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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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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해적에 부시의 흔적이…

안정 되찾다 ‘알카에다 도피 가능처’로 지목되면서 ‘테러와의 전쟁’으로 번져…
해적질은 파괴된 땅의 유일한 ‘성장 산업’
등록 2008-11-28 14:07 수정 2020-05-03 04:25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
지난 9월 말 탱크 등 중화기를 가득 실은 우크라이나 선적 ‘엠브이 파이나’호를 나포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소말리아 해적들이 이번엔 초대형 유조선을 나포했다. 지난 11월15일 케냐 앞바다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에 딸린 선박업체 벨라 인터내셔널이 소유한 ‘엠브이 시리우스 스타’호를 끌고 간 게다. 벨라 인터내셔널이 홈페이지에 올린 자료를 보면,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해 올 3월29일 경남 거제에서 진수식을 한 이 배는 총 연장만 332m에 이른다. 웬만한 미 해군 항공모함의 3배에 육박하는 크기다. 〈BBC방송〉은 11월18일 인터넷판에서 “나포 당시 싣고 있던 원유만도 200만배럴(시가 약 1억달러)로,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하루 생산하는 원유의 25%에 이르는 양”이라고 전했다.

‘탈레반을 닮았네.’ 이슬람법정연대(ICU)의 소장파 그룹이 분화해 나온 샤바브 무장대원들이 11월4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외곽에서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AP

‘탈레반을 닮았네.’ 이슬람법정연대(ICU)의 소장파 그룹이 분화해 나온 샤바브 무장대원들이 11월4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외곽에서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AP

200여 명이 여전히 해적 손아귀에

소말리아 해적들의 최근 행보가 심상찮다. 11월 들어 나포한 선박만 11월20일 현재까지 엠브이 시리우스 스타를 포함해 10척이 넘는다. 아랍 위성방송 는 11월20일 인터넷판에서 “지난 48시간 동안에만 그리스 선적 유조선과 타이 어선, 홍콩 화물선 등 모두 3척이 나포됐다”며 “상황이 통제 불능으로 치닫고 있다”고 전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 10월7일 결의안을 내어 소말리아 해적 소탕에 적극 나설 것을 국제사회에 촉구한 게 무색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프리깃함 7척을 급파하고 KDX-II급 구축함인 ‘강감찬함’을 파견하기로 한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이 자국선박 보호를 위해 해군 함정 파견을 서두르고 있다. 그럼에도 ‘욱일승천’하는 해적들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동원호·마부노호 등 한국 어선들의 수난이 계속된데 이어, 지난 11월15일엔 일본 선적 ‘켐스타 비너스’호가 나포되면서 승선했던 한국인 선원 5명이 함께 억류돼 있다. 는 “올해 들어 소말리아 해적이 나포한 선박은 모두 30여 척으로, 이 가운데 10여 척의 선박과 승무원 200여 명이 여전히 해적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고 전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걸까?

소말리아 해적이 국제사회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철권을 휘두르던 독재자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가 1991년 1월 말 군벌 연합세력에 의해 축출된 이후 시작된 ‘무정부 상태’가 그 뿌리다. 종족과 지역으로 갈린 군벌의 이전투구가 내전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굶주린 어민들이 하나둘 하릴없이 해적으로 변해간 게다.

‘반전’의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2006년 6월 ‘이슬람법정연대’(ICU)가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내전을 정리했을 때다. 1995년 3월 유엔 평화유지군마저 소말리아에서 철수한 뒤 총체적 혼란에 빠진 소말리아에서 그나마 치안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지역별로 조직된 ‘이슬람 법정’의 공이었다.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기반으로 민심을 아우르며 기반을 쌓은 이슬람 법정 진영은 1999년 4월 전국 단위의 연대체를 꾸렸고, 이후 소말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넓혀 마침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게다.

종족별로 난립했던 군벌의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이슬람법정연대가 모가디슈에 입성한 이후 소말리아는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아갔다. 한 달여 만인 그해 7월 10여 년간 폐쇄됐던 모가디슈 국제공항이 문을 열었다. 8월엔 역사적으로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는 교두보 노릇을 해왔던 모가디슈 항구도 다시 개방됐다. 비슷한 시기 이슬람법정연대는 모가디슈에서 약 500km 떨어진 하라드헤레를 비롯한 동부 해안가 일대 해적들의 전초기지도 차례로 장악해나갔다. 내전과 역사를 같이해온 해적들도 잇따라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소말리아 땅에도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해 말 다시 급반전했다. ‘대테러 전쟁’의 망령이 소말리아를 휘감기 시작한 게다.

‘지도부 3인방 겨냥’ 직접적으로 밝혀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소말리아를 ‘위험지역’으로 꼽은 건 2001년 9·11 동시테러 직후부터다. 장기간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면서,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소말리아로 흘러들었다는 ‘설’이 심심찮게 전해지곤 했다. 실제 부시 대통령은 이슬람법정연대의 모가디슈 장악 직후 “소말리아가 알카에다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때맞춰 ‘유엔 소말리아 감시그룹’이 2006년 11월 보고서를 내어,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헤즈볼라 연계설과 이란 정부의 이슬람법정연대 지원설에 불을 지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테러’란 유령을 쫓는 무한 전쟁이 아프리카 땅에서 재현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선봉에 선 것은 이웃한 기독교 국가 에티오피아였다. 동부 오가덴 일대에서 활동하는 소말리아계 무장독립 세력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에티오피아 정부는 이슬람 세력의 소말리아 정국 장악을 ‘위험신호’로 해석했다. 미국의 정보·병참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군은 그예 2006년 12월 초 이슬람법정연대 쪽과 교전을 시작했고, 같은 달 20일부터는 전면적인 공세를 펼쳤다. 결국 그해 12월28일 이슬람법정연대는 쏟아지는 포탄 속에 모가디슈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우크라이나 선적 ‘엠브이 파이나’호를 납치한 소말리아 해적들이 지난 10월8일 이 일대 순찰에 나선 미군 함정의 감시를 피해 소형 선박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미 해군 제공

우크라이나 선적 ‘엠브이 파이나’호를 납치한 소말리아 해적들이 지난 10월8일 이 일대 순찰에 나선 미군 함정의 감시를 피해 소형 선박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미 해군 제공

이후 미국은 드러내놓고 소말리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단행했다. 2007년 1월 초 두 차례에 걸쳐 AC130 전천후 공격기를 동원해 소말리아 남부 항구도시 키스마요에서 대대적인 공습작전을 벌인 게다. 이를 두고 당시 미군 당국은 파줄 압둘라 모하메드 등 알카에다 ‘지도부 3인방’을 겨냥한 작전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소말리아에서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는 점을 인정한 게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무장 개입 초기 손쉬운 승리에 도취한 에티오피아는 성급하게 ‘승리’를 말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서 ‘임무 완수’를 선언한 것과 닮은꼴이다. 이후 소말리아의 정정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빼닮아갔다. 미국을 등에 업은 에티오피아군의 침공과 점령은 소말리아 전역에서 반발을 불렀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그랬듯, 점령군에 맞선 ‘저항세력’이 급속히 형성됐다.

미국의 침공으로 삽시간에 파키스탄 국경지대까지 쫓겨갔던 아프간의 탈레반이 남부 헬만드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카불을 넘보고 있듯, 모가디슈에서 패퇴한 뒤 소말리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추스른 이슬람법정연대는 채 1년도 안 돼 수도 모가디슈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다. 미군에 기댄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카불 대통령’이란 얘길 듣는 것처럼, 에티오피아군의 보호를 받는 압둘라히 유수프 소말리아 과도정부 대통령은 ‘모가디슈 대통령’이란 비아냥에 시달리고 있다. 미 민주당 계열의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는 지난 4월 펴낸 ‘블랙호크 다운 15년: 소말리아의 선택은?’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탈레반’을 연상시키는 ‘샤바브’

“이슬람법정연대는 올 1월 현재 에티오피아군 침공으로 쫓겨났던 지역 대부분을 재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소말리아 남부 일대에선 과도정부나 에티오피아군보다 이슬람법정연대의 영향력이 더욱 막강한 상황이다. …소말리아 이슬람주의 진영은 에티오피아의 침공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을 거듭해왔다. 2006년 말에 비해 지지 기반도 대폭 넓어졌으며, 더욱 급진적 성향을 띠고 있다. (테러 근절이란)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침공 목적과는 정반대로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의 테러 연계 가능성은 되레 커진 게다.”

그 새 이슬람법정연대 내부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갔다. 올 3월 미 국무부는 소말리아 무장세력 ‘샤바브’(아랍어로 ‘젊은이’란 뜻)를 새롭게 국제테러 조직으로 등재시켰다. 이슬람법정연대의 강경 소장파 그룹이 분화해 나와 결성한 샤바브는, 무자헤딘에서 떨어져나온 아프간의 탈레반(아랍어로 ‘학생’이란 뜻)을 연상시킨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지난 11월10일 펴낸 정책 보고서에서 “최근 하르게이사와 보사소 등지에서 1시간 남짓 사이에 잇따라 벌어진 자살폭탄 공격은 샤바브와 연계한 알카에다가 마침내 소말리아 땅에 뿌리를 내렸음을 방증해준다”며 “한때 통일됐던 이슬람법정연대 내부에서도 종족과 이념에 따른 분화가 이뤄지면서 소말리아 전역을 하나의 세력이 장악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섣부른 무력 개입이 화를 키웠다는 게다.

내전은 벌써 17년째 이어지고 있고, 그 기간에 중앙정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체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통계 자료가 없는 게 소말리아의 현실이다. 미국진보센터는 지난 9월 펴낸 ‘소말리아: 위험에 빠진 나라, 악몽에 허덕이는 정책’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소말리아의 인구를 800만~900만 명으로 추정했다. 보고서는 “이 가운데 2006년 12월 이후 적어도 70만 명가량이 (총탄을 피해) 소말리아 내부에서 난민으로 떠돌고 있다”고 전했다.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인도적 재난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0월 초 소말리아에서 활동하는 50여 국제 구호단체는 공동성명을 내어 이렇게 지적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현재 약 325만 명이 긴급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며 “이는 올 초에 비해 무려 77%가 늘어난 수치”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는 소말리아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자기 땅을 떠돌고 있는 국내난민(IDPs)만도 11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비슷한 시기 〈BBC방송〉이 ‘휴먼라이츠워치’의 보고서 내용을 따 “소말리아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는 비극”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가장 무시되고 있는 비극”

엠브이 시리우스 스타호를 나포한 소말리아 해적들이 마침내 ‘몸값’ 흥정에 나섰다. 는 11월20일 “해적들이 선박과 선원 25명을 넘겨주는 대가로 2500만달러를 선주 쪽에 요구했다”고 인터넷판에서 전했다. 시리우스 스타호는 현재 소말리아 동부 하라드헤레 해안가에 매여 있다. 2006년 6월 모가디슈를 장악한 이슬람법정연대가 해적 소탕 작전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장소다. 정부가 없는 땅, 전쟁과 가난만 남아 있는 소말리아에서 해적질은 유일한 ‘성장산업’이다. 는 “하라드헤레를 중심으로 북동부 해안가 에일과 보사소 등에선 이른바 ‘해적 경제’가 활황세”라며 “올 한 해에만 해적들이 나포한 선박과 선원들을 돌려주는 대가로 받아챙긴 돈만 무려 3천만달러를 넘어선다”고 전했다. 아프리카판 ‘테러와의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 전쟁이 키워 진화까지 시킨 ‘괴물’도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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