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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 그냥 두고 재건 돕겠다고?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내놓은 ‘팔레스타인 지원금’ 9억달러의 정치학
등록 2009-03-12 17:52 수정 2020-05-03 04:25

원조는 애초 정치의 산물이다. 재난에 처한 이웃을 위해 ‘흔쾌히’ 지갑을 열기 전부터, 이해득실에 대한 치밀한 계산과 줄 것과 받을 것을 따지는 철저한 물밑 협상이 줄을 잇는다. 도움을 주는 쪽도, 그것을 받는 쪽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공연히 ‘인류애의 발로’를 입에 올리는 건 그래서 객쩍다.

‘가자엔 3억달러, 서안엔 6억달러!’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오른쪽)이 3월4일 요르단강 서안을 방문해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과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EPA/ ATEF SAFADI

‘가자엔 3억달러, 서안엔 6억달러!’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오른쪽)이 3월4일 요르단강 서안을 방문해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과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EPA/ ATEF SAFADI

“하마스 배제” 선언한 미 대변인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재건을 위한 공여국 회의가 지난 3월1일 이집트 휴양도시 샤름 엘 셰이크에서 막을 올렸다. 회의에 참석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팔레스타인 지원금으로 모두 9억달러를 내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가운데 가자지구 재건을 위한 지원금은 3억달러다. 나머지 6억달러 중 2억달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밀린 임금을 지급하는 데 쓰고, 4억달러는 마무드 아바스 자치정부 대통령 휘하에 있는 요르단강 서안의 개발자금으로 지원한단다. 미 의회의 승인 절차가 남아 있지만, 돈 가뭄에 시달리는 팔레스타인으로선 단비 같은 소식이다.

이제 ‘해석’을 해보자. 은 로버트 우즈 미 국무부 대변인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하마스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선 안 된다. 미국은 가자지구 재건기금 3억달러가 하마스 쪽으로 흘러드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맺은 기존 협정을 받아들이고, 폭력 사용을 비난하는 등 3대 선결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미국은 하마스를 대화 상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원조를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힘을 받기를 기대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중동특사를 임명해 평화협상을 중재하라는 요구를 8년 내내 거부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직후 중동특사를 임명하고, 평화협상 재개를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는 듯싶다. 하지만 우즈 대변인의 이날 발언은 부시 행정부 시절의 중동정책이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하마스는 철저히 배제한다. 둘째, 미국이 인정한 팔레스타인 쪽 협상 대표는 아바스 자치정부 대통령과 파타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어 오바마 행정부 중동정책의 세 번째 ‘원칙’을 우즈 대변인은 이렇게 제시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봉쇄를 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집트 국경을 통해 무기를 불법 밀수하는 행위는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

재건 지원금은 현지에 도착해 분배가 돼야 힘을 얻는다. 말뿐인 돈은 집을 짓지도, 병원이나 학교를 고치지도 못한다. 가자지구 재건 자금 3억달러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돈이 온전히 가자지구로 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 원조단체를 통해 자금을 풀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그다지 가당한 소리가 아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절차가 까다로우리라는 점은 논외로 하자. 가자의 현 상황이 신속한 외부 지원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점도 잠시 제쳐두자. 아바스 대통령의 파타당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에서만 유효하다. 가자지구 재건을 위해 서안의 자치정부와 대화하는 건 공염불에 가깝다. 가자지구의 자치정부는 오로지 하마스다. ‘3대 선결조건’을 들이대는 건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하마스 없는 가자 재건은 허울뿐이다.

마카로니·콩은 생필품 아니래

국제 원조단체의 활동마저 가로막고 나서는 이스라엘의 봉쇄를 그냥 두고 가자를 재건하겠다는 것도 염치없다. 국제 구호단체 ‘머시코어’가 지난 2월 마카로니(파스타의 일종) 90t을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공급해주려 했을 때,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극구 막고 나섰다. 처음엔 “마카로니가 하마스 쪽으로 흘러들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유였고, 그 다음엔 “마카로니 같은 건 생필품이 아니기 때문에 반입을 허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치품’이란 얘기다. 뉴스 신디케이트 는 2월25일 “이스라엘 정부는 이 밖에도 종이, 크레용, 토마토 소스, 콩 등도 생필품이 아니라며 반입을 금지했다”고 전했다. 취임 한 달여, ‘오바마의 미국’에서도 맹목적인 이스라엘 껴안기는 흔들림이 없을 것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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