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해방신학의 치열한 실험장이던 니카라과 에스텔리에서 산디니스타 지도자 로페즈 신부를 만나다
▣ 에스텔리(니카라과)=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yahoo.co.kr
‘혁명의 땅.’ 니카라과에 발을 들인 이래 혁명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겪어야 했다. 오랜 혁명의 열정은 지금 니카라과 민중의 삶을 얼마나 바꿔놨을까? 궁금증은 꼬리를 물었다. 그중 하나가 해방신학과 연관된 문제였다. 1970년대 가장 헌신적으로 니카라과 민중을 위해 싸웠던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해답을 구하기 위해 소모사 독재정권에 가장 강력하게 맞섰던 에스텔리를 찾아가기로 했다.
에스텔리에 도착한 지 며칠 뒤, 내가 발을 딛고서 숨을 들이쉬고 있는 곳이 바로 남미 해방신학의 실험대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에스텔리 교구의 하이메(50) 주임신부는 “70년대 에스텔리는 말 그대로 해방신학의 치열한 실험장이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브라질, 칠레 등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에서 해방신학에 뜻을 같이하는 가톨릭 신부들이 니카라과 북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 에스텔리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나서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민중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현직 사제가 게릴라 운동의 지도자라니!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흘렀다. 당시 해방신학을 확신하고 민중을 위해 총을 들었던 신부를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당시 함께 싸웠던 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을 만나서 수소문해봤지만, 그들도 이름만 기억하고 있지 연락이 끊어진 지는 이미 오래된 듯했다. 몇몇 신부들의 이름을 들고서 성당을 찾았다. 성당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젊은 신부에게서 ‘킬랄리’라는 온두라스 국경 부근 산악지역에 산디니스타 혁명 당시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훌리오 로페즈(68) 신부가 사역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콜롬비아 출신인 로페즈 신부는 1970년대 초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소모사 정권에 맞서 항거하던 니카라과 민중을 지원하기 위해 에스텔리로 왔다. 오랫동안 그는 민중의 투쟁을 헌신적으로 지원하면서 신뢰를 쌓아갔고, 나중에는 지도자로서 최일선에서 투쟁을 이끌었다.
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소모사 정권은 니카라과 민중의 거센 저항에 밀리기 시작했다. 곤경에 처한 불의한 권력은 민중의 편에 섰던 가톨릭 사제들까지 살해하기 시작했다. 1978년엔 에스텔리 성당에서 로페즈 신부와 함께 사역하던 프란시스코 에스피노사 신부가 자신의 사역지인 콘데사로 가던 길에 소모사의 군인들로부터 총격을 받아 운전기사와 함께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부터 로페즈 신부는 수녀원으로 도피해 수녀들의 보호를 받았고, 항상 신도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내야 했다. 나중에 소모사 정권은 에스텔리의 상징인 성당마저도 전투기를 동원해 폭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튿날 로페즈 신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에스텔리 성당을 다시 찾았다. 마침 성당은 부활절 준비로 한창 들떠 있었다. 꽃 장식을 하고 있던 60대의 여성에게 로페즈 신부에 대해 물었다. “70년대 훌리오 로페즈 신부가 어떻게 에스텔리의 민중을 도왔느냐”고 묻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가 이내 거침없이 말했다. “그저 도왔다는 말은 당치 않다. 로페즈 신부님이 당시 이곳 산디니스타 운동의 지도자셨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현직 사제가 게릴라 운동의 지도자라니.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바로 그분이 에스텔리 산디니스타 운동의 지도자”라는 말은 성당을 빠져나온 뒤에도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신부로서 산디니스타 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했을 것이란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진 탓이다. 북부 산악지역으로 로페즈 신부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킬랄리로 가는 길을 묻자 주민들은 “버스로 거의 7시간이 걸리는 외진 곳”이라며 “게다가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해 원주민들도 가기를 꺼린다”고 입을 모았다.
다음날, 험난한 여행길을 각오하고 있던 터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로페즈 신부가 부활절 기념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에스텔리 성당으로 온다는 소식이었다. 며칠 동안 꼬박 에스텔리를 떠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손꼽아 기다리던 부활절 주간 목요일이 다가왔다. 이날 아침부터 각지에서 온 신부들이 속속 성당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헤어진 지 몇십 년 된 옛 친구의 변한 모습을 먼 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애태우며 기다리는 심정으로 로페즈 신부를 기다렸다.
그는 다른 신부들이 모두 도착해 미사 준비를 마친 뒤에 가장 늦게 성당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자동차로 먼 길을 달려왔지만, 예정 시간보다 거의 5시간이 지체됐다고 한다. 그가 도착하자 에스텔리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서 손을 잡고 부둥켜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대부분은 이미 머리가 허옇게 새버린, 70년대 당시 함께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에스텔리 주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신부님”이라고 곁에 있던 60대로 보이는 주민이 말했다. 성당에서 꽃꽂이를 하던 60대 여성의 말처럼 그는 너무도 겸손한 ‘혁명의 지도자’이자 한없이 부드러운 ‘민중의 아버지’였다.
에스텔리 성당 사제관에서 훌리오 로페즈 신부와 마주 앉았다. 부드러운 말투에선 정감이 넘쳤지만, ‘투쟁의 시대’를 말할 때는 여전히 단호함이 느껴졌다. 로페즈 신부에게 니카라과 혁명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물었다.
1970년대 당시 직접 총을 들고 싸웠다는 말을 들었다.
=총을 들고 직접 전투를 하진 않았다. 간접적으로 도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당시 변화를 원하는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니카라과의 젊은이들이 영문도 없이 학살당하고 있는데, 그저 앉아서 기도나 하고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기도를 안 한 건 아니다. 바삐 움직이면서도 기도는 빼놓지 않고 했다. (웃음) 당시에는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다. 사제의 직분을 교회에 가둬둘 만한 여유가 없었다.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민중을 도와야 한다. 사제로서 그 믿음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니카라과 혁명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
=당시 우리 신부들은 니카라과의 진정한 변화를 원했다. 소모사 정권에 맞선 민중의 혁명적인 투쟁에 함께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체험했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투쟁 과정에서 민중이 혁명가로 변하는 것도 지켜봤고, 그들을 통해 세계가 변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당시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민중의 편에 서서 변혁을 원한다는 신앙고백을 했다.
소모사 정권 때 니카라과 민중의 삶은 어땠나.
=당시 민중은 그야말로 최악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헐벗고 굶주렸던 것은 물론이고, 소모사 정권은 민중에 대한 교육을 아예 방기했다. 당연히 대다수의 민중은 제대로 글을 읽고 쓰지도 못하는 문맹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렇지만 희망도 가장 컸던 시절이다. 민중은 자발적으로 에스텔리에서 공동체를 대표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투쟁했다. 즉, 소모사 정권이 한 번도 실행하지 않았던 민주주의를 민중 스스로 조직하고 체험해나갔다. 교회에서도 이들의 투쟁을 지지했고, 물질적·영적으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에는 모두 반소모사 정권 운동에 나선 상태라 신이 났었다.
투옥되거나 살해된 성직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나와 함께 에스텔리에서 활동했던 프란시스코 에스피노사 신부가 에스텔리에서 약 20km 떨어진 콘덴사로 사역하기 위해 가던 중 소모사 군인들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에스피노사 신부는 농업기술을 가르치던 농업 전문가이자,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던 성직자였다. 소모사 정권의 군인들은 그가 가톨릭 사제인 줄 알고 있었고, 그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뻔히 알고 있었다. 부패하고 불의한 군사정권은 농민들에게 농사 기술을 가르쳐주던 무고한 성직자까지 살해했다.
많은 사제들이 산디니스타 게릴라들과 함께 산에서 생활하면서 소모사 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나 역시 산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들이 머무는 산으로 필요한 음식물이나 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리고 코스타리카의 국경 부근의 전선에 가서 지원하는 활동도 벌였다. 당시에 많은 에스텔리 출신들이 니카라과 남부지역 코스타리카 국경지대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신부로서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물질적·영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얼마나 지냈나?
=8개월가량 함께 지내면서 지원활동을 했다. 그 뒤 에스텔리로 돌아왔는데 소모사 정권이 나를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렇다고 활동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수녀원에 숨어 지내며 비밀스럽게 계속 물질적으로 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화제를 바꿔보자.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해방신학이 이룬 성과는 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남미에서 해방신학이 꽃을 피운 초기부터 엄청난 결과를 낳았고 수확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해방신학이 그 모든 성과를 이끌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당시의 해방신학이 가졌던 영향력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게다.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은 예수의 고난과도 유사하고, 예수의 부활은 곧 민중의 부활이었다.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된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착취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하는 현실에서, 변혁만이 하나님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고백한 것이 당시의 해방신학이었다. 고통받는 민중이 우리 곁에 있는 한 해방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사제로서 투쟁에 나서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었나?
=70년대 중반에 모든 주교들이 한곳(콜롬비아)에 모여 회의를 한 적이 있다. 주교들은 당시 주로 니카라과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니카라과 사회의 정의와 노동자들의 권리, 교회의 역할 등을 논의했다. 당시 주교회의는 중남미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적인 역할을 반성하고 성찰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누구나 무엇인가를 위해 투쟁하길 원했고 모두가 하나된 상태였다.
산디니스타 혁명운동을 통해 무엇을 변화시키려 했는지, 또 무엇이 실제로 변했다고 보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자신 있게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든다면, 소모사 정권에서는 도저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일반 선거제도를 통해 정권의 변화를 가져온 일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획득이 가장 큰 성과란 말이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켜야 할 핵심적 가치이며 이를 바탕으로 변화도 따라야 한다고 본다.
어떤 때는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이 부정적인 결과를 내는 경우도 있고 긍정적인 결과는 내는 경우도 있다. 혁명을 위한 전쟁 중 우리는 나름대로 많은 기대를 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서 이겼음에도 기대했던 것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승리의 열매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것은 분명 뼈아픈 일이다. 좀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가 니카라과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평가될 수 있지만, 여전히 변화의 와중에 있는 것도 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한 것은 물질주의적 변화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권력에 대한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다. 수많은 공약이 남발됐지만 제대로 지켜진 것은 없고, 모두 개인적인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나라와 민중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경향이 지배하는 풍조도 지난날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직접 총을 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당시 총을 들고 전투에 나선 사제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당시 많은 사제들이 총을 들고 정부군에 맞섰다. 스페인에서 온 가스파 가르시아 신부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나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고 전장에서 지휘관으로 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의 전투를 이끌기도 했다. 결국 1978년 전투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헌신적인 투쟁은 언제나 존경하고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신부는 총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은 총보다 강하다고 믿는다. 당연히 신부가 총을 들고 싸우는 데는 반대한다. 하지만 총을 드는 것은 개인적인 결정이며,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총을 들고 투쟁했던 동료 신부들을 결코 단죄할 필요도 없고, 단죄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함께 같은 시대를 거쳤던 나로서는 그들이 총을 들어야 했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의 무장투쟁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모사 정권이 민중을 학살하고 인권을 유린하던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저항이나 투쟁도 용납될 수 있었다.
현재 니카라과가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바꿔가야 한다고 보는가?
=현재 니카라과에선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극단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극단주의야말로 니카라과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라고 생각한다. 극단주의는 모두를 파괴로 몰아갈 뿐 사회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극단주의는 니카라과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이런 상태가 제대로 정리돼야 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착돼야 한다.
혁명 뒤에도 같은 역사가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그중 하나로 사회적 정의, 곧 분배와 빈부격차 문제는 혁명 뒤에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도 민중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지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절망적이지만 그렇다고 앉아서 한숨만 쉴 순 없는 노릇이다. 예전처럼 교회가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지만, 여전히 투쟁을 해야 한다고 본다.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해야 하고, 생명을 존중하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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