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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절망과 냉소의 재출범

카르자이 2기 부패 척결 의지 의심받아… 정권과 공생하는 군벌세력 불법에 국민들 좌절감
등록 2009-11-25 13:47 수정 2020-05-03 04:25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새로운 5년 임기를 시작한 11월19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은 꽁꽁 얼어붙었다. 취임식을 노린 탈레반의 공세를 우려한 탓이다. 임시 공휴일로 지정된 이날 카불의 거리는 탱크와 장갑차가 뒤덮었다. “웬만하면 집 안에 머물라”는 정부의 ‘조언’을 듣지 않은 일부 카불 시민들은 곳곳에서 군경의 ‘이지메’를 감내해야 했다. 은 이날 “카불공항으로 들고 나는 항공기도 모두 운항이 취소됐고, 외국 대사관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도 차단됐다”고 전했다. 물샐틈없는 경계, 공포의 맨얼굴일 터다.

‘5년 더, 지난 8년처럼.’ 11월19일 두 번째 임기의 취임식을 하기 위해 수도 카불 중심가에 자리한 대통령궁에 도착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REUTERS/ JERRY LAMPEN

‘5년 더, 지난 8년처럼.’ 11월19일 두 번째 임기의 취임식을 하기 위해 수도 카불 중심가에 자리한 대통령궁에 도착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REUTERS/ JERRY LAMPEN

카르자이 대통령은 당선이 확정된 직후부터 “거국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이날 취임사에서도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특히 압둘라 압둘라 전 외교장관과 아슈라프 가니 전 재무장관 등 대선 출마 인사들을 거론하며 “거국정부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했다. 그 ‘진의’가 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의 ‘경쟁자’들이 새 정부에 참여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8월20일 치러진 대선 1차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한 압둘라 전 장관은 취임식을 앞두고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당선된 게 아니다. 정통성을 갖추고 집권한 게 아니라 국왕처럼 임명된 것에 불과하다. 어떤 법적 정당성도 없이 연임에 성공했다. 취임식장엔 가지 않겠다. 아프간 국민은 카르자이 정권의 지난 8년이 어땠는지 잘 알고 있다. 앞으로 5년 동안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아프간 국민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실현 가능성 없는 거국 정부 구상 되풀이

집권 2기를 맞은 카르자이 대통령 앞에 놓인 가장 큰 과제가 만연한 부패 척결이라는 점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인터넷 매체 는 11월16일 아프간에서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농담’을 소개했다. 아프간 정치권 안팎에서 떠돌고 있다는 이 얘기는 대충 이런 식이다. 어느 날 한 무리의 공무원이 카르자이 대통령을 찾아갔단다. 대통령을 만난 그들은 “부패 척결 방안이 뭐냐”고 물었단다. 그러자 카르자이 대통령은 이렇게 응수했단다. “부패를 일소하기 위한 계획은 이미 정해뒀다. 그 얘길 듣고 싶으면 우선 돈부터 내놔라.”

두 번째 임기에 도전하기 전부터 카르자이 대통령은 미국과 영국 등 주요 동맹국 정부로부터 부패를 일소하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취임식을 사흘 앞둔 지난 11월16일 서둘러 “반부패 문제를 전담할 별도의 부서를 발족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취임사에서도 “부패는 매우 위험한 문제”라며 “유능하고 전문성을 갖춘 이들에게 부패 척결을 맡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가능할까?

카르자이 대통령이 부패 문제를 전담하는 부서를 구성하겠다고 밝힌 것은 기실 이번이 세 번째다. 1년여 전에도 측근인 모하마드 유신 오스마니를 수장으로 하는 반부패감독청을 발족시킨 바 있다. 이 기구가 1년여 활동하면서 사법당국에 처벌을 요청한 사건은 모두 15건에 불과하다. 그나마 “실제 체포로 이어진 사례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은 전했다. 이번엔 달라질 거라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부통령 2명 등 정권 핵심에 군벌 출신

오히려 앞으로 부패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새 정부의 핵심에 똬리를 튼 군벌세력 탓이다. 은 지난 11월11일 “군벌 출신 인사들이 대거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면서, 아프간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모하마드 카심 파힘, 카림 칼릴리 등 신임 부통령 2명이 모두 악명 높은 군벌 출신이다. 앞선 임기에서 카르자이 대통령의 국방보좌관으로 일했던 압둘 라시드 도스툼은 2001년 미국의 침공 초기 생포한 탈레반 조직원 2천 명가량을 질식사시켰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브래드 애덤스 ‘휴먼라이츠워치’(HRW) 아시아 담당 국장은 과 한 인터뷰에서 “군벌을 권력에서 축출하는 게 아프간이 직면한 최대 현안”이라고 강조했다.

군벌과 카르자이 대통령의 공생이란 추한 꽃이 피어난 데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외부의 ‘암묵적 조장’이 한몫을 했다. 침공 당시 ‘북부동맹군’을 이끌고 탈레반 축출의 선봉에 섰던 군벌세력은 오랜 외국 생활로 권력 기반이 전무했던 카르자이 정권의 든든한 후원자 구실을 했다. 8년여가 지난 지금도 군벌의 ‘쓰임새’는 줄어들지 않았다. 미 뉴욕대에 딸린 ‘국제협력센터’(CIC)는 지난 9월 펴낸 보고서에서 “아프간 주둔 외국군은 지역을 장악한 무장군벌에게 치안 유지와 관련해 도움을 받고 있다”며 “이들 세력은 대부분 인권유린과 아편 밀매 등 불법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79년 12월 옛 소련군의 침공 이래 아프간은 30년째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아프간 국민은 폭력에 익숙해지고, 고통에 길들여졌다. 인도지원단체 옥스팸이 카르자이 대통령 취임식 전날 내놓은 55쪽 분량의 ‘전쟁의 비용-1979년부터 2009년까지 아프간 분쟁의 경험’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아프간 국민의 신산스런 30년 살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단체가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아프간 전역에서 성인 704명을 상대로 면접조사와 집단토론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살펴보자.

응답자 6명 가운데 1명은 아프간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할 생각을 하고 있단다. 이유는 분명하다. 1979년 전쟁이 시작된 이래 조사대상 10명 중 1명은 투옥된 경험이 있고, 5명 가운데 1명은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 5명 중 2명은 가옥 등 재산이 파괴된 적이 있고, 4명 가운데 3명은 살던 집에서 강제로 쫓겨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 중 41%는 아프간 내부에서, 42%는 국경 너머 이란과 파키스탄 등지에서 난민으로 떠돌고 있다.

이들 난민의 삶이 어떤 지경인지는 유엔난민기구(UNHCR)가 지난 2005년 내놓은 설문을 보면 쉽게 짐작된다. UNHCR가 파키스탄에 머물고 있는 아프간 출신 난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난민의 71%가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89%는 직업으로 삼을 만한 기술이 전무했고, 이에 따라 난민 10명 중 7명꼴로 변변한 직업이 없었다. 절망의 끝자락이었다.

탈레반보다 더 불신받는 정부

옥스팸이 10가지 항목을 제시한 뒤 ‘아프간 정정 불안의 근본 원인을 순서대로 꼽아보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가 살인적인 실업률과 만연한 빈곤을 첫손에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정부의 부패와 무능’(48%)이 탈레반(35%)보다 더욱 심각한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참여했던 한 남성은 이렇게 말했단다. “이제 살인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잇속 챙기기에만 골몰하는….”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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