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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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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위를 폭력으로 이끌었나

전쟁터로 불린 4월13일 방콕, 평화로운 ‘붉은 셔츠’ 시위대에 ‘미명의 발포’…
‘노란 셔츠’는 치안 유지를 자처해
등록 2009-04-24 14:29 수정 2020-05-03 04:25

총성이 울렸다. 도심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붉은 셔츠’ 반정부 시위대는 군과 경찰은 물론 시민들과도 곳곳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4월13일 타이 수도 방콕은 ‘전쟁터’로 불렸다.

‘총리를 향해, 돌려차기~!’ 팔을 다쳤는지 보호대를 찬 채 ‘붉은 셔츠’ 시위에 가담한 한 젊은이가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웃고 있는 사진에 발길질을 하고 있다.

‘총리를 향해, 돌려차기~!’ 팔을 다쳤는지 보호대를 찬 채 ‘붉은 셔츠’ 시위에 가담한 한 젊은이가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웃고 있는 사진에 발길질을 하고 있다.

전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올해 초 정부가 강제 폐지시킨 정치 토크쇼 제목을 따 ‘오늘의 진실’이라 쓴 붉은 깃발을 들고 군이 몰고온 탱크에 올라, 사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달리던 4월12일의 상황은 완벽히 뒤집어졌다. 주체 못할 분노를 토해내는 젊은이들, 취재진인 양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복경관’에게 항의하다 제 분에 못 이겨 웃옷까지 벗어던지고 만 중년 여성, 그 ‘사복’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또 다른 중년 여성…. 그리고 4월14일 시위 지도부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시위대는 충혈된 눈으로 하염없이 분루를 삼켰다. 불과 며칠 전 휴양도시 파타야에서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 3(한·중·일)’ 정상회담을 무산시키고 의기양양하던 ‘붉은 셔츠’ 시위대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4월10일 ‘파란 셔츠’가 모습을 드러낸 뒤

“발포라니? 우린 그냥 시위대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설 뿐이다!” 방콕에 비상사태가 선포된 4월12일 늦은 밤 내무부 청사로 통하는 라차위디 도로를 막아선 채 무전을 치는 콩 폽(24) 소위는 ‘발포 명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외로 저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 뒤 군 지휘부가 마음을 바꿔 ‘명령’을 하달한 모양이다. 4월13일 새벽 4시께, 시내 딘댕 교차로에서 시작된 ‘미명의 발포’ 이래 이날 하루에만 네댓 차례 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특히 새벽녘 발포로 사상자가 제법 났을 거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이날 하루 타이 당국이 공식 집계한 사망자는 2명, 부상자는 123명이다. 희생자의 사망 원인이 군의 발포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이에 대해 ‘붉은 셔츠’ 시위를 이끌어온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 쪽에선 “군인들이 사망자를 은밀히 처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9월2일 새벽 반탁신·친국왕파인 민주주의국민연대(PAD)가 이끈 ‘노란 셔츠’ 시위대와 방콕 도심에서 격렬히 충돌한 때를 빼고, ‘붉은 셔츠’ 시위대는 비교적 평화롭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집회를 벌여왔다. PAD 지지자들이 갖고 다니던 골프채나 헬멧, 방패도 없었고, 총소리는 더군다나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4월10일 파타야에 정체불명의 ‘파란 셔츠’ 무리가 등장해 충돌이 벌어지면서, ‘붉은 셔츠’의 분노는 폭력의 기운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4월13일 시위 진압에 나선 타이군의 발포가 그 기운에 기름을 부었다. ‘붉은 셔츠’ 시위대는 방어선을 쌓겠다며 버스를 탈취해 휘발유를 붓고 보안군의 접근을 막았다.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다면 경찰과 최루탄만으로도 가능했고, 그게 적법한 수순이었다. 군이 발포해 시위를 진압하겠다는 발상을 한 것 자체가 국제 기준에 전혀 맞지 않는다.” 지난 2006년 쿠데타 직후 위기에 처한 탁신 전 총리의 ‘타이락타이당’ 대표직을 맡았던 짜뚜론 차이생은 4월13일 늦은 밤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폭력 사태가 시작된 이상 ‘붉은 셔츠’ 지도부도 거리의 시위대를 사실상 통제할 수 없다”고 시인했다.

처음엔 평화적 시위였다. 방콕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된 4월12일 ‘붉은 셔츠’ 시위에 참가한 이들이 군의 탱크에 올라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내달리고 있다(왼쪽). 이튿날 새벽 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4월12일 밤 타이군 병사들이 방콕 시내 곳곳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있다.

처음엔 평화적 시위였다. 방콕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된 4월12일 ‘붉은 셔츠’ 시위에 참가한 이들이 군의 탱크에 올라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내달리고 있다(왼쪽). 이튿날 새벽 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4월12일 밤 타이군 병사들이 방콕 시내 곳곳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부터 점검해보자. ‘붉은 셔츠’ 시위대는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탁신 총리 정부가 축출된 것에 항의해, 타이 역사에서 가장 민주적이란 평가를 받는 1997년 헌법의 복원을 주장하고 있다. ‘붉은 셔츠’ 운동은 지난해 하반기를 거치며 방콕으로, 중산층으로, 공무원으로, 자유분방한 젊은 층으로 지지 계층과 지역을 빠르게 넓혀왔다. 일부에서 주장하듯 “탁신 전 총리의 돈에 매수된 우둔한 농민이나 도시 빈민들의 무리”쯤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란 얘기다.

지난해 11월1일 방콕 라자망갈라 국립경기장에 10만여 명이 모여든 이래 UDD는 시위 때마다 4만~5만 명은 ‘기본’으로 동원해왔다. 물론 탁신 전 총리 지지자들이 절대다수다. 하지만 지난 1월31일 밤 방콕 왕궁 앞 사남루앙 광장에서 정부 청사까지 이어진 평화행진에 참여했다는 수윗 이카왓(가명)처럼 아피싯 웨차치와 현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정권에 반대해 ‘붉은 셔츠’를 입은 방콕 시민도 있고, 지난해 9월19일 쿠데타 발발 2주년을 맞아 반쿠데타 시위에 참가했다는 대학생 프라차야 수라캄폰롯(23)과 대학원생 수윗 레터라이마띠(34) 같은 이들도 있다. 시위 현장에서 마주친 상당수 ‘붉은 셔츠’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거만으로 민주주의가 보장되진 않는다는 점을 잘 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선거를 필요로 하지 않나. 우리가 여기 나온 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지, 탁신 전 총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사흘간 휴가 낸 현역 군인도 참가해

지난해 타이 정국을 쥐락펴락한 ‘노란 셔츠’ 시위대와 지난 70년 세월 동안 18차례나 쿠데타를 감행한 노회한 군부, 그리고 전통적인 방콕 엘리트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주당 정권이 빚어낸 ‘극우 신드롬’ 역시 구태의연한 엘리트 정치에 환멸을 느낀 젊은 세대를 ‘붉은 셔츠’ 진영으로 유도했다. 지난해 12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왕실 모독죄’ 사건과 인터넷 검열 강화는 이런 분위기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일부지만 현역 군인도 ‘붉은 셔츠’ 시위에 가담하고 있었다. 지난 4월8일 12만여 명의 시위대가 왕실 최고자문위원인 추밀원장 프렘 틴술라논다의 집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던 현장에서 만난 나따난(가명)은 먼저 다가와 거수경례를 하고는 인터뷰를 자청했다. “사흘간 휴가를 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졌다. 만일 진압부대에 배치돼 발포 명령을 받는다면 나는 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가 많다.” 그는 다시 한번 거수경례를 하는 것으로 짤막한 인터뷰를 마쳤다.

다시 4월13일의 ‘불타는 오후’로 돌아가보자. ‘붉은 셔츠’ 시위대가 점거한 방콕 중심가 정부 청사 부근에서 만난 늦깎이 대학생 폼(35)은 힘겨운 듯 손팻말을 들고 홀로 행진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PAD는 국제공항을 불법 점거해도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붉은 셔츠’는 도로를 점거했다는 이유로 군인들의 총격을 받았다.”

타이 시위사태 일지

타이 시위사태 일지

휴대전화 메시지 ‘다시 모이자’

사실이 그랬다. 지난해 정부 청사 내부를 석 달가량 ‘점령’하고, 돈므앙·수완나품 등 방콕의 국제공항 2곳을 점거해 항공교통을 극도의 혼란에 빠뜨렸던 PAD 지도부는 단 한 명도 처벌은커녕 소환조사도 받지 않았다. 비상사태가 선포됐지만 군은 ‘중립’을 지켰다. 공항 점거 사태를 ‘국민의 힘’이라고, ‘즐거운 음악과 맛난 음식과 함께한 신나는 시위’였다고 주장했던 PAD 지지자 카짓 피로미아는 아피싯 총리 정부가 들어선 뒤 외교장관이 됐다. 반면 4월14일 “더 이상의 유혈을 원치 않는다”며 시위대에 자진 해산을 명한 ‘붉은 셔츠’ 지도부는 이튿날 경찰 ‘특수수사국’에 분리 수감됐다. 애초 당국은 이들에게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자진해서 출두하는 조건으로 구금까지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청년 폼이 당국의 이중 잣대를 비판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던 그 시각, 정부 청사에서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요마랏 교차로 부근에서는 ‘이중 잣대’의 두 대상이 격렬하게 얽히고 있었다.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다는 한 타이 기자는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오후 4시께 ‘붉은 셔츠’ 시위대가 부근을 지나고 있을 때다. 주변에 서 있던 ‘시민들’ 사이에서 갑자기 누군가 ‘PAD는 두려움을 모른다’고 외쳤고, 이내 총소리가 났다. ‘붉은 셔츠’ 시위대도 즉각 반격에 나섰고, 곧 충돌이 벌어졌다. ‘시민들’ 쪽을 보니 지난해 노란 셔츠를 입고 PAD 시위에 자주 참여했던 낯익은 얼굴들이 상당수 보였다.”

400~500명쯤 돼 보이는 ‘시민들’에 맞서 100명도 채 안 되는 ‘붉은 셔츠’ 시위대는 버스에 불을 붙여 방어선을 세웠다. 양쪽은 30~40분 동안 격렬하게 충돌했다. ‘시민들’ 쪽에서 이따금 총성이 들려왔다. 이 사건은 시내 곳곳에서 목격됐던 ‘붉은 셔츠’ 시위대와 이들의 ‘폭력 시위에 화가 난 방콕 시민들’이 벌인 여러 충돌 중 하나에 불과하다. 2명의 ‘공식’ 사망자도 바로 이런 ‘민-민 충돌’ 과정에서 발생했다. 군의 발포를 비난하는 말 한마디 담아내지 않던 일부 타이 언론은 ‘민-민 충돌’을 두고 “시민들이 군을 도와 ‘붉은 셔츠’ 시위대에 맞섰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4월13일 늦은 밤, 정부 청사 인근에 사실상 갇혀 있는 2천~3천 명의 ‘붉은 셔츠’ 시위대에 대한 진압작전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난무했다. 요마랏 교차로 인근에는 군과 경찰, 취재진과 함께 ‘시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조그만 소리만 나도 “우~” 하고 몰려가 현장을 확인하는 건 군인도 경찰도 아닌 바로 이 ‘시민들’이었다. 군인도 경찰도, 시위 현장이면 어디든 등장하는 ‘사복’들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날 밤 방콕에선 치안을 누가 맡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타이 사회 구성원 상당수가 참여해온 ‘붉은 셔츠’ 진영의 목소리는 무시와 모욕, 그리고 ‘발포’로 진압됐다. 유혈사태로 희생자가 난 다음날인 4월14일 오전 ‘붉은 셔츠’ 지도부는 시위대에 자진 해산을 명했다. 타이 당국은 “이제 정상을 되찾았으며, 치안도 안정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 이날 오후 들어 시내 곳곳에서 다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이튿날인 4월15일 당국이 약속을 어기고 경찰에 출두한 지도부를 구금해버리자, 흩어졌던 ‘붉은 셔츠’ 시위대는 ‘다시 모이자’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돌리고 있다. 타이 사회의 계층·지역 간 갈등, 그리고 구세대를 대표하는 엘리트 정치와 그것을 거부하는 신세대의 갈등은 쉽게 아물지 않을 듯하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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