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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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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혼자 오지 않았다 피해지역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태풍·강진·쓰나미가 강타한 아시아·태평양… 다국적 인도지원단체들조차 제대로 손쓰지 못해
등록 2009-10-15 18:06 수정 2020-05-03 04:25

지난 9월23일 일본 기상청은 남태평양 팔라우섬에서 북서쪽으로 약 860km 떨어진 대양의 한복판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했다. 올 들어 23번째로 저기압대가 형성됐음을 확인한 게다. 삽시간에 대류의 흐름이 심상찮게 변해갔다.

제16호 태풍 켓사나가 휩쓸고 간 자리. 아직 물도 채 빠지지 않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 동부 파테로스 지역에서 9월30일 이재민들이 구호물품을 받기 위해 재난구호 사무소로 향하고 있다. 사진 REUTERS/ ROMEO RANOCO

제16호 태풍 켓사나가 휩쓸고 간 자리. 아직 물도 채 빠지지 않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 동부 파테로스 지역에서 9월30일 이재민들이 구호물품을 받기 위해 재난구호 사무소로 향하고 있다. 사진 REUTERS/ ROMEO RANOCO

태풍 켓사나 뒤이어 멜로르, 그 뒤 지진해일

그 밤이 지나면서 저기압대의 힘은 괄목상대해 있었다. 필리핀 기상청은 이를 열대성 저기압 ‘온도이’라고 명명했다. 엄청난 양의 수분을 빨아들인 온도이는 서서히 북상을 시작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 쪽으로 방향을 잡아갈 무렵 기어이 열대성 폭풍으로 격상됐다. 남지나 해상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더욱 급격히 위력과 세력 범위를 팽창시켰다. 제16호 태풍 켓사나로 변신한 게다.

발생 나흘 만인 9월26일 켓사나는 루손섬을 때려대기 시작했다. 태풍이 몰고 온 집중호우가 마닐라 도심의 80%를 집어삼켰다.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이내 ‘국가 재난사태’를 선포했다. 필리핀 정부의 공식 집계로만 켓사나로 인해 적어도 240명이 목숨을 잃었고, 2억9천만달러가량의 피해를 입었단다. 40년 만에 맞닥뜨린 최악의 홍수였다. 남지나해를 내처 날아간 켓사나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라오스까지 한꺼번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켓사나의 뒤를 이어 17호 태풍 파르마와 18호 태풍 멜로르가 일주일여 시차를 두고 동아시아를 강타했다. 파르마는 켓사나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필리핀을 재차 유린했다. 태풍만이 아니었다. 재난은 혼자 오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강진과 지진해일(쓰나미)이 아시아와 태평양을 뒤흔들었다.

9월29일 남태평양 한복판에서 발생한 진도 8의 강진으로 사모아와 통가의 저지대에서 네 차례나 지진해일이 잇따랐다. 이로 인해 적어도 180명이 목숨을 잃었다. 9월30일엔 진도 7.6의 강진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파당을 뒤흔들면서, 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각각 진도 6.2와 6.8의 여진이 이튿날 아침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지면서 90만 인구의 파당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태풍과 강진에 쓰나미까지,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 불과 일주일 남짓 만에 벌어진 일들이다.

10월9일 오전까지 이 집계한 피해 규모를 보자. 켓사나가 할퀴고 간 필리핀에선 그새 사망자가 400명으로 늘었다. 이재민도 50만 명에 육박한단다. 쓰나미가 덮친 사모아에선 바닷가 마을 20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진이 휩쓸어버린 인도네시아 파당에선 295명의 ‘실종자’를 남겨둔 채 10월5일 매몰자 구조작업을 중단했다.

“모든 것을 잃은 생존자들이 충격과 공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검진을 해보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고통을 호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구호품마저 신속하게 전달되지 않아 상황이 좋지 않다.”

파당에서 의료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현지 인도지원단체 ‘이부재단’의 리드완 구스티아나 구호팀장은 유엔이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특정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다른 재난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면서, 경험 많은 다국적 인도지원단체들조차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란 점이다. 인터넷 매체 은 10월3일치에서 미국계 인도지원단체 머시코어의 낸시 린드보그 회장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열흘 지나서야 유엔 캠페인 시작

“지난 2004년 말 인도양을 뒤흔든 쓰나미 사태 이후 상당수 인도지원단체들은 ‘지역화’ 정책을 추진해왔다. 재난 다발 지역에 미리 구호품을 비치해두는 등의 방식으로 재난 대비 능력을 키웠다. 하지만 단기간에 자연재해가 집중되면서 고립된 피해 지역 주민들에 대한 긴급 인도지원 작업이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제사회’는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켓사나가 휩쓸고 간 지 열흘 만인 10월7일에야 유엔이 필리핀 이재민 지원을 위한 ‘7400만달러 모금 캠페인’을 시작한 정도가 고작이다. 그새 재난은 계속된다. 은 “(두 차례 태풍으로) 만수위에 오른 댐이 수문을 열면서 루손섬 북부 산악지대 5개 지역에서 2차 홍수와 산사태가 벌어지면서 94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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