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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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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정권 고문 실태 밝혀지려나

<로이터통신> “법무장관, 담당 검사 임명 검토 중” 보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만큼 오바마 대통령 결단에 달린 듯
등록 2009-07-23 18:14 수정 2020-05-03 04:25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이 지난 5월 워싱턴 미국기업연구소에서 안보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고문’으로 규정한 부시 정부 당시의 테러 용의자 심문 기법을 옹호했다. 사진 REUTERS/ JOSHUA ROBERTS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이 지난 5월 워싱턴 미국기업연구소에서 안보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고문’으로 규정한 부시 정부 당시의 테러 용의자 심문 기법을 옹호했다. 사진 REUTERS/ JOSHUA ROBERTS

1859년 6월 이탈리아 출장길에 나선 한 스위스인 사업가가 우연한 기회에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게 된다. 밀라노와 베로나 사이, 가르다 호숫가에 자리한 솔페리노·산마르티노 마을 부근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당시 전투는 20만 대군이 맞붙어 격렬하게 전개됐다. 사상자만 무려 3만8천여 명.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전장에 쓰러진 채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무한 폭력을 현장에서 목도하고 충격에 빠진 이 사업가는 ‘우리는 형제’라는 기치로 구조 인력을 조직해 편을 가르지 않고 부상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은 이란 기념비적 저작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책을 쓴 스위스인 사업가의 이름은 앙리 뒤낭이다. 뒤낭은 이 책에서 국제사회에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전투 현장에서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있는 영구적 구호단체를 설립하자고 했다. 둘째, 이 단체의 중립성과 인도적 지원 활동을 세계 각국이 인정하자는 게다. 첫 번째 제안은 국제적십자사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두 번째 제안은 1864년 유럽 각국을 중심으로 12개 나라가 참여해 체결한 제1차 제네바협정으로 빛을 보게 된다.

올해는 제네바협정 탄생 60돌

1906년엔 해상에서 벌어지는 무력 분쟁과 관련한 제2차 제네바협정이 체결됐고, 1929년엔 전쟁포로의 처우와 보호 대책을 담은 제3차 협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 8월 국제사회는 앞선 세 차례 협정 내용을 재확인하는 한편 전시 민간인 보호 등의 내용을 추가한 제4차 제네바협정에 합의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네바협정’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니, 지구촌은 올해로 협정 탄생 60주년을 기념하게 된다. ‘극단의 시대’를 헤쳐나오며 만들어낸 ‘최소한의 양심’이다. 제3·4차 협정은 전쟁포로 등에 대한 고문을 명백히 금하고 있다. 어디 제네바협정뿐일까.

“누군가에게서 정보를 빼내거나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하려 한 것에 대한 처벌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차별에 기반해 누군가를 위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심한 정신·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모든 행위….”

1984년 체결돼 3년 뒤 발효된 유엔 고문방지협정은 ‘고문’을 이렇게 규정한다. 미국은 고문방지협정에 1988년 4월 가입해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이던 1994년 10월 의회 비준을 거쳤다. 협약 회원국으로서 당연히 고문은 미국에서도 ‘불법’이다. 미 연방 고문방지법도 ‘고문을 하거나, 하겠다고 위협하는 행위’는 최고 20년의 중형에 처하도록 정해놓고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만연했던 ‘강화된 심문 기법’을 두고 고문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네바협정 탄생 60돌을 앞두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마침내 움직일 모양새다. 은 7월12일 익명을 요구한 미 법무부 관계자의 말을 따 “에릭 홀더 법무장관이 부시 행정부 시절의 심문 기법에 대한 조사를 맡을 검사를 임명하는 문제를 심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홀더 장관은 지난봄 인사청문회 때만 해도 이른바 ‘워터보딩’(물고문) 등 부시 행정부 시절의 심문 기법을 “명백한 고문”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정치적 논란을 의식한 탓인지 이에 대해 조사를 벌이는 것은 망설여왔다. 은 “(고문이란) 행위의 특성상 조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부시·체니의 불법적 공모’ 가능성 커

하지만 법무부의 공식 입장은 아직도 ‘미궁’이다. 매슈 밀러 대변인은 7월12일 브리핑에서 “고문 관련 조사팀을 꾸리는 문제를 포함해 어떤 결정도 내려진 바가 없다”며 “전임 행정부 법무부의 지휘 범위 안에서 심문에 참여한 이들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전했다.

진보적 시사주간지 은 7월12일 인터넷판에서 “법무부가 (고문 조사 가능성을 내비친 건) 여론을 떠보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잡지는 “고문에 대한 조사는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이 헌법에 반하는 불법적인 고문수사를 공모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며 “결국 이런 수준의 (정치적) 결정은 홀더 장관이 아닌 오바마 대통령의 몫”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나라의 양심을 지키는 일은 대통령의 몫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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