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네팔공산당은 마오주의를 잊었네

등록 2008-08-14 00:00 수정 2020-05-03 04:25

무장투쟁을 벌이던 그들의 민주주의 실험… 프라찬다노선 8년 만에 제1당으로 부상해

▣ 카트만두(네팔)=글·사진 유재현 소설가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③]

조용한 히말라야의 왕국 네팔이 역사적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239년을 이어온 왕국은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섰다. 네팔의 마지막 왕 갸넨드라는 제헌의회가 소집된 직후 평민이 되어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쫓겨났다. 지난 4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예상을 뛰어넘어 제1당으로 부상한 ‘네팔공산당-마오이스트’(이하 마오이스트)는 줄곧 정국을 주도하고 있지만, 과반수 의석을 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비록 상징적 역할에 그치는 대통령이지만 7월20일 제헌의회의 간접 선거에서 마오이스트가 지지한 바란 야다브가 패배하면서, 정부 구성 일정 또한 파란을 겪고 있으며 토지개혁 등의 제도개혁 또한 험난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

그럼에도 한때 산길을 가로막고 등산객들에게 통행료를 뜯어내던 마오주의 공산반군으로 희화되던 마오이스트의 집권은 무장투쟁을 벌이던 공산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에서 21세기 공산주의 역사에 획을 긋고 있음은 변함이 없다. 20세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몰락한 뒤 개도 물어가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던 공산주의의 새로운 변화라는 점에서 이들의 미래는 성패를 떠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5월 말 제헌의회 소집을 눈앞에 둔 카트만두의 벽과 거리에는 낫과 망치가 펄럭이고 있었다. 타멜의 라인초르로(路)에 인접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자마자 시내 둘러보기에 나섰다. 나라얀히티 궁전의 철문 너머 왕실 근위병들이 영국 버킹엄의 근위병처럼 격식을 갖추어 교대를 하고 있었지만 맥이 풀린 기색이 역력했다.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하늘로 치솟은 담벼락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맞은편의 미국대사관이 왕궁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갸넨드라의 몰락에는 결과적으로 미국도 만만치 않게 한몫을 거들었다.

2001년 6월 왕세자인 디펜드라가 술과 약을 먹고 한 손엔 M16, 다른 손엔 우지 소총을 들고 람보식으로 부모형제를 도륙했다는 희대의 왕궁 잔혹극은 적어도 네팔에서는 믿는 사람이 없다. 누군가 계략을 꾸며 친중국 노선을 모색하던 비렌드라 왕을 제거한 사건이라는 것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 정설인데, 그 ‘누군가’로 거론되는 게 미 중앙정보국(CIA)이다. 물론 음모론이다. 그러나 몰살극 와중에 치트완의 별장에서 참극을 피할 수 있어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갸넨드라의 등극 이후 벌어진 일을 미국과 무관하게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갸넨드라가 왕위에 오르던 그때 미 대사관에는 ‘국방협력사무소’가 신설되었고, 비상사태를 선언한 두 달 뒤에는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이 카트만두를 방문했다. 그 직후 제공된 2천만달러의 군사원조와 군사고문단 파견을 시작으로 왕립보안군의 대대적인 병력 증강과 무기 도입이 줄을 이었다. 3만5천 명이던 보안병력이 2005년에는 10만 명으로 늘어 있었다. 마오이스트 인민해방군에 대한 토벌작전에 경찰이 아닌 군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도 갸넨드라가 왕이 되고 미국의 군사지원이 본격화되면서였다.

한편 1994년 등장해 1996년 네팔 서부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인민전쟁을 선언하고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마오이스트는 자타가 인정하는 마오주의 공산당이다. 마오주의 교과서에 따르면 인민전쟁이란 농촌을 근거로 기동전과 유격전을 펼치며 때를 기다리는 ‘지구전’ 개념이다. 지구전으로서 인민전쟁은 군사적 의미에 정치적 의미를 결합해야 완성시킬 수 있다. 군사적으로 얻어진 해방구는 정치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해방구의 인민은 스스로를 조직해야 하며, 이를 통해 인민전쟁은 인민의 권력을 창출한다. 의심할 바 없이 1996년 이래 마오이스트는 착실하게 그 길을 따라왔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왔다.

2003년 마오이스트는 인민전쟁의 마지막 단계인 ‘전략적 공세기’로의 이행을 선언했다. 해방구를 중심으로 인민정부를 구성했다. 2005년에 즈음해 네팔 전 국토의 80%는 이들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같은 해 2월 갸넨드라의 의회 해산과 비상사태 선언으로 빚어진 왕정 쿠데타는 마오이스트의 약진에 대한 위기의식의 소산이었지만 결국 자멸의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카트만두의 정당 정치세력은 물론 왕정을 지원하던 중산층까지 갸넨드라에 등을 돌렸고 왕정의 본산인 카트만두에서 갸넨드라에 대한 저항의 기운이 급속하게 무르익고 있었다. 마오주의 인민전쟁 교과서는 이런 상황을 공세기의 마지막으로 취급해 카트만두로 진공하거나 또는 아직 때가 아니므로 기회를 틈타 해방구를 넓혀 적의 피를 더욱 말리는 기회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물론 2005년 왕정 쿠데타 이후를 전략적 공세기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흔쾌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국토의 80%를 장악했고 카트만두를 봉쇄하다시피 했지만 갸넨드라의 휘하에는 미국이 지원한 최신의 군수물자로 무장한 10만의 보안병력이 버티고 있었다. 카트만두를 공격했을 때는 미국과 인도의 군사적 개입을 자초할 수도 있었다.

‘전략적 공세기’에 일방적 휴전 선언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멈추지 않는 것이 마오주의자들의 상식인데, 2005년 9월 마오이스트는 느닷없이 일방적(!) 휴전을 선언했고 11월에는 카트만두의 정당연합인 7개 정당연합(SPA)과 공화국 수립, 제헌의회 선거 실시 등을 담은 12개 항 각서에 서명했다. 물론 전술적 태도 변화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네팔공산당-마오이스트는 자신들만의 휴전을 준수하면서 역량을 카트만두에서의 반왕정 민중봉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오주의 인민전쟁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도시 봉기 전술로의 전환이었다.

이후에 벌어진 일은 더욱 기묘하다. 2006년 4월 민중봉기의 승리 이후인 11월21일 평화협정으로 마오이스트는 총을 내려놓고 제헌의회 선거를 선택했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가르쳤지 선거에서 튀어나온다고 교시한 적은 없다. 평화협정으로 마오이스트는 임시정부의 각료 자리 4개, 의회 의석 73개를 얻었지만 ‘네팔의회당’과 ‘네팔공산당-마르크스레닌연합’(이하 마르크스레닌연합)의 뒤를 잇는 제3당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또한 인민전쟁은 확실한 방기 상태였다. 협정에 따라 무기는 창고로 들어가 봉인되었고 병력은 지정된 7개 병영에 분산 수용되었다. 제헌의회 선거도 이기리란 보장은 없었다. 국제사회는 제헌의회가 실시된다고 해도 마오이스트가 승리할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다. 선거의 프로인 네팔의회당과 마르크스레닌연합은 승리를 자신했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2008년 4월의 선거에서 마오이스트는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승리는 보장된 승리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살아남는 ‘다당제’

마오이스트 대변인이며 정보통신부 장관인 크리슈나 마하라를 만난 자리에서 물었다. “선거에서 이길 줄 알았습니까?”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덧붙이기를 자신들은 인민을 믿는 정당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 물었다. “졌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더 열심히 했어야겠지요.”

“인민전쟁은 포기했단 말입니까?”

“왕정이 아니면 전쟁은 안 합니다.”

“왕정은 전쟁으로 붕괴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민중봉기로 붕괴되었지요.”

“선거로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습니까?”

“민주주의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슈나가 말한 민주주의는 ‘21세기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정식화된 마오이스트의 이른바 ‘프라찬다노선’(Prachandapath)의 바로 그 ‘민주주의’다. 2001년 2차 당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푸슈파 카말 다할의 별명을 빌린 프라찬다 노선은 인민전쟁 5년을 결산하는 자리에서 채택된 새로운 노선이었다. 사실 프라찬다 노선은 2001년 이후 지금까지 마오이스트의 지주가 되어왔으며, 앞서 적은 마오이스트의 ‘이상한 행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크리슈나의 말을 빌린다면 이렇다.

“프라찬다 노선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도그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인민이 스스로 관리함으로써 부유한 자들이 선거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21세기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21세기 민주주의는 마오이스트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제출된 것인데, 다당제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 또한 다당제 민주주의는 신민주주의 단계뿐 아니라 사회주의·공산주의 단계에서도 포기되지 않는다. 프라찬다 노선에 따른다면 20세기 공산주의가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참된 민주주의의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라찬다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왜 실패한 것일까? 왜 전체주의라는 오명을 얻어야 했을까? 21세기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선언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를 위한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지난 오류가 던져준 이 질문의 답을 구해야 하고 대담하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권력보다 소중한 것을 위한 새로운 실험

그 대안인 다당경쟁은 인민대중의 개입과 감시, 일상적인 통제를 보증하는데, 독점적·관료적 경향이라는 공산당의 고유한 속성을 억누르며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제도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는 셈인데, 2001년 채택 이후 마오이스트가 이 노선을 따라 꾸준히 걸어온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덧붙인다면 이 다당경쟁은 ‘투명하고 평등한’ 경쟁으로 인식된다.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의 ‘부유한 자들이 좌지우지하는 선거’도 이 원칙에서 어긋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미명 아래 강압적으로 보장된 공산당의 독점적 권리 또한 배척된다.

네팔에서는 그렇게 총을 내려놓고 선거를 통해 의회로 진출한 마오주의자들의 새로운 혁명이 진행 중이다. 세계는 지금 권력은 총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온다고 믿는,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라고 믿는 ‘이상한’ 마오주의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실험을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