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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고문 우려국’ 지정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캐나다 정부의 우발적으로 법정에 제출한 ‘매뉴얼’에 이스라엘·아프가니스탄·중국·이란 등과 함께 이름 올려져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미국 방언협회는 지난해 12월 초 ‘2007년 올해의 단어’로 ‘서브프라임’(비우량주택담보대출)을 선정했다. 이 낱말과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인 단어 가운데 ‘워터보딩’도 끼어 있다. ‘스노보딩’은 보드를 타고 눈밭을 가르는 레저스포츠다. 그럼 ‘워터보딩’은 보드를 타고 물살을 가르는 신종 레포츠일까? 는 지난해 12월7일 미 중앙정보국의 가혹행위 관련 의혹을 폭로하는 기사에서 ‘워터보딩’을 이렇게 묘사했다.

“경사진 나무 판자 위에 머리가 아래쪽을 향하게 죄수를 거꾸로 눕혀놓고, 얼굴에 물을 계속 뿌려 숨을 쉬지 못하도록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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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 ‘워터보딩’, 일명 물고문

이런 걸 대체로 ‘물고문’이라고 부른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물을 이용해 질식을 유도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미국에선 ‘워터보딩’을 고문으로 인정하느냐 여부를 놓고 지난해 격한 논쟁까지 벌였다. 논쟁의 불씨는 2008년 미 대선전까지 이어져, 버락 오바마·존 매케인 등 민주·공화 양당 후보 가운데 일부는 ‘고문’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공화당) 같은 이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줄리아니 전 시장은 지난해 10월 말 아이오와주 대븐포트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대로라면 ‘고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언제, 누가,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왜 ‘워터보딩’을 하는지에 따라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부 교도소에서, 쿠바 관타나모의 포로수용소에서, 미군이 수감자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정황증거는 여러 해 동안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그럴 때마다 “돌출 사건일 뿐, 미국 정부는 고문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고 반박해왔다. 국제사회도 부시 행정부의 ‘고문’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진 않아왔다. 한데, 조금 다른 상황이 캐나다에서 벌어졌다.

은 지난 1월18일 캐나다 외교부 내부 문건을 입수해 “캐나다 정부가 미국과 이스라엘을 고문 우려국에 포함시켰다”고 폭로했다. 통신이 입수한 문건은 캐나다 외교부가 소속 외교관들에게 “고문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매뉴얼” 가운데 일부 내용으로, 미국·이스라엘과 함께 아프간·중국·이란·멕시코·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 등이 ‘고문 우려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는 ‘매뉴얼’ 내용을 따 “미 당국이 자국 안팎에서 운영하는 수용시설에서 수감자들에게 잠 안 재우기, 장기간 독방 감금, 알몸 조사 등의 가혹행위를 가한다”고 전했다. 기실 이같은 내용은 이미 여러 차례 미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알려진 바다. 그럼에도 데이비드 윌킨스 캐나다 주재 미국 대사는 〈B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미국을 이란이나 중국 같은 나라와 함께 ‘고문 우려국’으로 지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흥분했다.

재밌는 것은 ‘매뉴얼’이 공개된 과정이다. 세계적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AI) 캐나다 지부와 브리티시컬럼비아인권협회(BCCLA)는 현재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소송의 뼈대는 이렇다. ‘아프간에 주둔하고 있는 캐나다 병사들이 사로잡은 테러 혐의자를 아프간 당국에 인계할 경우, 이들은 고문을 당할 우려가 있다. 그러니 이들을 아프간 당국에 계속해서 넘길 경우, 캐나다 정부는 사실상 고문을 방조하는 셈이 된다.’ 이 소송과 관련해 캐나다 정부가 ‘우발적’으로 법정에 제출한 서류에 ‘매뉴얼’이 끼어 있었단다.

부정해온 가혹행위, 고문 방식에 포함돼

‘매뉴얼’에서 미 당국이 사용하는 것으로 지적된 고문 방식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유일한 캐나다인인 오마르 카드르가 그동안 여러 차례 증언한 내용과 일치한다. 그동안 캐나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카드르가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버텨, 인권단체의 반발을 사왔다. ‘매뉴얼’ 공개로 캐나다 정부는 곤혹스런 처지에 몰리게 됐다. 그래서일까?

“미국과 이스라엘 같은 긴밀한 동맹국이 수용시설에 갇힌 수감자에게 고문을 할 우려가 있는 나라로 잘못 분류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캐나다 일간 은 1월19일 맥심 버니에르 캐나다 외교장관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버니에르 장관은 이어 “(‘매뉴얼’은) 정책 관련 문서도 아니고, 캐나다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반영한 것도 아니다”라며 “이미 내용을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덧붙였다. ‘워터보딩’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공식 입장’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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