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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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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사랑의 난장, 오키나와를 달리다

21년째 ‘중독자’ 끌어모으는 ‘투르 드 오키나와’의 비밀…
코스부터 자전거, 복장까지 개성 넘치는 레이스
등록 2009-11-25 14:18 수정 2020-05-03 04:25

변화무쌍하게 방향을 바꾸면서 끊임없이 불어대는 동지나해의 바람이 페달질에 지친 허벅지를 더 힘들게 한다. 짐을 줄인다고 사이클 복장을 포기한 대신 청바지에 랜드로버로 무장한 다리에는 슬슬 쓸림의 기운이 올라오고 어깨에 멘 배낭은 어깻죽지를 파고든다. 오키나와의 그림 같은 해안가를 따라 북으로 이어진 58번 국도 위에서 헉헉대는 자전거와 사람 하나. 11월7일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때 나는 자전거 위에 있었다.

11월8일 열린 ‘투르 드 오키나와’ 대회에서 패밀리 레이스가 펼쳐지자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출발하고 있다.

11월8일 열린 ‘투르 드 오키나와’ 대회에서 패밀리 레이스가 펼쳐지자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출발하고 있다.

‘죽음의 코스’부터 ‘패밀리 코스’까지

저 멀리 해안선 너머로 오늘의 목적지인 나고 시내에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서서히 나고시가 가까워지면서 하나둘 자전거에 미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껏 일그러진 표정 속에 숨어 있는 쾌락의 낌새는 오직 자전거 안장에 올라본 사람만이 알아본다. 피학과 가학의 주체가 공존하는 얼굴들. 그 고통과 쾌락을 위해 비행기표를 끊고 휴가를 투자해 오키나와까지 날아온 사람들이다. 나고 시내는 이미 자전거로 넘쳐났다. 해변의 리조트와 호텔, 멀리 떨어진 모투부의 골프리조트까지 자전거와 사람들로 만원이다. 두 바퀴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끼리 느끼는 묘한 동류의식과 설렘이 도시를 덮고 있었다. 내가 머물 해변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도 어김없이 내일의 대회를 준비하는 ‘자전거 좀비’들이 존재한다. 창문에는 지난 대회를 기념하는 번호표들이 붙어 있고 내일의 한판에 참여할 자전거들이 한 귀퉁이에 세워져 있다. 3년째 이 대회에 참가한다는 도쿄의 아줌마 마코토, 이름도 모를 일본의 시골에서 왔다는 청년들, 나리타공항 근처에 산다는 ‘자이니치’(재일교포) 성덕 형님까지 ‘투르 드 오키나와’ 중독자들이었다.

우리나라도 ‘자전거 산업 강국’을 부르짖고 자전거가 ‘녹색의 상징’인 듯 떠들어댄다. 약발이 다한 지역의 축제를 대체하는 자전거대회가 봇물을 이루지만, 이렇게 극렬분자들이 몰려드는 대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무슨 이유로 일본의 남쪽 끝에서 벌어지는 대회에 사람들이 열광할까?

투르 드 오키나와는 1989년에 첫 번째 대회가 열렸다고 하니 올해가 21번째 대회다. 이 대회는 국제사이클연맹(UCI)이 공인하는 대회다. 난이도와 완성도 모두 아시아 최고 수준의 자전거대회란 말이다. 자전거에 빠져든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꼭 한 번은 참가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잔치이자 엘리트 선수들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수준 높은 국제대회로 인정받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대회가 일본의 남쪽 끝 오키나와의 작은 도시 나고에서 21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11월8일 새벽 5시,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대회장까지는 자전거로 5분 거리. 나고시 시민회관에는 헬멧에 번호를 붙인 ‘자전거 정장’ 차림의 ‘자전거 좀비’들이 가득했다. 오키나와를 일주하는 1박2일 310km 코스, 오키나와 북부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는 200km ‘죽음의 코스’, 어린이와 가족들을 위한 5km 패밀리 코스까지 다양한 메뉴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6시50분, 총소리와 함께 챔피언조가 출발한다. 각국의 대표급 선수들을 초청해 벌이는 진정한 스피드 레이스다. 동네 아저씨 같은 어른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총소리가 이어지고 시민 200km, 중학생, 고등학생, 레이디, 시니어, 그냥 남자들 등 거의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눈앞에서 사라져간다. 처음부터 내달린다. 어기적거리며 눈치를 보지 않는다. 1년을 기다려 참가한 대회에 자신을 내던진다.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민다. ‘나도 저 속에서 페달을 밟고 싶다.’

200km짜리 ‘죽음의 레이스’ 참가자들도 산악지대를 향해 속도를 내고 있다. 400여 명의 참가자 가운데 절반가량이 코스를 완주했다.

200km짜리 ‘죽음의 레이스’ 참가자들도 산악지대를 향해 속도를 내고 있다. 400여 명의 참가자 가운데 절반가량이 코스를 완주했다.

순위를 가르는 종목들이 떠난 자리에는 잔치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전거 축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쟁이 아니라 오키나와의 자연을 따라 자전거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줄줄이 길을 떠난다. 이어서 아빠·엄마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패밀리 레이스다. 이 꼬마 친구들에게 자전거는 어떤 추억으로 남겨질까? 흐뭇한 순간이다.

그러나 행사의 절정은 아직 남아 있었다. ‘듀엣 드 얀바루!’(Duet de Yanbaru·얀바루는 오키나와 북부지방을 말함) 몸이 부자유스러운 장애아동을 태우고 둘이서 함께 자전거를 타는 마지막 행사다. 아이들을 태운 자전거가 출발선에 서자 한 무리의 학생들이 즉석에서 축하 공연을 펼친다. 아이들도 즐겁고 노래와 춤을 준비한 학생들도 즐겁다. 장내 소리꾼도 출발 시간을 늦춘다. 아이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위로를 건넨다. 비록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자신들을 위한 이 행사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가슴으로 즐거워한다. 아, 이런 아름다운 짓들도 벌이는구나.

자전거포 아저씨가 만들어준 자전거로

대회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투르 드 오키나와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3185명이다. 3천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대회를 즐기게 해주고 다시 오고 싶은 행사로 만드는 힘은 바로 자원봉사자들이다. 올해에만 3천여 명이 자신의 동네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힘을 보탰다. 길거리 교통정리는 물론 각종 시설물을 설치하고 음식을 제공하고 기록을 관리하는 일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자원봉사자들은 기꺼이 참여한다. 거리에서 응원을 보내는 사람들도 자전거떼가 지나가는 동안에는 골목에서 차가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도 경광등의 번쩍거림도 찾아볼 수 없다. 주민들이 나서서 정리하고 따라준다. 경음기를 울리는 사람도, 대회로 인한 교통체증에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불만이 없습니까?”라는 바보같이 뻔한 질문에 “1년에 한 번 있는 행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일본스러운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일단 자전거에 빠져든 ‘자전거 좀비’라면 그저 자전거를 바라만 보고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자전거뿐인가! 헬멧부터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입고 다니기 불가능한 알록달록 저지와 쫄바지에 신발까지, 자전거와 관련된 모든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자전거들을 구경하다 보니 심심치 않게 2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오래된 자신만의 자전거들이 보인다. 도쿄에서 온 한 친구는 자기 동네 자전거포 아저씨가 만들어준 자전거로 130km 레이스를 완주했다. 자신만의 자전거가 그 어떤 자전거보다 소중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부럽삼..^^) 복장도 전문숍에서 파는 프로팀들의 복장이 아니다. 자신들의 클럽 이름을 넣은 자신들의 옷을 만들어서 입는다. 어떤 레이디들은 치마 비슷한 엽기적인 복장이다. 자전거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자기의 일부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초고가의 자전거와 프로팀 복장 일색인 우리 현실을 떠올리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전거 타기’를 아무리 외쳐봐야 자전거에 대한 애정과 문화가 없다면 진정한 ‘삶 속의 자전거 타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한국인 참가자들 ‘문화적 충격’

시민 레이스 200km 코스에 참가한 이홍민(37·인테리어업)씨는 “죽도록 힘들고 진짜 재미있었다”며 숨을 몰아쉰다. “경기 운영도 훌륭하고 참가 선수들의 수준과 매너에서 배울 게 많았다”는 이씨는 “내년에 반드시 다시 참가하겠다”는 말과 함께 전의를 불태운다. 아마추어 동호인이 한국에서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러오고, ‘죽도록 힘들자마자’ 내년에 다시 오겠다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 한국에서는 10여 명의 동호인들이 오키나와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한결같이 “오길 잘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다들 자전거에 대한 약간의 ‘문화적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들의 뿌듯한 얼굴을 뒤로하고 대회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 이틀 동안 나고 시내를 맴돌던 ‘자전거 좀비’들도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들의 가슴마다 오키나와의 추억이 쿵쾅거리고 있을 것이다.

오키나와(일본)=글·사진 복진선 자전거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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