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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달라이 라마의 ‘생각대로’ 망명정부

‘성하’가 개헌·의회 해산까지 할 수 있는 ‘경악’할 헌법은 비폭력·평화의 현란한 수사에 가려져 있네
등록 2008-09-05 00:00 수정 2020-05-03 04:25

▣ 포카라(네팔)=유재현 소설가 hyoooo@hanmail.net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④]


베이징올림픽 벽두에 전해진 소식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개막식에서 선보인 립싱크나 가짜 피아노 연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불꽃놀이들이 그랬다. 그러나 이것들을 연출의 천박함으로 치부한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개막식에서 보였던 소수민족의 합창 장면에 정작 소수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장이모의 천박함을 떠나 오늘의 중국이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보이는 무의식의 진심으로 보인다. 베이징올림픽의 표어인 ‘하나의 세계’는 오늘 중국이 부흥시키고 있는 시장사회주의적 중화주의가 내건 ‘하나의 중국’을 위한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미 CIA 지원을 받아 벌인 무장봉기

그 반대편에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가 있다. 베이징올림픽을 5개월여 앞둔 티베트 라싸에서는 민중항쟁에 가까운 사태가 벌어졌고, 이후 티베트는 비공식의 계엄령 치하에 놓였다. 베이징올림픽이 폐막식을 향해 치닫던 지난 8월18일 달라이 라마는 세계를 향해 중국이 올림픽 기간에 140여 명의 티베트인들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베이징올림픽을 둘러싼 티베트 사태에서 중국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고, 달라이 라마는 거의 모든 것을 얻었다. 중국의 성화 봉송은 세계 각지에서 돌부리에 걷어채었고, 중국은 지구촌 반인권의 상징으로 낙인이 찍혔다. 자업자득이므로 동정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티베트 민중이 흘린 피로 얻은 성취를 달라이 라마에게 헌납한다는 것은 여전히 온당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풍운의 한 세월을 살아온 14대 달라이 라마도 한때는 지금처럼 비폭력을 주장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1950년 달라이 라마의 자리에 올라 1959년 무장봉기 뒤 인도 북서부 다람살라로 망명을 떠날 때의 나이는 24살. 그는 신권통치가 잔존했던 티베트의 최고 정치지도자였다. 1959년의 무장봉기는 어쩌다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달라이 라마의 두 형인 걀로 통굽과 투탄 노부가 미 중앙정보국(CIA)의 군수물자와 자금지원을 받아 가능했던 봉기였다.

네팔 포카라의 난민촌에서 ‘캄파 게릴라’ 출신의 노인을 만났다. 티베트-네팔 국경지대 무스탕에서 티베트 독립을 위해 싸웠던 노인은 무장투쟁을 끝내라는 달라이 라마의 연락이 무스탕에 왔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렇게 증언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항복한 다음이었다네.”

노인이 언급한 항복이란 1974년 캄파 게릴라가 무스탕으로 파견된 네팔 정부군에 항복한 것을 말한다. 티베트의 반중국 무장투쟁의 마지막으로 기록된 항복이었다. 달라이 라마와 다람살라의 망명정부가 이 무장투쟁과 무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CIA가 캄파 게릴라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후안무치한 일이다. 1998년 과 가 비밀 해제된 CIA의 공식 문서를 인용해 티베트 망명정부가 1969년까지 CIA로부터 연간 170만달러를 지원받았다고 보도하자 티베트 망명정부는 이런 사실을 시인한 바 있다. CIA는 네팔의 무스탕과 왈랑총-골라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캄파 게릴라들에게 1969년까지 군수물자와 자금을 지원했다. 달라이 라마와 망명정부는 CIA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5년 동안 무장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라마교의 ‘기도바퀴’가 그 책임을 면해주지는 못한다.

재기발랄 ‘생불’의 월드투어

그랬던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평화 노선은 1967년부터 그가 시작한 이른바 ‘월드투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는 다람살라의 망명세력에게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게릴라 투쟁은 무위에 그쳤고 중국의 문화혁명은 망명세력과 티베트가 공유하는 유일한 가치에 대한 위협이었다. 반면 당시의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와 귀족, 대지주들이 통치하던 봉노제 아래의 티베트보다 진보적이며 민중적이었다. 티베트에 남은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다람살라의 망명정부를 흠모하고 지지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이때 달라이 라마는 세계로 눈을 돌렸고, 그것으로 중국과 대결하기로 했다. 우리 불교의 탱화라 할 탕가와 만다라를 앞세운 세계 여행은 티베트에 대한 뿌리 깊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 신비주의를 고무시켰다.

어눌하지만 여하튼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 안경을 쓴 재기발랄한 ‘생불’은 신비주의적 라마교와 샹그릴라, 반공, 마하트마 간디의 이미지를 겸비하고 있었으므로, 요가와 크리슈나무르티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가 깨달은 것은 무장투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종교적 비폭력 투쟁의 유용성이었을 것이다. 그는 바티칸에서 교황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등과 회동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를 만났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정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동했다. 그 결과 달라이 라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고, 북미와 유럽에서 헤아릴 수 없는 지지자들을 얻게 됐으며, 마침내 중국의 뽑히지 않는 눈엣가시가 될 수 있었다.

의미심장한 것은 바티칸과의 적극적 교류이다. 바티칸은 달라이 라마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티베트, 봉건적 ‘신권’(神權)에 의해 통치되는 티베트의 유일한 현실태이고 달라이 라마 자신이 실현하고 있는 망명정부의 모델이다. 바티칸이란 신권 도시에서는 교황이 중세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듯이, 달라이 라마는 13만 티베트 난민들을 자신만의 신민으로 거느리고 있으며 그 실체가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망명정부이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만큼 웃기는 정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가 수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40명으로 이뤄지는 대표의회와 7개 부처로 구성된 내각(Kashag), 사법부를 두고 있어 일견 의회민주주의를 내세운 삼권 분립 구조를 취하며 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그 근간인 헌법에 해당하는 ‘망명 티베트인 헌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개헌을 막으려면 유권자 3분의2 반대해야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티베트인들에게 민주적 체제를 제안하시어…”로 시작하는 서문을 가진 이 헌법은 평화와 환경, 기타 등등의 화려한 미사여구로 범벅이 되어 있음에도 철저히 반민주적인 신권 헌법이다. 예컨대 ‘성하’께서는 언제라도 헌법을 개정할 수 있으며, 이걸 막으려면 유권자 3분의 2의 반대가 필요하다. 의회의 결정을 승인하는 것은 물론 의회를 소집하거나 연기하는 것도 그의 권한이며 심지어 해산하는 것도 그의 권한이다. 내각도 다르지 않다. 내각을 해산하거나 장관을 임명·해임하는 것도 그의 권한이다. 헌법의 개정을 승인하는 것도 그의 권한이다. 말하자면 달라이 라마의 1인 독재를 보장하는 시대착오적 헌법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입헌군주제 헌법도 이와 대적할 수 없으며 오직 바티칸만이 비교될 수 있다.

1987년 라싸에서의 항쟁을 배경으로 달라이 라마가 미국 워싱턴에서 내놓은 ‘5개항 평화계획’은 이듬해 이 계획을 실현할 구체적 제안인 ‘자치로 운영되는 민주 티베트의 창설’(Creation of self-governing democratic Tibet)로 이어졌다. 이른바 ‘완전한 자치’이다. 1989년 달라이 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 제안은 세계적 지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민주적 티베트인가? 신정이 분리되지 않고 신권이 인정되는 자치가 ‘민주’라는 이름으로 수식될 수 있을까. 달라이 라마의 완전한 자치는 핵무기의 철수와 비폭력 지대 등 평화에 대한 현란한 수사로 점철되지만 정작 그 자치가 대다수 티베트인들에게 어떤 통치가 될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어떤 자치인가? 누구에게 완전한 것인가? 달라이 라마와 망명정부가 상징하는 몰락한 신과 귀족 계급의 신권적 자치일 것이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은 피할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직진해왔다. 80년대 이후 티베트는 덩샤오핑의 시장사회주의의 그늘 아래 중국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극심한 모순의 희생자로 전락했다. 시장개방 이후 개발의 미명 아래 티베트 지역의 풍부한 광물과 가스, 삼림, 수자원 등을 수탈하는 대신 중국공산당이 티베트인들에게 돌려준 것은 빈곤과 차별이었다. 가공할 현실은 고작 4%를 차지하는 외지인 인구가 95%를 넘어서는 토착 티베트인들을 지배하는, 식민통치를 방불케 하는 지배 구조다. 농업과 목축 중심인 티베트인들의 생활은 개발을 앞세운 토지와 삼림의 수용으로 황폐화되고 있다. 대신 상하이와 베이징은 물론 홍콩과 대만 등에서 몰려든 외지 개발자본과 상업자본이 이윤을 독점한다.

또한 티베트로 이주한 한족들이 장악하고 있는 기업과 공공기관, 경찰, 군의 상부는 민족 갈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의 등장 뒤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개발과 자본의 논리가 뒤늦게 변방인 티베트로 확장하면서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방불케 하며 빚어내는 갈등이 티베트인들을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벼랑 끝으로 밀어넣고 있다. 물론 이런 고통은 중국 전역에서 대다수 노동자·농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다르지 않지만, 티베트에 이르러서는 인종적·경제적 식민화의 양상이 더욱 뚜렷하다. 그럼으로써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강화해, 결국 민족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다.

중국 ‘민족 소멸’ 목표의 역주행

중국공산당의 민족 문제에 대한 근본 인식은 ‘민족 평등은 민족 단결의 전제’이며 ‘민족 단결은 민족 평등을 실현하는 담보’라는 원칙에서 출발했다. 또한 궁극적인 목표는 민족의 소멸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시장개방 이후 덩샤오핑의 중국에서 소수민족 문제는 이 원칙을 거슬러 역주행을 거듭해왔다. 그 결과가 오늘의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사태다.

다람살라의 달라이 라마와 망명정부는 반세기를 분투하며 기다린 끝에 비로소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 아닌 티베트의 신민을 얻었다. 달라이 라마가 꿈꾸는 것은 그들을 이끌고 중세의 신권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이 꿈꾸는 세상은 중세적 봉노제의 비참한 시대가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처럼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달라이 라마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약속했지만 무위로 돌렸던 바로 그 시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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