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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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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월 40년, 더뎌도 세상은 변한다

1969년 6월28일 미 사상 첫 ‘게이 폭력시위’…
3개주 이어 9월부터 버몬트·메인에서도 동성결혼 합법화
등록 2009-07-10 15:06 수정 2020-05-03 04:25

1969년 6월28일 토요일 새벽 1시20분께. 미 뉴욕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 한켠에 자리한 술집 ‘스톤월’(Stonewall) 주변에 일순 긴장이 감돈다. 경찰 순찰차 2대에 나눠탄 정장 차림의 사내 4명이 정복 경관 2명과 함께 스톤월로 들이닥쳤다. 이미 술집 안에는 사복 경관 2명이 잠복근무 중인 터였다. 그 시절 뉴욕에서 툭하면 벌어지던 ‘게이바’ 불시 단속이 시작된 게다.

‘즐겁고 유쾌하게, 동성결혼을 허하라.’ 지난 6월28일 미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서 열린 연례 동성애자 거리행진에서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동성결혼 허용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REUTERS/ JACOB SILBERBERG

‘즐겁고 유쾌하게, 동성결혼을 허하라.’ 지난 6월28일 미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서 열린 연례 동성애자 거리행진에서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동성결혼 허용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REUTERS/ JACOB SILBERBERG

매카시즘 속 ‘미국적이지 않은 자들’ 적출

술집 안은 주말을 맞아 몰려나온 200여 명의 젊은이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상황을 장악한 경관들은 이들을 줄 세우고, 신원 확인에 들어갔다. 신분증이 없으면 연행을 피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 옷을 입는 것도 ‘불법’이다. 여성 차림을 한 이들은 따로 여경에게 이끌려 화장실로 가서 ‘성별 확인’을 받아야 한다.

술렁이던 장내 분위기가 이날 따라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분증 제시를 거부하는 이들도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여느 때라면 순순히 신분증을 보여준 뒤 한순간이라도 빨리 현장을 뜨는 게 상례였다. 바야흐로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제2차 대전이 불러온 ‘사회적 격동’을 잠재우기 위해 미 주류사회는 ‘매카시즘’에 쉽게도 손을 내밀었다. ‘빨갱이 적출’의 광기가 연방정부와 군, 정부 출연기관을 휘감았다.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만 목표물이 된 게 아니다. ‘미국적이지 않은 자들’ 역시 안보의 위협으로 꼽혔다. 동성애자를 ‘미국적’이라고 봤을 리 없다. 당연히 ‘적출 대상’에 포함됐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2차 대전 직후인) 1947년부터 1950년까지만 ‘동성애자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줄잡아 4300여 명의 현역 군인이 강제 전역을 당했고, 420여 명의 연방정부 공무원이 파면에 처해졌다”고 전한다.

“(동성애자들은) 보통 사람처럼 감정적으로 안정돼 있지 못하다. 이 때문에 위험하다.” 해리 트루먼 행정부 시절이던 1950년대 초반 미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제임스 웨브의 이 발언은 동성애자에 대한 당시 미국 사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미정신과의사협회(APA)는 1952년 의료진들의 임상처방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제작한 ‘진단통계 매뉴얼’(DSM)에서 동성애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규정하기도 했다. APA가 진단 매뉴얼에서 이 항목을 삭제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2년의 일이다.

이미 1차 대전 직후부터 동성애자 공동체가 형성된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와 할렘 일대는 게이바 단속의 중심 무대였다. 특히 1964년 뉴욕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로버트 와그너 당시 시장은 ‘도시의 이미지를 해친다’는 이유로 ‘머리 짧은 여성과 머리 긴 남성’에 대한 일제 단속에 열을 올렸다. 게이바로 확인된 술집은 영업정지를 당하기 일쑤였다. 이 무렵 대부분의 게이바를 운영한 게 경찰에 뇌물을 주고 단속을 피하는 ‘수완’을 지닌 마피아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뉴욕 7번가와 크리스토퍼가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스톤월도 ‘제노베세 패밀리’가 운영했다. 이 무렵 게이바로선 드물게 춤을 출 수 있는 ‘댄스 플로어’를 두 개나 갖추고 있었던 이 술집은 쉽게 ‘명소’로 떠올랐다. 다시 1969년 6월28일 새벽으로 돌아가보자.

‘게이’란 이름 내건 단체 나타나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훈방’된 이들은 평소와 달리 스톤월 주변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단속당한 이들을 경찰서로 실어갈 차량을 기다리는 사이 술집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말을 알리는 밤, 인근 술집들도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던 터다. 삽시간에 100~150명으로 불어난 ‘구경꾼’들은 스톤월 주변을 에워싸고 줄줄이 끌려나오는 이들을 지켜봤다. 거칠게 끌려나오던 이들이 하나둘 항의를 하기 시작했고, 군중 속에서 자연스럽게 야유가 터져나왔다. 갑자기 누군가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 승리하리라.’ ‘게이에게 권력을!’

스톤월 주변 인파 사이에서 ‘술집 안에 있는 이들이 경찰에게 뭇매를 맞고 있다’는 귀엣말이 빠르게 번졌다. “오늘 스톤월이 단속을 당한 건 뇌물을 제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외치자, 다른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그럼 지금이라도 뇌물을 주자!” 문득 수많은 동전이 단속 경관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맥주캔과 술병이 뒤를 이었다. 인파도 500~600명으로 불었고, 구경꾼은 이미 시위대로 변해 있었다. 경찰의 해산작전은 상황을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몰아갔다. 경찰특공대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격한 몸싸움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날 새벽 4시께 ‘상황’이 종료됐을 때, 스톤월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현장에서 시위대 13명이 연행됐고, 경찰 4명을 포함해 시위대 여럿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상 첫 ‘게이 폭력시위’에 대한 흥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날 이후 닷새 동안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 연출됐다. ‘석벽(스톤월) 대전’, 작은 혁명이었다. 이로써 미 동성애자 인권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매타친 소사이어티’ 등 1950년대부터 일부 동성애자 운동단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 단체는 ‘게이’란 낱말을 부러 피했다. 스톤월 사건 직후 창설된 동성애자 인권단체에는 ‘게이해방전선’(GLF)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동성애자를 위한 매체 창간도 잇따랐다. 스톤월 사건이 일어난 지 6개월도 안 돼 뉴욕의 게이 인구를 대상으로 한 신문 가 창간됐고, 등 잡지도 속속 창간호를 냈다. 막혔던 물꼬가 트이면서, 희망의 외침이 봇물을 이룬 게다.

사건 1주년을 맞은 1970년 6월28일엔 맨해튼 중심가에서 ‘크리스토퍼가 해방 기념일’을 기리는 사상 첫 게이 퍼레이드가 열렸다. 해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게이 퍼레이드’의 서막이었다. 당시 사건을 촘촘히 기록한 이란 책을 펴낸 작가 데이비드 카터는 지난 6월26일 〈AF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부터 미국에선 조직된 동성애자들의 정치운동이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톤월 사건은 극소수의 운동에 머물던 게이 인권운동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바꿔놓은 기폭제였다.”

부시의 헌법 개정 욕망은 아득히

‘석벽대전’ 40주년, 미국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1996년 9월21일 통과된 ‘연방 결혼보호법’(DOMA)은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며, 어느 한 주에서 합법으로 인정한 동성거플의 혼인관계가 다른 주에서도 법적 효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매사추세츠·코네티컷·아이오와 3개주에선 이미 동성결혼이 합법화됐다. 오는 9월부터 버몬트·메인 2개주에서도, 내년 1월부터는 뉴햄프셔주에서도 동성결혼이 합법화된다. 뉴욕주와 수도 워싱턴에선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다른 주에서 혼례를 치른 동성부부의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하는 헌법 개정까지 검토했던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이 아득하다. 세상은 기어이 변한다. 애가 타게 더디게라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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