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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공장 주인 ‘소유’예요”

등록 2008-02-15 00:00 수정 2020-05-03 04:25

파키스탄 ‘빚노예’의 가혹한 노역 실태, 폐지법 도입 뒤 16년 흘렀지만 여전히 170만여 명 채무노동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빚을 갚지 못해 빚 준 사람의 노예가 됨.’ 인류사에 한때 존재했던 ‘채무노예’(이하 빚노예)를 일컫는다. ‘한때’라고 표현한 것은 빚노예가 이미 사라졌다고 믿은 까닭인데…. 아니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2005년 4월 ‘세계 강제노동 최저 추정치’란 제목의 보고서를 내놨다. ILO가 강제노역 피해자 규모를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낸 것은 이 보고서가 처음이다. 보고서는 지구촌 곳곳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는 인구가 최소한 1230만여 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구체적으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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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12살 소년

우선 국가나 군사조직 등이 동원한 강제노역자가 전체의 20%(249만여 명)에 이른다. 나머지 80%(981만여 명)는 민간 차원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는 얘기다. 각종 성매매에 강제 동원된 남녀노소가 전체의 11%(139만여 명)로 나타났고, 그 밖의 경제적 착취를 당하는 강제노역자가 전체의 64%(781만여 명)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빚노예는 이 부류에 속한다.

강제노역이 가장 빈번한 곳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나타났다. ILO는 보고서에서 이 지역 일대에서만 약 950만 명이 강요된 노동에 허덕이고 있다고 추정했다. 강제노역 피해자 10명 가운데 8명가량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몰려 있다는 얘기다. 또 이 일대엔 전세계 인신매매 피해자 245만 명 가운데 136만 명이 몰려 있다고 ILO는 추정했다. 인터넷 대안매체 이 지난 1월21일 파키스탄발로 전한 기사를 보면, 이런 상황은 지금껏 바뀐 게 없어 보인다.

“6살 때부터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다. 학교엔 가본 적도 없다. 더 어렸을 땐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 우린 이 벽돌공장 주인이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날 수도 없다.” 12살 난 살라마트 아메드는 파키스탄 제2의 도시인 펀자브주 주도 라호르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세이크후푸라의 한 벽돌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을 한다. 벌써 6년째니 ‘숙련공’이라 부를 만하다. “가마에 벽돌을 넣는 소년의 손은 온통 화상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고 은 전했다.

파키스탄 정부가 빚노예폐지법을 도입한 건 지난 1992년, 벌써 16년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은 ILO의 자료 내용을 따 “파키스탄엔 여전히 170만여 명의 빚노예가 존재한다”고 전한다. 어린 아메드의 부모와 삼남매 등 일가족은 어떻게 빚노예가 됐을까? 은 파키스탄인권위원회(HRCP) 관계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우선 공장주가 급전이 필요한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미리 내준다. 급여 수준이 워낙 낮기 때문에 급전을 끌어다 쓴 노동자들은 이를 쉽게 갚지 못한다. 다 갚는 데 여러 해가 걸리는 게 보통이다. 빚을 갚지 못했으니, 당연히 그 기간엔 공장을 떠날 수도 없는 신세인 게다.”

애초 끌어다 쓸 수 있는 ‘급전’은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가족의 수와 비례한다. 아이들까지 고된 노동에 동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빚노예 생활을 하루빨리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의 노동은 계속돼야 한다. 빚노예의 악순환이다.

펀자브주를 중심으로 파키스탄 전역에 산재한 크고 작은 벽돌공장은 무려 6천여 곳에 이른단다. 지난 2003년 ILO의 요청으로 실태 조사를 벌인 파키스탄노동교육연구소(PILER)는 아메드 일가족처럼 벽돌공장에 묶여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이들이 50만 명을 넘어선다고 밝혔다. 연구소 쪽은 당시 펴낸 보고서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빚노예의 절반가량은 여성과 어린이”라며 “10~14살 어린이는 흙으로 벽돌을 만들고, 14~17살 청소년은 이를 가마에 넣어 굽는 작업을 한다”고 전했다. 아이들의 여린 손이 파키스탄 벽돌산업의 근간인 게다.

절반가량은 여성과 어린이

“딸아이를 석 달 정도 학교에 보냈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선 그 아이도 일을 해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주해왔다는 와지르 칸(32)은 과 한 인터뷰에서 “만들어내는 벽돌 수에 따라 급료가 달라지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일을 해야 한다”며 “아이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수입이 떨어져 굶주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0살 난 딸과 8살·7살 난 아들, 그리고 부부가 함께 한 달 내내 벽돌을 만들어 버는 돈은 고작 50달러(약 4만7천원) 안팎이란다. 빚노예, 그 가혹한 노역의 사슬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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