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과 개혁 21년, 경제발전의 뒤안길에 버려진 사람들을 안아줄 사회주의 정책은 어디에
▣ 호찌민·하노이(베트남)=글·사진 하재홍 전문위원 vnroute@naver.com
“한 달 14일, 한 달 14일….”
후인마이의 어머니는 대화 틈틈이 ‘한 달 14일’이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한 2~3년만 한국에서 돈을 모으면 부모님 고생도 덜어드릴 수 있고, 두 동생도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인과의 결혼을 부모에게 간청했던 스무 살 효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모 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자기 삶을 담보로 후인마이가 세워두었던 ‘2~3의 계획’은 불과 한 달 14일 만에 ‘뼈아프게’ 부서져버렸다. 딸의 부러진 갈빗대 열여덟 개 못지않게 한 달 14일이란 시간 또한 어머니의 가슴에 한스러운 피멍으로 맺혔다.
한 달 14일 만에 죽어 돌아온 딸
후인마이가 고향에서 살아 생전 보아온 건 날품팔이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끼니 걱정에 학교 구경도 6학년까지밖에 못한 두 동생, 그리고 야자수 초막집 앞을 흐르는 메콩강이었다. 후인마이는 7학년(중1에 해당)을 마치고 집안일을 돕다가, 15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났다. 박리에우성 소재 수산물 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4년을 일하고, 호찌민시 근교 빈즈엉성의 목공예 공장에서 1년을 일했다. 공장에서 받은 월급은 30만~50만동(약 2만~3만원), 자신의 생활비로 일부를 쓰고 가족에게 나머지 전부를 보냈다.
하지만 5년간의 공장 생활이 자신이나 가족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걸 절감했다. 이때 후인마이의 눈에 들어온 건 두 동생. 동생들이 학업을 통해 본인과 가족의 삶을 바꾸지 못하는 한,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나올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가족의 가난을 구제해보려 택한 게 한국행이다. 하지만 그의 반려가 되어준 이는 그가 마지막 남긴 편지의 표현대로 ‘하느님의 장난’ 같은 반지하 단칸방 셋방살이 일용노동자였다. 한국에서 보낸 한 달여, 남편에게 두들겨맞는 것보다 더욱 서러운 것은 무참하게 깨져버린 꿈이었다.
“베트남에 돌아가게 된다면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한국인 남편을 향한 애원의 편지가 남편의 가슴에는 가 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 가족에게 유언장이 되어버린 후인마이의 편지는 메콩강 위에 눈물로 흩뿌려졌다.
물의 나라. 아홉 갈래의 메콩강을 품고 있는 베트남 남부 13개 성은 찻길보다 물길의 수가 더 많다. 그야말로 강물의 제국이다. 거미줄처럼 천지사방으로 퍼진 샛강은 농토의 젓줄이 되어 1년 3모작의 풍성한 결실을 맺어준다. 이곳 주민들의 새벽은 강물에 뛰어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강물 속에서 목욕과 용변을 동시에 해결한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은 배를 타고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배를 띄워 고기 그물을 거둔다. 주민들 대부분이 반농반어로 살아가기에 오랜 옛날부터 가족 단위의 자급자족이 완벽하게 가능했다.
지금은 자급자족을 훨씬 능가해, 베트남 국토의 10%에 불과한 메콩강 일대에서 생산해내는 농산물이 베트남 전체 농산물 생산량의 50%에 이른다. 그렇지만 중부와 북부보다 훨씬 천혜의 조건을 갖춘 남부 메콩강 일대는 자연의 풍요가 오히려 끝없는 가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독한 역설이다. 땅속 2~3m만 파 들어가도 물이 샘솟아, 건물을 올리려면 토목공사비가 많이 든다. 도시가 형성되기 어렵고, 물류 이동이 쉽지 않아 공단도 조성되지 않는다. 이들이 고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농어업, 가난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려 하면 메콩강 풍경의 일부가 돼 태평을 누릴 수 있지만, 가난이 지겨워지는 어느 한순간엔 메콩강을 매정하게 등질 수밖에 없다.
후인마이가 죽고, 맞선 현장에서 예비신부 20명의 옷을 발가벗겼다는 흉흉한 뉴스가 돌아도, 메콩강 처녀들의 한국·대만인과의 결혼 행렬은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없다. 이들이 메콩강에서 배운 삶의 법칙은 굽이치는 세월의 강에 그저 몸을 맡겨보는 것이다. 도중에 어느 샛강으로 접어들고 어디에 당도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루터에 마냥 앉아 있는 것보다는 우선은 지나는 배를 잡아타는 게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통일 후 10년, 실패의 연속
돈을 찾아 도시로 몰려온 메콩강의 젊은이들은 공장으로, 상점으로 혹은 노점으로, 부잣집 가정부로 나선다. 그중 몇몇은 매매춘 업소에까지 발을 들인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금의환향의 차편을 손에 쥐지 못한다. 소득의 상당 부분을 월세와 공과금으로 떼어내고, 나머지로 입에 풀칠 좀 하고 나면 푼돈이 겨우 남는다. 저학력의 단순노동으로는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만이 고스란히 반복될 뿐이다.
거리로 나가 껌을 팔고 꽃을 팔고 야자수를 팔고, 신문을 팔고 복권을 팔고, 구두를 닦아도 따뜻하게 눈길 한 번 마주쳐주는 이 없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맨밥에 나물 몇 가닥 얹어 밥을 먹으면,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혹시나 싶어 물건을 들이밀면 관광객들은 손사래를 치며 가던 길로 가버린다. 어디에선가 나타난 경찰은, 노점 물품을 압수하고 경찰서로 데려가 벌금 딱지를 떼어주며 일장 훈시를 한다.
가난에 신물이 난 몇몇은 모험을 한다. 소매치기, 날치기, 오토바이치기가 되고, 그러다 어느 날 마약을 해본다. 마약에 취한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는 이들을 범죄자라 단죄하고 최대한 오래오래 사회 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메콩강 위를 떠다니는 수상식물 부레옥잠처럼, 도시로 나온 청춘들 또한 그저 어딘가를 정처 없이 떠돌게 될 뿐이다.
사회주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실험 중’이다. 1975년 남북 통일 이후 10년간의 ‘국가계획경제’ 정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삶을 위해 정책이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위해 삶이 꿰맞춰진 탓이다. 어느 것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 공장은 목표 생산량만 달성하고 나면 더 이상 일할 이유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초과생산을 한 경우엔 물건들을 남몰래 모두 버려야 했다. 국가에서 정한 물건 가격과 실거래 가격의 차가 너무 컸다. 물건을 팔아야 할 때는 거저 주는 듯이 팔고, 사야 할 때는 몇 배 가격을 물고 사야 했다. 전 국민이 밀거래상이 되고, 공무원들은 그 상황을 이용해 막대한 뒷돈을 챙겼다.
유통망이 제대로 돌지 않아서 많은 공장들이 생산 물품을 월급 대신 지급하기도 했다. 모자 공장은 모자를, 신발 공장은 신발을, 전구 공장은 전구를 직원에게 나눠주었다. 그걸 받은 직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식량 배급이 불안정했기에 농민들은 자신이 생산한 쌀을 몰래 숨겨두어야 했는데, 숨겨놓은 쌀은 쥐들이 반 이상을 파먹었다. 식량 배급이 쌀 대신 밀가루·감자 등으로 대체되다가, 그것마저도 점점 드문드문 이어지는 상황으로 몰렸다. 모두가 기아의 수렁에 빠졌다. 노동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한 사회주의의 이상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평균 소득 이상, 학교 보내기 힘들어
그렇게 배급 시절의 굶주림은 전쟁 시절보다 훨씬 심했다. 10년간의 정책 실험에서 혹독한 교훈만 얻게 된 정부는 생산력 향상을 위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새로운 방식의 실험은 기대한 대로 경제성장을 안겨주었고, 우려한 대로 사회 양극화를 빚어냈다. 경제성장과 사회 양극화 해소, 사회주의 국가라면 동시에 쫓아야 할 두 마리 토끼였지만, 국가 운영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의 토끼가 더욱 탐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베트남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법률을 정비하고 다각도의 지원대책을 수립하고 수많은 인재를 배치했지만,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국민에게 ‘서로 돕기 운동’을 촉구했다. 지방 관료에게 빈민에 대한 ‘관심’을 당부하거나, 유엔 등 국제사회에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실효성 있는 대책은 좀처럼 만들어내지 못했다. 성장을 통해 축적한 부를 어떻게, 어느 정도, 어디에 쓸 것인지 정책과 예산으로 구체화되고 가시화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것이 빈민들의 손에 희망의 열쇠로 쥐어지기까지, 기다림을 못 이긴 가난한 이들은 하나둘 땅속에 누워버렸다.
베트남 제1의 경제도시로, 소득수준 1위인 호찌민시 역시 가난의 일상이 거리 곳곳에 펼쳐져 있다. 호찌민시의 1인 한 달 평균 소득은 2006년 기준으로 155만2천동이다. 맞벌이를 할 경우 4인 가정의 평균 소득이 310만4천동인 셈이다. 호찌민시 거주자의 ‘빈민’ 기준은 가족 전체의 한 달 수입을 가족 수로 나누었을 때 50만동 이하인 경우다. 4인 가정의 경우 총수입이 200만동이 안 되면 ‘빈민’ 가정으로 지정된다. 빈민 가정은 호찌민시 전체 144만 가구 중 3.2%에 해당하는 4만5천 가구에 불과하지만, 서민들의 삶 역시 부부 중 한 명이라도 노동력을 상실하면 곧바로 ‘빈민’으로 떨어질 만큼 위태롭다.
“학교 개학 두 달 만에 두 아이의 학비, 책값, 교복값을 겨우 냈어요. 봉제공장을 다니는 아내의 월급이 150만동인데, 한 달치 가불한 돈을 합쳐서 겨우 학교에 주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아이들은 학교에 꼭 보내야 할 텐데 힘에 많이 부치네요.”
한 달 200만~300만동을 번다는 발동기 리어카꾼인 응우옌반하이(42)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치상으로는 분명 평균 소득을 초과하는 가정이지만, 생활의 안정감을 전혀 엿볼 수 없다. 호찌민에서 아이 하나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데 들어가는 돈은 기본적으로 1년에 학비 100만동, 책값 30만동, 교복값 40만동, 학생의료보험 9만동이다. 여기에 학부모 회비, 학용품비, 보충수업비, 급식비 등으로 다달이 50만동씩 들어간다. 매달 아이에게 들어가는 100만동에, 단칸방 월세 90만동, 공과금 50만동을 제하고 나면 150만동 정도가 남는다. 그 돈으로 생활을 해야 한다. 병 걸리는 게 무섭고, 남의 집 경조사가 두렵다. 노후 대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기업가와 머리 맞대듯 가난한 이들과도…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있는 풍(10)과 띠엔(8) 형제 가정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형제는 새벽 5시부터 저녁 해가 떨어질 때까지 온종일 병과 철근 쪼가리 등을 주으러 다닌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벌 수 있는 돈은 5천동이다. 5천동이면 쌀국수 한 그릇도 사먹기 어렵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일하다 몸을 다쳤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니던 공사장에 나가 하루 2만동을 벌어온다. 하루 2만5천동 벌이로 네 식구가 살자니 끼니는 맨밥에 반찬이 콩자반 하나, 어쩌다 한 번씩 나물 하나가 추가된다.
전형적인 빈민 가정이니 정부의 지원대상에 포함돼 있긴 하다. 하지만 의료지원은 진료비에 국한돼 약값 등을 감당해낼 수 없어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교육 역시 학비만 지원될 뿐 학용품이나 책 값 따위를 감당할 수 없어 아예 학교 가는 걸 포기했다. 아버지가 건강을 어서 회복하는 게, 이들 가정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맨밥에 콩자반 하나로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될 수 있을지, 어머니와 두 아들은 서로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관료들도 이들에게 아무런 답을 해주지 못한다.
거리에 나부끼는 사회주의 번영의 슬로건이 가난한 이들의 밥상에까지 좀체 내려와주지 않는다. 돈 많은 기업인과 머리를 맞대는 노력만큼 가난한 이들과도 무릎을 맞대는 모습을 베트남 국민 모두가 정부와 관료들에게 바라고 있다. 그래서 지난 1월 호찌민시 인민위원회가 음력 설 잔치 폭죽놀이 행사 비용으로 책정된 15억동을 빈민 퇴치 비용으로 운영하겠다고 공표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혁신’과 ‘개혁’에 나선 지 21년째, 화려한 경제 발전의 뒤안길에 허망하게 내버려진 가난한 삶을 위해 사회주의 베트남은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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