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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2제, 의료와 아프간

빌 클린턴 행정부의 ‘좌절’에서 배울 것과 조지 부시 행정부의 ‘실책’에서 배울 것
등록 2008-11-21 17:00 수정 2020-05-03 04:25

‘7996명.’
2008년 현재 미 연방정부에서 정책 및 정책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비경쟁 임명직’ 공무원의 규모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마다 미 상원 국토안보위원회와 하원 정부개혁위원회가 번갈아 이와 관련된 정보를 담은 ‘플럼북’이란 책자를 펴낸다. 책자에는 각 부처별 대상 인원과 직책·직급에 따른 업무 영역, 급여 수준 등의 정보가 상세히 소개돼 있다. 올해 플럼북은 상원이 발행했는데, 표지를 포함해 모두 217쪽 분량이나 된단다. 집권 준비에 여념이 없을 대통령 당선자로선 쏟아져 들어오는 이력서의 홍수에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을 게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는 ‘빙산의 일각’

‘고생 많았죠. 그럼, 이제 안녕~!’ 11월10일 백악관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오른쪽)가 마중 나온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다. REUTERS/ JIM BOURG

‘고생 많았죠. 그럼, 이제 안녕~!’ 11월10일 백악관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오른쪽)가 마중 나온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다. REUTERS/ JIM BOURG

11월10일 오후(미국 동부시각) 백악관 방문을 시작으로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의 정권 인수 행보가 숨가쁘다. 존 포데스타 전 백악관 비서실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정권인수팀은 출발부터 ‘진보’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새 정부의 뼈대를 그려내느라 부산하다. 일부 현안에 대해선 벌써부터 정책 방향의 얼개가 제시되고 있다.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행정명령권을 적극 활용해 조지 부시 행정부가 미국 사회에 전방위적으로 박아놓은 ‘대못’을 일거에 뽑아내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오바마 행정부의 등장만으로 퇴락했던 미국의 대외 이미지가 높아지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반응이 속속 전달되고 있으니, 발걸음은 가벼워도 어깨는 무거울 터다.

이미 ‘변화’의 조짐은 뚜렷하다. 〈AP통신〉은 11월10일치 기사에서 “오바마 당선자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테러 용의자 일부를 석방하고, 혐의가 짙은 이들은 미국으로 데려와 재판을 받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실상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는 게다. 그동안 관타나모 수용소는 이라크 침공과 함께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과 이에 따른 인권유린의 상징으로 여겨져왔다. 한때 수감자가 770여 명을 헤아렸지만, 현재 관타나모에 수감돼 있는 ‘테러 혐의자’는 25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문제는 오바마 행정부가 직면할 산적한 난제를 놓고 보면,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이다. 이라크 전쟁으로 상징되는 외교적 파산은 물론 전세계를 얽어맨 금융위기는 내년 1월20일 취임하게 될 오바마 당선자를 일찌감치 시험대로 몰아세우고 있다. 위기에 위기가 더해졌으니, 숨은 가쁘고 걸음을 바빠질 수밖에 없다. 급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워싱턴 정가 안팎에서 오바마 당선자를 향해 “앞선 정부의 경험에서 배우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좌절’과 조지 부시 행정부의 ‘실책’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게다. 여러모로 오바마 당선자와 비교되는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했던 개혁정책이 좌절되는 과정부터 살펴보자.

1992년 대선으로 집권한 클린턴 대통령도 오바마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변화’와 ‘희망’의 전도사였다. 비슷한 점은 또 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쌓여온 천문학적 재정적자에 발목이 잡히면서, 사회정책 분야에서 정부 지출을 확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금융위기와 재정적자라는 부시 행정부의 ‘유산’에 발목 잡힌 오바마 당선자와 닮은꼴이다. 그럼에도 클린턴 행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의료개혁’ 문제다. 오바마 당선자 역시 후보 시절부터 ‘의료개혁’ 문제를 적극 강조해왔다.

전 국민 의료보장 법안이 좌절된 사연

이른바 ‘선진국’ 가운데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를 갖추지 않은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제도 개혁을 위한 노력은 지난 100년 이상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민간자본에 휘둘리고 있는 의료제도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클 수밖에 없다. 후보 시절부터 민간 의료보험제도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집권 직후 ‘국가 의료제도 개혁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대통령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비공식적’ 공동위원장을 맡아 ‘힐러리 케어’라고도 불렸던 당시 의료개혁 논쟁은 이내 클린턴 행정부 집권 초기를 뜨겁게 달군 최대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 6월10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한 병원을 찾아 입원 치료 중인 환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의료제도 개혁은 오바마 당선자의 핵심공약 가운데 하나다. AP PHOTO/ ALEC BRANDON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 6월10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한 병원을 찾아 입원 치료 중인 환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의료제도 개혁은 오바마 당선자의 핵심공약 가운데 하나다. AP PHOTO/ ALEC BRANDON

하지만 섣부르게 나선 ‘개혁’은 공화당 보수파의 조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정부 각 부처의 역할이 얽히고설켜 법 조문만 1천여 쪽에 이를 정도로 복잡한 문제를 충분한 조율작업 없이 밀어붙인 것도 화근이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의료개혁 법안이 통과되면, 기업이 떠맡아야 할 노동자들의 의료보험료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란 논리가 횡행했다. “의료보험제도 자체엔 문제가 없으며 일부 의료보험 회사의 일탈이 문제”라는 주장도 이어졌고, 민간 의료보험 업계도 조직적으로 ‘개혁입법’ 저지를 위한 로비에 골몰했다. 여기에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대통령 부인이 국가 중요정책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법정다툼으로 이어지면서, 소모적인 논쟁이 들끓었다.

결국 클린턴 행정부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전 국민 의료보장을 뼈대로 한 ‘1993년 의료개혁 법안’은 이듬해 여름 의회에서 부결됐다. 클린턴 행정부로선 치명적인 정치적 상처를 떠안게 된 게다. 그 결과 1994년 11월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보수적 사회정책을 종합한 ‘미국과의 계약’을 공약으로 내건 공화당은 상하 양원을 석권하며 ‘보수 혁명’을 이뤄냈다. 집권 2년 만에 날개가 꺾인 클린턴 행정부는 이후 적극적인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사회·복지 정책 확대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재정적자를 줄여 ‘균형예산’을 맞추는 데만 골몰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집권 말기 결국 예산 흑자를 달성했지만, 미 정가에선 ‘전 국민 의료보장’ 관련 논쟁이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즉각적인 긴급 경기부양 대책을 넘어서 포괄적인 사회·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할 것이다.” 는 11월9일치에서 램 이매뉴얼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클린턴 행정부 집권 초기와 마찬가지로 전임 정권이 남겨놓은 천문학적 재정적자에 직면해 있지만, 금융위기를 ‘역사적’ 기회 삼아 대담한 개혁에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게다. 전문가들 역시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지출을 통한 사회복지 확대와 강력한 경기 부양책을 담은 ‘대담한 행보’를 강조한다. 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11월8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뉴딜정책 때보다 훨씬 대담한 행보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간 안정은 군사 수단만으론 불가능

차기 의회에서 민주당은 상하 양원 모두 넉넉한 우위를 확보했다. 유례없는 위기는 오바마 행정부의 ‘개혁’에 명분과 힘을 더해줄 게다. 인선 작업이 한창인 오바마 행정부에선 이매뉴얼 내정자는 물론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 등 클린턴 행정부 출신 인사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취임에 앞서 과거의 ‘좌절’을 되새겨볼 만한 이유다.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 11월11일 시카고의 참전군인 묘역을 찾은 오바마 당선자가 이라크전에서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여성 참전군인을 보듬어안고 있다. REUTERS/ KEVIN LAMARQUE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 11월11일 시카고의 참전군인 묘역을 찾은 오바마 당선자가 이라크전에서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여성 참전군인을 보듬어안고 있다. REUTERS/ KEVIN LAMARQUE

부시 행정부의 ‘실책’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오바마 당선자는 선거운동 기간에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정책을 비판하는 효과적인 무기로 아프간을 활용했다. 9·11 동시테러의 ‘주범’이 아프간에 있는데, 이라크 전쟁을 치르느라 아프간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논리였다. 현 수준보다 대폭 강화된 병력을 아프간에 파병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간 현지 분위기는 이런 오바마 당선자의 입장과는 사뭇 배치된다. 영국 은 11월10일치에서 이렇게 전했다.

“프랑수아 피투 아프간 주재 프랑스 대사와 셰퍼드 코퍼 콜스 영국 대사 사이에 지난 9월 초 오간 서한이 최근 언론에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서한에서 아프간 치안 상황이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주둔이 상황을 더욱 나빠지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미국 대선에 출마한 두 후보가 아프간에 더 이상 깊숙이 개입하지 않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이들이 말한 유일한 현실적 정책 대안은 ‘참아낼 만한 독재자’를 양성하는 것뿐이다.”

은 이어 아프간 주둔 영국군 사령관 마크 칼튼 스미스 장군의 말을 따 “탈레반을 전멸시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전했다. 카이 에이데 유엔 아프간 특사도 “아프간 상황을 안정시키는 건 군사적 수단만으론 불가능하다”며 “탈레반과의 대화를 포함한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지난 10월9~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NATO 회담에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회원국들에게 아프간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 이라크에서 ‘성공’을 거둔 증파 계획이 아프간에서도 통할 것이란 논리다. 미국은 이미 내년에 아프간 주둔 병력을 8천 명가량 늘리기로 했다. 이는 오바마 당선자가 선거 기간에 주장한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부시 행정부 시절 이라크 문제로 결별 직전까지 갔던 유럽과 미국이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 아프간 정책을 두고 비슷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아프간 전쟁이 ‘오바마의 전쟁’ 될지도”

물론 선거운동 기간에 내건 표어를 집권 뒤 고스란히 정책화하는 건 아니다. 11월4일 선거 이후 오바마 당선자는 이란 등 주변국과의 연계를 통한 아프간 안정화 전략도 검토하고 있음을 몇 차례 내비쳤다. 무엇보다 아프간은 외국군의 장기 주둔을 허용하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다. 영국군도 그곳에서 두 차례나 패퇴했고, 냉전의 두 축 중 하나이던 소련도 물러나야 했다. 게다가 내년엔 아프간에서 대선이 예정돼 있다.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카불 대통령’이란 비아냥을 벌써 몇 해째 듣고 있다. 다음 선택은 뭘까? 이래저래 집권 초반 아프간 문제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가늠할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에릭 포너 컬럼비아대 교수(역사학)는 지난 10월30일 독일 주간지 인터넷판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에서 병력을 빼내 아프간에 집중하겠다는 오바마 후보의 발언은 스스로 구덩이를 파는 꼴이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민주당은 ‘잘못된 전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아프간에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프간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많은 나라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만약 오바마가 아프간에서 확전에 나선다면, 이는 그의 대통령직을 위태롭게 만드는 행동이 될 것이다. 집권한 지 6개월도 지나기 전에 아프간 전쟁은 부시의 전쟁이 아니라 오바마의 전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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