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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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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한 건 불륜만이 아니다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지난해 말 〈CCTV5〉 기자회견 중 벌어진 후쯔웨이의 깜짝쇼, 그는 왜 대국의 자격·양심까지 거론했나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리안 감독의 영화 를 보고 난 뒤 “세상에 이럴 수가!”를 외쳤다. 그 ‘야함’에 흥분하는 내게 친구가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라며 들려준 내용이다. 대만에서는 어떤 커플들이 영화를 그대로 따라하다가 두 쌍이나 쇼크사를 했단다. 물론 사실 여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전혀 엉뚱한 얘기긴 하지만 정말로 나도 모르게 “세상에 이럴 수가!”를 연거푸 외친 ‘실화’가 터졌다. 그런데 이건 ‘믿거나 말거나’ 한 그런 얘기가 아니고, 영화는 더군다나 아니다. 텔레비전 생방송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아마도 중국 내 바람둥이 남편들이 봤더라면 여러 명 족히 ‘쇼크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생방송 도중 마이크를 빼앗고 외치다

새해를 사흘 앞둔 지난해 12월28일 오후 3시께, 원래 스포츠 채널인 〈CCTV5〉를 2008년 1월1일부터 9월9일까지 한시적으로 올림픽 전문 채널로 바꾼다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기자회견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타고 있었다. 이날 기자회견 사회자는 〈CCTV〉의 스타급 아나운서이자 스포츠 전문 해설가인 장빈이었다. 그런데 한창 생방송 도중 갑자기 무대 위로 한 여성이 튀어나왔다. 그는 장빈의 손에서 마이크를 뺏은 뒤 이렇게 외쳤다.

“오늘은 올림픽 채널에도 특별한 날이지만, 저와 장빈에게도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2시간 전에 저 말고도 장빈이 다른 여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연말 특집 ‘깜짝쇼’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건 ‘쇼’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난’도 아니었다. 하긴 중국이 어떤 나라인데 〈CCTV〉 생방송 도중 그런 ‘쇼’를 기획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올림픽 채널을 홍보하는 생중계 도중에 말이다. 아마도 이번 사고는 〈CCTV〉 개국 이래 터진 최대 방송사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데 방송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사회자 장빈의 부인이자 의 간판 아나운서인 후쯔웨이였다. 이날 후쯔웨이는 자신의 남편 장빈을 “겉 다르고 속 다른 색광”이라며 그의 불륜 사실을 중국 전역에 생중계해버렸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제아무리 날고 기는 바람둥이라도 이렇게 ‘독한 마누라’한테 걸리면 정말 인생 ‘끝’을 구경하는 수가 있는 게다.

상황이 이쯤 되니 물가폭등이니 긴축재정이니 해서 썰렁하고 재미없던 연말, 중국인들의 연말연시 밥자리·술자리 화제가 갑자기 풍성해졌다. 인터넷은 더 난리가 났다. 인터넷 채팅방에 접속하니, 평소 자주 수다를 떨던 중국인 친구들이 흥분 일색이다. 그중에는 후쯔웨이와 같은 방송사에 근무하는 동료 기자도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 반응이 사뭇 색다르다. 대화 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식이었다.

친구: 너 장빈 사건 알지?

나: 모르면 간첩 아냐.

친구: 넌 어떻게 생각하냐?

나: (잠시 당황) 후쯔웨이도 원래 유부남이었던 장빈을 집요하게 꼬여서 이혼시키고 재혼한 거라며. 이번에는 자기가 당한 거 아냐. 그리고 장빈 그 남자 바람 피우다 들킨 게 한두 번이 아니라며. 근데 생방송에까지 나와서 그렇게 막 나갈 필요가 있었을까?

친구: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런 통속 드라마 같은 내용 말고 후쯔웨이가 폭로한 말 중에 뭐 다른 인상적인 건 없었어?

나: 후쯔웨이가 또 무슨 말을 했는데?

친구: 바보! 후쯔웨이가 그랬잖아. 프랑스 전 외교부 장관이 했다면서 인용한 말. 남편 외도 사실을 폭로하는 자리에서 왜 그런 말을 꺼냈겠어? 우린 이미 다 눈치 챘어. 후쯔웨이가 폭로하고 싶었던 건 남편의 불륜 사실만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나: (갑자기 얼떨떨) 그게 뭔데?

‘골판지 만두’ 보도 관련자

인터넷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보니, 과연 그 친구 말대로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몇 가지 의문의 말들이 있었다. 당시 후쯔웨이는 남편의 외도 사실을 폭로하는 말 외에도 이런 말들을 했다. “내년에는 올림픽이 열리는 해입니다. 전세계인들이 중국을 주목하겠지요. 하지만 프랑스의 한 외교부 장관이 이런 말을 했어요. ‘중국이 가치관을 수출할 수 있기 전에는 대국이 될 수 없다’고요. 우리 앞에서 이렇게 도덕군자인 체하는… (말소리 잘 안 들림) 당신들은 도대체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이야! (중국이) 대국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은 멀었어!”

남편의 외도 사실을 폭로하는 지극히 통속적인 자리에서 그는 왜 고상하게 프랑스 외교부 장관이 했다는 말까지 들먹이며 ‘가치관’과 ‘대국의 자격’을 운운했을까? 그리고 남편만이 아닌 ‘당신들의 양심’까지 들먹였던 걸까? 드러난 사실에 상상력을 보태 해석해보면 이렇다.

후쯔웨이는 ‘깜짝쇼’를 벌이기 2시간 전에 남편 장빈이 다른 유명 아나운서와 외도를 하고 임신까지 시킨 사실을 알았다. 그 뒤 순간적인 분에 못 이겨 남편의 생방송 무대를 잠시 ‘점령’한 채 그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여기까지는 삼류 통속 드라마다. 하지만 그녀는 내친김에 또 한 가지 억울한 맘을 털어놓고 싶었다. 바로 지난해 중국 안팎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부른 ‘골판지 만두 사건’에 관한 일이다. 후쯔웨이는 그 사건에 연루된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사건이 터진 뒤 방송사에서 거의 해고되다시피 했다.

골판지 만두 사건은 의 간판 고발 프로그램에서 내보냈던 것으로, 베이징 내 한 시장통 만두가게에서 골판지로 만든 가짜 만두가 팔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가짜 만두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때마침 중국은 전세계에서 장난감·약품 등의 리콜을 당하는 등 자국산 불량 제품 문제로 수모를 당하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가짜 만두 사건까지 터졌으니, 올림픽을 치르겠다는 ‘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게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건은 제작팀의 조작으로 결론이 났다. 없는 사실을 조작해낸 죄로 관련자 전원이 엄벌에 처해졌는데, 그중 1명이 후쯔웨이다. 후쯔웨이가 ‘윗분’들에게 밉보인 건 만두 사건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제작하던 프로그램에서 중국의 국민기업으로 일컫는 하이얼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중국 언론매체로서는 좀체로 하기 힘든 용감한 고발을 하기도 했다. 이 보도를 둘러싸고 그가 ‘보이지 않는 손’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결국 골판지 만두 사건 이후 후쯔웨이는 방송인으로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역시 방송가를 떠도는 소문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만두 사건은 ‘절반은 사실이었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있다. 원래 그렇게 가짜 만두를 파는 집들이 있었는데, 취재 당시 현장에서 재료를 사다가 재현했을 뿐이라는 얘기다. ‘완전 조작은 아니었다’는 내부 항변도 있었고, 관련자들도 ‘몸통이 아닌 꼬리만 잘랐다’는 불만에 찬 목소리들이 많았단다.

고상하고 철학적인 ‘폭로’

어찌됐든 후쯔웨이는 다시 한 번 ‘영웅’이 됐다. 바람둥이 남편들에게 또는 ‘도덕군자인 체하는 색광’들에게, 그는 멋지게 한 방 날렸다. 게다가 프랑스 외무장관의 말까지 인용해가며 누군지 모르는 ‘당신들’에게 ‘가치관을 수출할 수 있는 대국이 돼라’고 충고까지 했으니, 남편의 외도 사실 폭로치고는 꽤나 고상하고 철학적인 ‘폭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겉은 도덕군자인 체하는 바람둥이 색광들이여! 쇼크사하기 전에 한 번쯤 그의 외침을 새겨들으시라. “당신들은 도대체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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