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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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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식 농장’의 예견된 재앙?

‘돼지 인플루엔자’의 근본 원인은 과도한 밀집 사육과 항생제 과다 사용이 특징인 대규모 사육시스템
등록 2009-05-08 14:26 수정 2020-05-03 04:25

‘0번 환자.’
전염성 질환의 첫 발병자를 일컫는다.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0번 환자’를 흔히 ‘지표 사례’(Index Case)라고 부른다. 그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병원체에 감염됐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창궐하는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해 확산을 막는 데 핵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84년 3월 서른한 살의 나이에 숨진 캐나다인 가이탕 뒤가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의 ‘0번 환자’로 알려져 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에어캐나다’ 승무원이었던 그가 아프리카에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된 뒤 미주 대륙에 바이러스를 확산시켰다는 게다.

‘성모께 올리는 기도, 마스크를 쓴 채.’ 지난 4월26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의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에서 성직자와 교인들이 수술용 마스크를 쓴 채 미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 REUTERS/ ELIANA APONTE

‘성모께 올리는 기도, 마스크를 쓴 채.’ 지난 4월26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의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에서 성직자와 교인들이 수술용 마스크를 쓴 채 미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 REUTERS/ ELIANA APONTE

세계 최대 돈육 생산업체 농장 인근서 발병

지구촌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는 ‘돼지 인플루엔자’(인플루엔자 A형·H1N1)의 ‘0번 환자’는 누구일까? 멕시코 보건당국은 지난 4월27일 남동부 베라크루스주의 시골 마을 라글로리아에 살고 있는 5살 소년 에드가 엔리케 에르난데스를 “검사 결과 멕시코에서 ‘돼지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된 첫 번째 사례”라고 발표했다. 에르난데스는 발병 뒤 며칠 동안 심하게 앓았지만, 현재는 완전히 회복한 상태다. 전세계의 관심이 라글로리아 마을에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AP통신〉 등 외신들이 전한 내용을 종합하면, 라글로리아 마을에서 ‘이상징후’가 포착된 것은 지난 2월부터다. 이 무렵부터 3천여 주민 가운데 800여 명이 고열과 기침, 오한과 두통, 심한 경우 구토와 설사 등의 증상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초 멕시코 보건당국은 이를 ‘계절적 유행병’으로 보고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는 새 비슷한 증상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뒤늦게 사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한 보건당국은 4월 들어 의료팀을 급파했다. 마을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한 채 방역에 열을 올렸다. 이후 추가 환자는 발생하지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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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라글로리아 마을이었을까? 정확한 사실관계는 역학조사 결과가 나온 뒤에나 밝혀질 터다. 하지만 라글로리아 주민들은 이미 ‘돼지 인플루엔자’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확신’하고 있는 모양새다. 주민들이 일제히 손가락질을 하는 곳은 라글로리아 마을에서 약 8.5km 떨어진 잘테페크에 있는 대규모 돼지농장이다.

문제의 돼지농장은 ‘그란하스 카롤 드 멕시코’란 업체가 운영하고 있다. 지분의 절반은 미국 버지니아주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돈육 생산업체 ‘스미스필드 식품’이 소유하고 있는 사실상의 계열사다. 홈페이지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번식용 암퇘지만도 5만6천 두나 보유한 이 업체가 지난해에 생산한 돼지고기는 모두 95만 두에 이른다. 스미스필드 식품은 미 애리조나주와 맞닿아 있는 멕시코 북부 소노라주에서도 ‘노르존’이란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하한 돼지고기는 캘리포니아 롱비치 항구로 옮겨져 한국과 일본 등지로 수출되는데, 지난해 이 업체가 생산한 돼지고기는 46만7천 두였다. ‘그란하스 카롤’의 규모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 물결 타고 확산

“농장에서 유출된 오폐수 때문에 지하수와 공기가 오염됐다. 배설물을 모아놓은 거대한 ‘호수’에선 악취가 심했고, 파리떼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극성을 부렸다.” 라글로리아 주민들은 4월28일 〈A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통신은 주민 호세 루이스 마르티네즈(34)의 말을 따 “텔레비전을 통해 돼지 인플루엔자에 대한 보도를 접하는 순간 ‘저게 바로 우리가 걸렸던 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전했다.

물론 멕시코 보건당국은 주민들의 이런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한다. 미겔 앙헬 레사나 멕시코 전염병통제센터장은 “에르난데스가 ‘돼지 인플루엔자’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4월1일이지만, 그 며칠 전부터 이미 미 캘리포니아에서 비슷한 증세를 보인 환자가 있었다”며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가운데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돼지 인플루엔자’ 연루설로 주가가 폭락하는 등 곤욕을 치른 스미스필드 식품 쪽에서도 잇따라 성명을 내어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사육되는 돼지에서도 이번 사태와 관련된 어떤 임상적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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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선 주민들도, 멕시코 보건당국이나 스미스필드 식품 쪽도 역학적 증거는 없다. 주장도 반박도 과학적으로 입증돼야 한다. 시간이 걸릴 문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란하스 카롤’처럼 육류 소비용으로 돼지나 닭 등을 대규모로 기르는 이른바 기업형 농장의 위험성을 질병학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는 점이다. 대규모 축산업체들은 흔히 ‘공장식 농장’(CAFOs)으로 불린다. ‘공장식’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있다. 사육부터 도축, 상품용 포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공장에서 작업 공정별로 나눠 생산이 이뤄지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개발’된 공장식 농장 모델은 1990년대 들어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경제발전으로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저개발 국가를 중심으로 육류 소비가 급격히 늘고 있다.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공급량 역시 발빠르게 늘어나야 했다. 둘째, 다국적 축산 자본으로선 값싼 노동력과 생산기반 확보, 시장 개척을 위해 지구촌 전역으로 뻗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라틴아메리카 시장 진출이 용이한 지리적 이점까지 두루 갖춘 멕시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돼지 인플루엔자’ 창궐로 학교와 공공기관이 문을 닫아건 멕시코시티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연상시킨다. 의료진에게 간단한 검진을 받은 뒤에야 나이트클럽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공포가 도심을 휘감고 있다. 사진 REUTERS/ JORGE DAN

‘돼지 인플루엔자’ 창궐로 학교와 공공기관이 문을 닫아건 멕시코시티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연상시킨다. 의료진에게 간단한 검진을 받은 뒤에야 나이트클럽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공포가 도심을 휘감고 있다. 사진 REUTERS/ JORGE DAN

공장식 농장이 확산되던 초기만 해도 관심의 초점은 환경오염과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춰졌다. 소규모 재래식 축산 농가의 잇따른 몰락도 비판의 근거였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보건·의료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공장식 농장이 안고 있는 ‘생명안보’적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지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 2007년 9월17일 내놓은 정책 보고서에서 “지구촌 육류 생산 방식이 근본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가축의 질병이 인간에게 옮겨질 위험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며 “집약적인 육류 생산을 위해 가축을 과도하게 밀집시키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일찌감치 경고한 바 있다. FAO의 당시 보고서에는 현 상황을 내다본 듯한 ‘비관적 전망’이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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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O “가축 과도한 밀집사육 피해야” 경고

“현재로선 발병률이 높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H5N1)가 지구촌의 최대 우려 사항이지만, 가금류와 돼지에게서 발견되는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IAVs)가 소리 없이 전파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으로 철저하고 면밀한 감시가 필요하다. 이미 공장식 농장에서 키우는 닭에서 IAVs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으며, 상대적으로 적긴 하지만 돼지에서도 IAVs가 종종 발견된다. 이는 인간에게 전염돼 인플루엔자 창궐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공장식 농장의 ‘위험성’은 크게 세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 수많은 가축들이 비좁은 공간에 격리된 채 사육된다. 각종 병원체가 개체를 옮겨다니며 ‘순환’하는 과정에서 변이가 유발될 가능성이 높은 조건이다. 둘째, 발육이 빠르고 육질이 좋은 품종만 선택해 사육한다. 이는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들면서 병원체에 지속적으로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단기간에 ‘상품’이 될 만큼 가축을 키우기 위해 사용하는 항생제·항균제와 성장을 촉진하는 각종 호르몬이 과도하게 사용되고 있다. 항생·항균제에 대한 병원체의 내성을 키울 수 있다.

실제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00년 내놓은 보고서에서 “지구촌에서 생산되는 항생제의 절반가량만 인간이 사용하며, 나머지 절반은 가축에게 사용된다. 이로 인해 병원체의 내성이 커지는 것은 물론, 종을 뛰어넘어 감염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병원체가 만들어질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미 전염병학회(ISDA)도 지난해 비슷한 보고를 한 바 있다. 학회는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자료 내용을 따 “미 전역에서 항생제 저항력을 갖춘 병원체에 감염되는 이들이 한 해 200만 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9만 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면서 “항생제에 저항력을 갖춘 감염성 질환이 미국에선 이미 전염병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돼지에서 변형 일으킨 바이러스가 옮겨온 듯”

현재까지 알려진 바를 종합하면, 이번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적 구성은 인간 인플루엔자와 조류 인플루엔자, 그리고 미국과 유라시아계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여러 종이 뒤섞인 형태다. 이런 식의 유전적 조합은 인간에게서든 돼지에게서든 현재까지 발견된 바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발병 초기 호세 앙헬 코르도바 멕시코 보건장관은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돼지에서 변형을 일으킨 바이러스가 어느 순간 인간에게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멕시코 어딘가의 농장에서, 어느 시점에든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인구 2200만의 초대형 도시 멕시코시티의 학교와 공공기관은 아예 문을 걸어잠갔다. 멕시코 정부는 “경제와 공공안전에 필수적인 기관”을 빼고는 5월1일부터 5일까지 출입을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음식점과 공연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김없이 영업중단 조처가 내려졌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나라에서 일요 미사마저 취소된 상황이다. 인파로 넘쳐나던 멕시코시티 중심가 소칼로 광장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다. 서민들의 휴식처로 유명한 차풀테펙 공원의 육중한 철문도 닫힌 채다. 간간이 눈에 띄는 사람들도 수술용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관광객의 발길도 끊겼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연상시킨다.

어디 멕시코뿐인가? 세계보건기구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4월31일 새벽 2시(한국시각)까지 공식 확인된 돼지 인플루엔자 감염자는 세계 11개국에서 모두 257명에 이른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 유럽 각국과 이스라엘·뉴질랜드 등 지구촌 구석구석이 낯선 공포에 떨고 있다. 전염병의 세계화, ‘눈먼 세계화’가 만들어낸 유령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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