인을 기리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REUTERS/ MORTEZA NIKOUBAZL

개혁파 전 총리의 조카도 사망자 명단에

아야톨라 몬타제리가 과 공식 인터뷰를 한 건 아니다. 그의 인터넷 누리집에 남겨놓은 질문에, 아야톨라 쪽에서 전자우편으로 답신을 보낸 게다. 아야톨라 몬타제리는 “집권층 내부의 극히 일부 분파가 주도하는 현 정책은 이란 전체의 국익에 맞지 않으며, 이슬람의 원칙과 가치에도 위배된다”고 질타했단다. 꼭 두 달 만에 그가 숨을 거둔 뒤, 이란의 거리가 다시 들끓고 있다.

‘에스타글랄, 아자디, 좀후리예 에슬라미!’(독립, 자유, 이슬람 공화국)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앞둔 ‘여명의 나날’에, 이란 국민은 밤과 낮의 구별 없이 지붕과 거리에서 이렇게 외쳤다. 미국 등 외세로부터 ‘독립’하고, 샤 팔레비 왕조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고,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려 ‘이슬람’에 기반한 ‘공화국’을 만들자는 구호였다. 30년여 뒤인 2009년 12월 등 서구 언론은 테헤란의 거리에서 옛 구호를 닮았지만 전혀 다른 구호가 등장했다고 전한다. ‘에스타글랄, 아지디, 좀후리예 이라니!’ 곧, ‘독립’과 ‘자유’와 ‘이란 공화국’이란 외침이다. ‘이란’이 ‘이슬람’을 대신했으니,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닌 게다. 다시, 이란은 ‘혁명 전야’를 맞고 있는가?

지난해 6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해 일어난 이란 개혁파의 이른바 ‘초록운동’의 기세는 당국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사그라지는 듯했다. 산발적인 시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09년 8월5일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축복 속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두 번째 취임식을 한 이후 그 ‘동력’이 꺾인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해 12월7일 독재에 항거한 옛 기억을 더듬는 ‘학생의 날’에 맞춰 테헤란의 대학생을 주축으로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긴 했다. 그래도 사세를 뒤흔들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런 터에 그랜드 아야톨라가 급서했다.

무슬림은 전통적으로 사망 사흘째와 이레째, 그리고 마흔날째를 귀히 여긴다. 아야톨라 몬타제리의 장례식이 열린 사망 사흘째에 성지 콤과 수도 테헤란, 그의 고향 땅인 이스파한 일대에서 거센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사망 이레째, 때맞춰 숭고한 피를 기리는 시아 무슬림의 최대 성일로 꼽히는 ‘아슈라’가 닥쳐왔다. 이란 전역에서 노도처럼 시위의 물결이 다시 휘몰아쳤다.

축제 분위기의 열흘, 올해는 다를 것

그날, 이란 보안군은 총질을 했다. 이란 당국의 공식 발표로만 시위대 8명이 목숨을 잃었다. 7세기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이자 시아파의 시조로 부를 만한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와 그 일가가 지금의 이라크 땅 카르발라에서 수니파의 칼에 무참히 스러진 바로 그날 말이다. 사망자 가운데는 개혁파의 기수인 미르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의 친조카 사예드 알리 무사비(35)도 끼어 있었다. 당국은 부검을 이유로 그의 주검을 이튿날 병원에서 탈취해갔다. 아슈라에, 기어이 무고한 피가 뿌려진 게다.

그럼에도 이란 당국은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튿날 1500명이 넘는 야권 인사가 보안군에 붙들려갔다. 등 외신들은 지난해 대선에 출마했던 또 다른 개혁파 후보 메디 카루비가 누리집에 올린 성명 내용을 따 “팔레비 왕조의 압제 아래서도 아슈라에는 피를 뿌리지 않았다”며 “성스러운 아슈라에 무고한 이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대체 우리 성직자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고 개탄했다고 전했다.

아슈라의 참극 이후 ‘초록 빛깔’로 상징되는 야권의 거리시위는 다시 잦아드는 모양새다. 그게 끝이 아님은 모두들 알고 있는 눈치다. 무자비한 탄압이 시위를 무지를 수 없음은 지난 6개월여가 증언해준 터다. 탄압이 거세질수록 시위는 되레 거칠어졌다. 게다가 성스러운 달 ‘무하람’(이슬람력 1월)이 아닌가. 이슬람 혁명의 ‘전야’였던 1978년 12월 초에 맞이한 무하람에도 이란 전역은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테헤란의 아자디 광장(옛 샤야드 광장)에는 매일 몇백만 명이 몰려나와 샤 왕조 폐위와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귀국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란은 ‘무하람’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다.

역사는 우연을 가장해 되풀이된다. 오는 1월28일은 아야톨라 몬타제리의 사망 40일째가 된다. 대규모 시위는 피할 수 없을 게다. 이란에선 매년 2월1일부터 혁명기념일인 11일까지 열흘간을 ‘여명의 열흘’로 기린다. 혁명의 열기 속에 샤 레자 팔레비가 1979년 1월 말 돌연 국외 망명길에 오르면서, 그해 2월1일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해 이슬람 혁명을 완성해냈다. 해마다 이란에선 그 격정의 나날을 축제로 보낸다. 올해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질 게다.

그러니, 다시 ‘혁명’인가? 서구 언론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다. 누구랄 것 없이 ‘끊는 점’을 점치고 있다. 이유가 없진 않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펴낸 을 보면, 이란 국민의 평균연령은 27살이다. 6600만여 이란 인구 가운데 3분의 2, 유권자의 3분의 1이 1979년 혁명 이후 세대란 얘기다. 이슬람 혁명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이 어디로 향해 갈지, 누구라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긴 하다. 유달승 한국외대 이란어과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정점으로 하는 이란 지도부와 무사비·카루비 등 야권 세력은 지금까지 서로 지켜야 할 선을 최대한 넘어서지 않으면서 대립각을 세워왔다. 거리시위와는 양상이 사뭇 다르다는 얘기다. 결국 2013년 대선과 2014년 전문가회의 선거 때까지 야권의 반정부 투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장기전이란 얘기다. 이란 지도부도 판세를 잘 읽고 있을 것이다. 무사비나 카루비 등 개혁파 진영에서도 이슬람 공화국의 해체를 바라는 건 아니다. 집권 진영이 결국 일정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다.”

“집권 진영이 일정한 양보 할 수밖에”

현 이란 국기는 이슬람 공화국 수립 이후인 1980년 7월29일부터 사용되고 있는 ‘삼색기’다. 맨 위 초록색은 애초 ‘다산’을 뜻했지만, 혁명 이후 ‘이슬람에 대한 이란 국민의 신념’을 상징한다. 초록은 이슬람의 상징 빛깔이다. 가운데 흰색은 순수함과 평화를 상징한다. 흰 바탕에 가운데 자리한 문양은 ‘알라’의 현현이다. 맨 아래 붉은색은 순교자의 피를 뜻한다. 시위대는 머리와 손목에 초록색 띠를 두르고 있다. ‘초록운동’이란 이름도 그래서 나왔다.

지금으로선,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북풍’이 있듯, 이란엔 ‘핵풍’이 있다. 핵 문제로 서방이 이란을 압박한다면, 집권 세력은 거리의 시위대를 싸잡아 비난할 명분을 얻게 될 게다.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위대가 붉은빛 띠를 머리와 손목에 두르는 순간, 사상 초유의 ‘이슬람’과 ‘공화국’의 동거는 근본부터 흔들리게 될 터다. 그러니 외친다. ‘탄압을 멈춰라!’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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