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이후 긴밀한 관계 유지해온 미국, 사태발생 뒤의 신속한 행동이 가리키는 것은 ‘음모론’일 뿐일까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지난 7월7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동유럽 3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체코의 프라하와 불가리아의 소피아, 그리고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를 차례로 둘러봤다. 나흘간의 일정으로 모두 1만1904마일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당시 순방길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단연 첫 번째 방문국인 체코 때문이었다. 러시아와의 외교적 마찰을 불사하며 추진해온 미사일방어(MD)용 레이더기지 건설 협상이 마침내 타결된 탓이다. 이란의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처한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러시아로선 자국을 겨냥한 것이란 의심을 거둘 수 없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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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장관의 한 달여 전 행적에 주목하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다. 라이스 장관은 당시 프라하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어 순방 목적을 직접 밝혔다. 미 국무부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당시 발언록을 보면, 라이스 장관은 그루지야 방문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루지야의 영토 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확고하다. 이를 분명히 하는 게 이번 방문의 목적이다.”
라이스 장관의 문제 발언 “영토 보전”
그가 언급한 ‘그루지야의 영토 보전’은 두 가지를 뜻한다. 그루지야 동부 흑해 연안의 압하지야와 중북부의 남오세티야 문제다.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진 못했지만, 옛 소련의 몰락과 함께 압하지야는 사실상 독립국가에 준하는 지위를 누려왔다. 그루지야 정부는 압하지야를 자국에 딸린 자치공화국 정도로 여기지만, 압하지야는 이미 지난 1992년 그루지야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1년여에 걸쳐 그루지야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1994년 유엔의 중재로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압하지야의 주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소비에트 시절 그루지야에 딸린 자치주였던 남오세티야도 엇비슷하다. 1990년대 초반 그루지야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했고, 이후 그루지야군과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1992년에 이어 지난 2006년에도 국민투표를 거쳐 압도적 다수가 ‘독립’에 찬성했지만, 압하지야와 마찬가지로 국제사회는 남오세티야를 외교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라이스 장관이 ‘그루지야의 영토 보전’을 언급한 것은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가 그루지야의 일부라는 점을 새삼 강조한 게다. 그로부터 한 달 만인 지난 8월7일 밤 그루지야군은 남오세티야를 전격 침공했고, 이튿날인 8월8일 오전 러시아가 즉각 개입에 나섰다. 남오세티야 주민 상당수는 ‘러시아 여권 소지자’다.
러시아가 느끼는 포위·압박감
이제 질문을 던질 차례다. 그루지야군은 왜 8월7일 밤 남오세티야를 ‘전격’ 침공했을까? 그루지야군의 침공에 앞서 남오세티야 지역에서 사흘간 박격포탄이 날아들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평소에 비해 강도가 ‘다소’ 심하긴 했지만, 남오세티야와 그루지야 사이의 산발적인 무력 충돌은 일상이었다. 발빠르게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까지 내달린 초반 기세로 미뤄 그루지야군은 병력 증강 배치 등 침공을 위한 준비에 최소한 며칠은 공을 들였을 터다. 반격에 나선 러시아군의 이후 행보를 놓고 볼 때 러시아 역시 ‘상당한 준비’를 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루지야의 최대 동맹국은 미국이다. 지난 2003년 말 ‘장미혁명’으로 화려하게 떠올라 이듬해 초 집권에 성공한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1990년대 초반 미 국무부 초청 장학생으로 명문 컬럼비아대와 조지타운대 법대에서 수학한 ‘미국통’이다. 2005년 5월 미 현역 대통령으론 사상 처음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이 그루지야를 방문한 뒤, 트빌리시 공항으로 향하는 도로는 ‘조지 부시 대로’란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미국의 그림자는 그루지야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그루지야 정부가 이라크 파병 규모를 2천 명으로 대폭 늘린 것도 NATO 가입을 위한 명분 쌓기용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그루지야 지원은 9·11 동시 테러 직후 본격화했다. 미 국방부는 ‘테러와의 전쟁’ 지원을 명분으로 지난 2002년 4월 말 그루지야에 대한 군사지원을 시작했다. 20개월 동안 모두 6400만달러의 예산을 들여 ‘그루지야군 훈련 및 장비 제공 프로그램’(GTEP)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지금도 약 130명의 미군 군사고문단을 그루지야에 상주시키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다. 그루지야군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오세티야 침공을 감행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불을 뿜기 시작하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이라크 주둔 그루지야군 전원을 8월10일과 11일 단 이틀 만에 자국군 수송기를 이용해 그루지야로 돌려보내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음모론’의 기운이 슬며시 느껴진다. 미국의 안보·정보업체 ‘스트랫포’(Stratfor)는 8월12일 내놓은 자료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군사고문단까지 파견한) 미국이 그루지야군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남오세티야 국경 주변에 상당한 병력을 배치해두고 있다는 점을 미 정보당국이 몰랐을 리도 없다. 미 첩보위성과 무인정찰기들이 현지에서 각종 정보를 수집해왔을 터다. …물론 러시아 쪽도 그루지야군의 동태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군이 그루지야군의 남오세티야 침공을 빌미로 역공을 펼치리란 점을 미 정보당국이 예견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럼 남오세티야에서 그루지야군을 삽시간에 몰아낸 러시아가 그루지야 전역으로 전선을 넓힌 이유는 뭘까? 역시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NATO가 지나치게 확장되고 있다. 냉전이 끝난 뒤 아버지 부시 행정부와 빌 클린턴 행정부를 거치며, 미국은 옛 소련권 국가들을 NATO에 가입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1998년 폴란드·헝가리·체코가 NATO에 가입했고, 2004년엔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등 발트해 연안 3국까지 NATO 회원국이 됐다. 여기에 친미·친서방 정부가 들어선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까지 NATO 가입을 공공연히 떠들고 있다. 러시아로선 ‘포위·압박’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경고’가 필요했을 게다.
둘째, 코소보 독립을 둘러싼 논란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세르비아에서 독립을 선언한 코소보를 지지했다. 세르비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러시아로선 달가울 리 없는 일이다. 게다가 체첸을 비롯해 러시아 연방 내부에서도 다양한 분리독립 움직임이 존재한다. 러시아가 코소보의 공식적인 독립 대신, 그동안 유지해온 비공식적 자치 상태를 유지하자고 강조한 이유다. 러시아 입장에선 코소보가 독립할 수 있다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독립 역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아야 마땅하다. 한쪽의 독립은 인정하면서도, 다른 쪽의 독립 움직임에 ‘영토 보전’을 말하는 것은 누가 봐도 위선적이다.
유라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바뀌고 있다
총성은 멈췄다. 그루지야 사태는 유라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바뀌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미국은 러시아의 ‘의도’와 ‘능력’을 실감했을 테고, 러시아는 미국이 중동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미국이 약속하는 안전보장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부시 행정부가 러시아의 행태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높일수록, 이를 막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점은 더욱 도드라질 게다.
가장 큰 교훈은 누가 얻었을까? 그루지야는 물론 우크라이나와 발트해 연안 3국, 그리고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각국이다. 미국의 미사일방어망 아래로 들어가려는 폴란드와 체코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일주일여 피 흘린 그루지야는 그래서 ‘시험대’였다. ‘시험’이 한 차례로 끝나진 않을 듯해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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