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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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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불능화’가 걱정일세

‘로켓발사’ 유엔 의장성명에 북 강경 발언 나오지만 북-미 대화 큰 가닥은 잡힐 듯…
경색될 남북관계가 되레 ‘변수’
등록 2009-04-23 20:59 수정 2020-05-03 04:25

북한이 ‘우주의 평화적 이용’이라며 로켓을 발사한 건 지난 4월5일이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골몰하던 일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북한은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4월13일(현지시각) 유엔안보리는 북의 로켓 발사가 결의안 1718호 위반이라고 비난하며, 대북 제재를 되살리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A4용지 1쪽 분량의 짤막한 ‘의장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판을 갈자, 협상의 틀을 바꾸자.’ 북한의 ‘건국 영웅’인 김일성 주석의 97번째 생일을 맞은 지난 4월15일 평양 중심가에 자리한 그의 동상 앞에서 북한 주민들이 추모식을 열고 있다. 북한에선 김 주석의 생일을 ‘태양절’이란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사진 REUTERS

‘판을 갈자, 협상의 틀을 바꾸자.’ 북한의 ‘건국 영웅’인 김일성 주석의 97번째 생일을 맞은 지난 4월15일 평양 중심가에 자리한 그의 동상 앞에서 북한 주민들이 추모식을 열고 있다. 북한에선 김 주석의 생일을 ‘태양절’이란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사진 REUTERS

구속력 없는 의장성명에 발끈한 북한

안보리는 의장성명에서 우선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마음 깊이 새기고, 북한이 4월5일 안보리 결의 1718호를 위반하고 (로켓을) 발사한 것을 비난한다”고 썼다. “북한이 결의 1718호가 규정한 의무를 전면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한다”며 “북한에 추가 (미사일) 발사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고도 적시했다. 안보리는 이어 결의 1718호에 근거해 마련된 ‘제재위원회’에 4월24일까지 제재를 가할 북한의 단체와 물품을 선정해 보고하도록 했다. 또 제재위가 적절한 활동을 수행하지 못하면 4월30일까지 안보리가 직접 나서 제재 대상(단체·물품)을 정하도록 했다.

북은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 직후 기다렸다는 듯 ‘발언’에 나섰다. 북 외무성은 4월14일 을 통해 격한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로켓 발사 이전부터 미리 경고했던 내용과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6자회담이 자주권을 침해하고 우리(북한)의 무장해제와 제도 전복만을 노리는 마당으로 화했다. 이런 회담에 다시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6자회담의 어떤 합의에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이다. …평화적 위성까지 요격하겠다고 달려드는 적대세력들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해 핵 억제력을 더욱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핵시설을 원상복구해 정상 가동하는 조처를 취할 것이다. …그 일환으로 폐연료봉들을 깨끗이 재처리할 것이다. …주체적인 핵동력 공업구조를 완비하기 위해 자체의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적극 검토할 것이다.”

북은 이미 유엔안보리가 로켓 발사를 문제 삼으면 6자회담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회담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건, 그동안 회담을 통해 합의한 사항을 무효화하겠다는 말이다. 당연히 ‘불능화’ 단계의 막바지로 다가서던 북핵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놓는 게 수순이 된다. 핵시설 원상복구와 폐연료봉 재처리를 통해 플루토늄 생산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눈에 띄는 건 북이 ‘자체의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미국 쪽의 반응은 어땠을까?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은 6자회담을 즉각 재개하고, 한반도를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비핵화하며,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전면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지금으로선 여기까지 말할 수 있다.” 로버트 우즈 미 국무부 대변인(권한대행)은 4월14일(현지시각) 정례브리핑에서 북 외무성이 내놓은 성명에 대한 반응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취재진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도 우즈 대변인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미 국무부가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동영상을 보면, 브리핑에 참석한 기자들도 순순히 물러서진 않았다. 사람을 바꿔가며 비슷한 질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우즈 대변인은 “국제사회는 안보리 의장성명을 통해 분명한 의견을 밝혔으며, 지금으로선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미의 침묵’은 별 수 없어서? 계산된 것?

이튿날인 4월15일 브리핑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취재진들은 북의 잇따른 ‘일탈행동’은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적 실패”가 아니냐고 몰아세웠다. “대북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우즈 대변인은 “북한의 행동은 (상황이 진전된 게 아니라) 명백한 후퇴이며,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뒤따를 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할 뿐,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4월16일 브리핑에서도 우즈 대변인의 ‘모호성’은 계속됐다. 우즈 대변인은 “공식적인 회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쪽과 일정한 의사소통을 했다”면서도, 북-미 접촉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선 아예 입을 닫았다. 왜 그럴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북의 잇따른 강수에 미국이 당황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다. “대처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은 미 국무부 브리핑장에서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실제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기 전에 ‘심각한 결과’를 경고했던 미국은 발사 이후엔 법적 구속력을 갖는 안보리 결의안 대신 구속력이 없는 ‘의장성명’에 만족해야 했다. 북한 문제를 다룰 정책라인 인선작업이 ‘완성태’를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임명하긴 했지만, 국무부에서 동북아 문제를 전담하는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아예 지명조차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스템’이 완비되지 못한 상태란 얘기다.

하지만 상황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쪽도 있다. 이른바 ‘계산된 침묵’론이 그것이다. 북한과 목하 물밑 접촉을 벌이는 상황이어서, 미 국무부가 극도로 발언을 아끼고 있다는 게다. 보즈워스 특별대표도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인 지난 4월3일 워싱턴의 외신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과 다각도로 접촉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우즈 대변인 역시 여러 차례 북쪽과 “의사소통”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에 북한에 대한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요구사항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고도 강조했다. 실제 의장성명의 앞부분이 ‘비난’과 ‘제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뒷부분은 안보리의 ‘바람’을 담고 있다.

‘행동’으로 협상 의제 제시해온 북한의 전례
지난 4월16일 영변 핵시설에서 감시활동을 하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이 북쪽의 급작스런 요청에 따라 평양에서 출국길에 나서고 있다. 북한은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온 직후 기존의 대화 채널을 무효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사진 REUTERS

지난 4월16일 영변 핵시설에서 감시활동을 하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이 북쪽의 급작스런 요청에 따라 평양에서 출국길에 나서고 있다. 북한은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온 직후 기존의 대화 채널을 무효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사진 REUTERS

“…안보리는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지지하며, 회담이 조기에 재개돼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또 2005년 9·19 공동성명과 그 후속 합의를 전면 이행하는 데 참가국들이 노력을 집중할 것을 촉구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가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평화롭게 비핵화되고,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와 안정이 유지되기를 기대한다. 안보리는 평화롭고 외교적인 방식으로 현 상황이 해결돼야 하며, 회원국들이 대화를 통해 평화롭고 포괄적인 해법을 마련하기를 희망한다.”

이는 고스란히 미국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미국이 안보리 의장성명이란 ‘외피’를 통해 북쪽에 북-미 직접 대화의 ‘원칙’을 제시했고, 이어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북-미 대화의 ‘의제’를 던졌다는 얘기다. 실제 북한은 ‘행동’으로 협상의 의제를 제시하는 습성이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북-미 직접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음에도 로켓 발사에 이어 6자회담 불참 등의 카드를 잇따라 던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 국책연구소의 외교·안보 전문가는 “재개되는 6자회담은 어찌됐든 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6자회담은 검증 문제를 두고 지난해 7월부터 중단된 상태다. 회담이 재개되면, 협상의 틀과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와 동북아 다자안보 문제가 한 축을 이루고, 비핵화와 에너지·경제지원 문제가 다른 한 축을 이룰 수밖에 없다. 불능화를 넘어 핵 폐기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도 미국도 이를 잘 알고 있다. 특히 폐기 단계로 가면 활용할 협상 카드가 줄어드는 북한으로선 어떻게든 남은 협상의 단계를 쪼개고 세분화해 가능한 한 많은 ‘카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6자회담 불참과 기존 합의 무시, 핵시설 원상복구, 경수로 건설 등을 거론한 것은 회담의 형식과 내용을 새롭게 하자는 주장인 동시에 본격적인 협상에 앞서 미국 쪽에 일종의 ‘숙제’를 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 들어 대화 분위기를 ‘주도’해온 것은 기실 북한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미국과 협상해야 할 내용을 공개적으로 ‘확인’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8년여 전 조지 부시 행정부가 집권 직후 전임 빌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해온 대북정책의 형식과 내용을 180도 뒤집었던 때를 연상시킨다.

당장은 ‘냉각기’지만 북-미 물밑 접촉은 계속될 듯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적극적인 북-미 양자협상을 통해 풀어가려 했다. 퇴임에 즈음해선 조명록-올브라이트 교차 방문이 성사되면서, 북-미 미사일 협상이 타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가 전임 행정부의 약속을 깨고 판을 뒤집어버렸다. 느슨한 다자구도로 협상 틀을 바꾸고, 직접 대화를 요구하는 북한을 ‘악의적’으로 무시했다. 임기 말에 이르러 북-미 직접 협상이 시작되긴 했지만, ‘6자회담 틀 안에서의 양자 접촉’이라는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북한이 6자회담에 ‘다시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은 결국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미 양자구도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8년여 전 약속을 깨고 판을 뒤집은 것은 미국이었다. 이번엔 북한이 그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 역시 북-미 양자 협상에 대한 의지를 여러 차례 강조해왔으니,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다자 틀’ 자체를 버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협상이 타결되면 치러야 할 비용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북-미가 협상을 주도하고 6자회담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형태가 될 공산이 커 보인다.

당장은 ‘냉각기’다. 얼마나 갈진 알 수 없지만, 그리 길지 않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그동안에도 협상의 틀과 내용을 정하기 위한 물밑 접촉은 계속될 터다. 일단 ‘판’이 짜이면, 속도는 생각보다 빠를 수 있다. 북한도, 미국도, 적극적인 대화 의지를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변수가 있다면, 북-미 관계와 엇박자를 내고 있는 남북 관계다. 작금의 상황이 이어진다면, 본격적인 협상에 앞서 북쪽은 남한을 배제하려 들 수 있다. 남쪽으로서도 남북 관계 진전 없는 북-미 관계 급진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게다. 아무한테도 도움이 안 되는 지경이다. 피해가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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