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9일 조용한 대학 도시인 미 캘리포니아주 버클리가 뉴스의 초점이 됐다. 무려 648일 동안 대학 교정의 나무 위에서 시위를 벌여오던 청년 4명이 경찰에 체포되는 모습이 방송을 탄 것이다. 이는 도시 공간에서 가장 오랫동안 나무 위에서 한 시위로 기록될 것이다.
사실, ‘나무 위 시위자’(tree-sitter)가 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이런 방식의 저항운동은 1970년대 뉴질랜드에서 숲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으로 시작됐다. 이후 미국에서는 1985년에 처음 나무 위 시위가 시작됐으며, 1990년대부터는 종종 개인 소유의 숲이 벌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 살면서 투쟁을 해왔다. 평화적으로 해결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목재회사에서 고용한 사람들과 경찰에 끌려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평화적 해결 사례는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의 시위가 대표적이다. 그는 600여 년이 된 미국 삼나무 숲을 살리기 위해 1997년 12월10일부터 99년 12월18일까지 무려 738일 동안이나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저항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정부의 중재를 거쳐 시민들이 모은 자금으로 퍼시픽럼버라는 목재회사로부터 숲을 사들여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저항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환경주의적 시민불복종 운동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개인의 사유지에 무단 침입해 사유물인 나무를 무단 점거하고 훼손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숲을 소유한 벌목회사나 목재회사들과 날카롭게 대립해왔다. 다만 이번 사건은 도시에서 벌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9월9일 벌어진 버클리대학 사건의 발단은 2006년 12월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식축구장인 메모리얼스타디움 앞의 작은 숲에 체육관을 건설하려는 버클리대학의 계획이 알려지자, 제커리 울프를 포함한 3명이 나무 위로 올라가 저항을 시작했다. 이후 수백 명의 동조자들이 번갈아가면서 나무 위 시위를 이어갔다. 한편 체육관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버클리시와 함께 환경단체 2곳이 이에 반대해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2007년 1월29일, 재판부는 잠정적으로 체육관 건설 중단 명령을 내렸다. 이후 학교 당국과 원고 쪽은 법정 안팎에서 팽팽한 대결을 벌였다. 마침내 지난 9월4일, 캘리포니아주 법원은 버클리대학에 공사를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대학 당국은 기다렸다는 듯 며칠 뒤 시위자들이 올라가 있는 나무와 교정의 다른 곳으로 옮겨 심기로 한 나무를 제외한 숲의 모든 나무들을 베어버렸다.
숲을 살리기 위한 환경운동가들의 나무 위 시위도 주목을 끌었지만, 지진과 관련한 이 지역 고유의 안전 문제도 소송의 쟁점이 됐다. 원고 쪽은 대학 당국이 지진 단층대와 관련된 법규를 위반한 것을 소송의 주요 쟁점으로 삼았다. 1923년에 지어진 메모리얼스타디움은 단층대 위에 위치해 있다. 지질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한다면, 이 단층대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지적해왔다. 이런 견해를 근거 삼아, 새로운 체육관 건설은 메모리얼스타디움 보강 공사를 마친 다음에 진행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올바른 과정이라고 원고 쪽은 주장했다. 그래야만 만약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붕괴나 파손 가능성이 있는 메모리얼스타디움이 새로 만들게 될 체육관에 끼칠 피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강공사 기간만이라도 메모리얼스타디움 앞의 작은 숲은 보존돼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숲은 완전히 사라지다9월9일에는 버클리 교정에는 여러 대의 방송사 차량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기자들도 마이크를 붙잡고 인터뷰를 하거나 여기저기로 전화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시위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구경꾼들까지 모여 있었다. 상황이 종료될 시점에는 사람들이 거의 200~3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아침 8시부터 대학에서 고용한 건설업자들이 시위자들이 있는 나무의 사방으로 비계를 설치하고, 마치 뱀이 나무에 똬리를 틀며 올라가듯 금속 판때기로 플랫폼을 만들면서 시위자들이 만든 나무 꼭대기의 임시 설치물 쪽으로 접근해갔다. 그러자 시위대는 빈 생수통을 북처럼 두드리면서 ‘전의’를 불러일으켰다. 나무 아래에서 시위대 일부는 경찰이 쳐놓은 폴리스 라인을 넘어갔다가 강압적으로 연행되거나, 경찰과 충돌하면서 쫓고 쫓기는 공방전을 벌이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낮 12시 무렵에 건설업자들이 만든 플랫폼이 임시 설치물까지 도달하자, 지상에 있던 시위 대표자 1명이 방송사 사람을 통해 휴대전화로 나무 위 시위자들과 연락을 취했다. 나무 위의 시위자들은 방송사와의 통화를 통해 자진해서 내려가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해 대략 30여 분에 걸쳐 임시 설치물에서 1명씩 내려왔다. 수갑을 찬 채로 차례차례 임시 계단으로 내려온 이들은 교도소로 보내졌다.
오후 5시께 시위자들이 올라가 있었던, 하나 남은 삼나무가 전기톱에 베어졌다. 그리하여 메모리얼스타디움 앞에 위치한 작은 숲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지상의 시위자 5명을 포함해 모두 9명의 숲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함께.
흥미롭게도, 기본적으로 진보적 시각을 지닌 버클리대학의 학생신문 사설은 나무 위 시위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알려진 이들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하다는 논평이었다. 사설은 학생도 아닌 그들로 인해 마치 버클리의 명성에 흠이 간 것처럼, 그들의 저항운동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양 가차 없이 비난했다. 그들은 법을 어기면서 대학의 재산인 나무 위에 올라가 1960년대 버클리대학에서 벌어졌던 저항운동을 흉내냈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제안한 토지 사용에 대한 공동체적 협의체의 필요성에는 공감을 표시했다. 또한 21개월에 걸친 대학 당국의 인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애초에 체육관 건설에 관해 전체 구성원의 의견을 묻고 타협을 이끌어냈더라면 이런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신문에서 인터뷰한 학생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거의 2년을 버텨온 나무 위 시위는 버클리대학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대학의 이해관계와 자연 보전 간의 갈등을 바라보는 대학의 행정가들,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지역민들은 과연 훗날 스타디움 앞의 이 사라진 숲을 기억할까. 만약 기억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인가.
환경의 세기, 인간의 욕구와의 조화버클리대학에서의 나무 위 시위는 끝났지만, 또 다른 캘리포니아대학 분교인 샌타크루즈 교정에서도 2007년 11월7일부터 약 30m 높이의 삼나무 위에서 지금까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젠 환경운동가들에게 나무 위 시위 방식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21세기는 좋든 싫든 간에 환경의 세기가 될 것이다. 이미 목격하고 있는 현상이지만, 생태 및 환경과 관련된 사건들이 여러 방식으로 발생해왔다. 버클리대학에서 일어났던 나무 위 시위 사건은 우리에게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환경과 인간의 욕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에 대해 더욱 진지한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버클리(미국)=글·사진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역사학 dhkim@ku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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