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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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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안먼, 쓰촨 지진에 무너지다

등록 2008-06-13 00:00 수정 2020-05-03 04:25

올림픽과 대지진 사이 강력한 중화민족주의에 묻힌 항쟁 추모식과 인권, 민주주의

▣ 홍콩=엄기호 저자

며칠 계속해서 천둥번개가 치더니 다행히 오후가 되면서 개었다. 6월4일 8시(현지시각) 4만8천여 명(주최 쪽 추산, 경찰 추산 1만5700명)의 사람들이 19년 전 톈안먼(天安門) 항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 모였다. 홍콩 시민들은 “하나의 세계, 보편적 인권, 하나의 꿈, 톈안먼 항쟁 진실 규명”(同一世界, 同一人權, 同一夢想, 平反六四)을 소리 높여 외쳤다. 이 구호는 베이징올림픽의 구호인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에서 따온 것이다. 추모제는 이번 쓰촨성 대지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과 합동으로 치러졌다. 추모제에서 걷힌 모금은 전액 대지진 구호를 위해 쓰일 예정이다. 그러나 지난해에 비한다면 참석자 수도 7천명가량 줄고 열기도 좀 식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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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탄압’ 대신 ‘슬픔’으로

예년보다 줄어든 참가자 수와 내세운 구호에서 알 수 있듯 홍콩의 인권활동가들은 중국 전체를 하나로 뭉치게 한 올림픽과 대지진 사이에서 이번 추모제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일주일 전 홍콩에서 톈안먼 항쟁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는 활동가 칭을 만났을 때 그의 우려는 더욱 깊었다. “아마도 이번 톈안먼 항쟁 기념식에서는 목소리를 좀 낮춰야 할지 모른다.”

일례로 토론회에서 추모제까지 전통적으로 톈안먼 항쟁 기념행사를 주도해온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는 올해의 추모제 슬로건을 도중에 바꾸었다. 애초에 준비한 것은 ‘언론탄압이 톈안먼의 정신을 가리지는 못한다’였지만 이를 ‘희망을 가슴에 품고, 슬픔으로부터 벗어난다’로 바꾼 것이다. 중국 정부와 중국의 인권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자제하고 현재 쓰촨성 대지진으로 인한 슬픔까지 포함하는 좀더 포괄적인 구호를 선택한 셈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벌써 몇몇 단체에서는 이번 톈안먼 항쟁 기념 토론회에서 올림픽이나 티베트를 거론한다면 참가하기 곤란하다고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쪽에 연락을 해왔다. “중국뿐만이 아닙니다. 홍콩에서도 올림픽을 이야기하면 바로 사람들이 보이콧을 주장하는 것이냐고 비판합니다. 티베트 이야기도 꺼내기만 하면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냐고 비난합니다.” 토론회에서 추모제까지 역대 톈안먼 항쟁 기념행사를 주도하고 있는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린다의 말이다.

지난 5월2일 올림픽 성화가 홍콩에 도착했을 때 정의평화위원회의 활동가들이 당한 봉변은 상징적이다. 이들은 ‘인권의 약속을 지켜라. 그리고 올림픽의 정신과 평화라는 성화의 정신을 지켜라’라는 펼침막을 들고 성화를 맞이하러 나섰다. 이들은 평화와 신의를 상징하는 하얀 장미와 빨간 장미를 성화 봉송자들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순식간에 성화를 환영하러 나온 인파에 둘러싸였다. 이들은 매국노라는 소리부터 시작해 군중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경찰들은 보호를 명목으로 이들을 강제로 ‘연행’해 외딴 곳에 격리했다.

“그때 우리를 둘러싸고 항의한 사람들은 대다수 광둥어가 아닌 베이징어를 사용했습니다. 홍콩에 유학을 와 있는 본토 학생들, 그리고 홍콩 인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시위에 참가했던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가 얀얀의 말이다. 물론 이들이 성화를 보기 위해 조직적으로 홍콩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성화가 도착한 5월2일은 때마침 중국의 노동절 황금연휴 기간이었다. 홍콩 출입국관리소에 따르면 이날 홍콩으로 들어온 중국 관광객 수는 16만 명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홍콩으로 들어오는 중국인의 수는 하루 약 5만 명이다. 지난해 노동절 휴가 때 홍콩을 찾은 사람들에 비해서도 3% 많았다. 노동절 휴가를 겸해서 홍콩을 찾은 본토인들이 열렬히 성화를 맞이하고 ‘보호’한 것이다.

사실 성화 봉송을 지키려는 홍콩 당국의 지나친 단속 때문에 홍콩의 인권단체들은 이번 톈안먼 항쟁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했다. 홍콩 당국이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는 해외 인사들의 출입을 막고 강제 송환한 것이나, 티베트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이던 홍콩대 학생 찬하우만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강제로 격리한 것 등은 일국양제(一國兩制)에서 위협받는 홍콩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우려를 촉발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7월1일 직선제 쟁취 투쟁은…

실제로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우려는 항상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2003년 7월 홍콩 시민 5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베이징 정부가 추진한 ‘홍콩판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이후 홍콩 반환일인 7월1일이면 직선제 쟁취를 위한 대대적인 시위를 벌여왔다. 그러나 올해는 시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중국 쓰촨성에서 발생한 대지진 이후, 베이징 정부가 보이고 있는 ‘헌신적’인 모습에 많은 홍콩 주민들이 ‘저렇게 노력하니 좀더 시간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8만여 명의 사망·실종자를 낳은 초유의 대재앙은 ‘어려움에 처한 동포를 돕자!’는 구호 밑으로 중국인들을 단결시키고 있다.

대재앙에 처한 동포를 인도주의적으로 돕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베이징 정부에 대한 응원으로까지 이어지며 ‘중국은 강하다!’는 중화민족주의를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는 현지로 달려가 직접 잔해를 헤치며 구호 작업에 나서는 등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국과 홍콩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중화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인도주의가 인권의 문제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베이징 정부의 노력은 누구보다 더 중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고 본토의 인권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온 ‘홍콩의 양심’ 조지프 천 추기경의 마음도 움직이고 있다. 그는 지난 5월11일 이탈리아 일간지 와의 인터뷰에서 “광신적인 애국주의는 종종 극단적인 태도로 치닫는다”면서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한 이탈리아 독자들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독재의 민족주의’(nationalism of dictatorship)를 경계하자고 주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인터뷰가 지진 대재앙이 일어난 지 2주가 지난 다음 “홍콩의 주교가 중국 정부를 파시즘으로 비난했다”는 식으로 홍콩 신문에 보도되자, 천 추기경은 대지진 재앙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상황을 언급하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천 추기경은 이번 대지진에서 베이징 정부가 보여준 투명하고 헌신적이고 인간을 중심에 둔 대처는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화교조차 강력한 전파자로

“톈안먼 항쟁이 제기한 인권과 민주주의는 이처럼 인도주의와 애국주의 사이에 끼여버렸습니다.” 린다 사무국장의 말이다. 톈안먼 항쟁을 주도했던 본토의 대학생들은 이제 인권과 민주주의가 아니라 중화민족주의의 선봉장이 됐다. 이들은 ‘중국은 강하다’는 구호로 뭉쳐 중국에 대한 모든 비판을 거부하고 그것을 서구의 추악한 음모라고 비난하고 있다. 여기에 쓰촨성 대지진과 같은 인도주의적 위기가 베이징 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린다 사무국장은“더 심각한 문제는 중국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던 화교들조차 이제는 중화민족주의의 강력한 전파자가 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중국 본토에서 톈안먼 항쟁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해외 화교들은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옹호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중국의 경제성장에 따라 급속도로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게 됐고 그것이 올림픽과 대지진을 계기로 급격히 중화민족주의와 중국 정부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권 문제 제기가 곧 티베트 독립 지지와 올림픽 보이콧으로 자동 연결되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 사태의 한가운데 있는 홍콩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시름은 점점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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