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부시의 러브, 로브 굿바이!

등록 2007-08-24 00:00 수정 2020-05-03 04:25

‘대통령의 남자’ 돌연 사임… 남은 1년 반 임기 동안 중요한 국내 문제 결정은 없을 것이란 분석도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말하자면 그는 국무조정실장이자 정책기획위원장이었다. 예전에 청와대 정무수석이 하던 역할도 도맡았고, 선거 때면 어김없이 선거대책위원장 노릇도 해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조지 부시 대통령의 머리’라고 불렀고, ‘부시 행정부의 창조자’라고 하기도 했다. 딕 체니 부통령이 ‘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이라고 불린다면, 그는 ‘대통령의 분신’으로 통한다. 백악관 비서실 부실장 칼 로브, 그가 돌연 사임할 뜻을 밝힌 것은 그래서 눈길을 끌 만하다.

일찌감치 모사꾼으로서 자질 발휘

“칼 로브가 떠나기로 했다.” 지난 8월13일 오전 11시30분께, 부시 대통령은 오랜 정치적 동반자인 로브 부실장과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 모습을 드러냈다. 착잡한 표정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우린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내왔고, 앞으로도 친구로 남을 것”이라며 “나는 워싱턴에 (로브보다) 조금 더 머무르게 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인사말을 마친 부시 대통령은 로브를 얼싸안았고, 두 사람은 대통령 전용기편으로 함께 텍사스주로 휴가를 떠났다.

[%%IMAGE4%%]

“조슈아 볼턴 비서실장이 다가오는 노동절(9월 첫째 월요일)까지 사임 의사를 밝히지 않는 백악관 보좌진은 대통령과 남은 임기를 함께하는 것으로 알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때가 됐다고 느꼈다.” 로브는 8월12일 과 한 인터뷰에서 “가족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사임 이유를 밝혔지만, 워싱턴 정가에서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은 그의 사임을 두고 “레임덕에 빠진 부시 행정부가 더 이상 국내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로브는 1950년 12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논쟁을 즐겼던 그는 고교 시절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대외활동에 눈을 뜬 것으로 전해진다. 1969년 장학금을 받고 유타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그는 유타주 공화당 본부 인턴 생활로 정치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모사꾼’으로서 그의 자질은 이 무렵 일찌감치 발휘됐다. 1970년 일리노이주 재무관(State Treasurer·주정부 자산을 관리하는 선출직 공무원) 선거 당시 그는 신분증을 위조해 민주당 앨런 딕슨 후보 선거 캠프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얼마 뒤 선거 캠프 로고가 찍힌 공문서 용지 1천 장을 훔쳐내 “공짜로 음식과 술을 제공한다”는 내용의 가짜 전단을 만들어 노숙자 등에게 돌렸다. 로브의 ‘기지’에도 당시 선거에선 딕슨 후보가 무난히 당선됐다.

1971년엔 유급직인 공화당전국대학생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기 위해 학업마저 포기했다. 이후 그는 텍사스주립대, 조지메이슨대 등 여러 대학을 전전했지만 끝내 졸업을 하진 못했다. 1972년 대통령 선거 땐 공화당 리처드 닉슨 후보의 선거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이 무렵 부시 가문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1973년 공화당전국위원회(RNC) 의장이던 아버지 부시는 당시 공화당전국대학생위 의장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로브를 발탁해 자신의 일을 돕게 했다. 그가 현 부시 대통령과 처음 대면한 것도 이즈음이다.

로브는 1977년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조직한 정치자금모금위원회(PAC)에서 활동하는가 하면, 이듬해 아들 부시가 텍사스주 의회 선거에 출마하자 선거캠프에 합류했다. 아버지 부시는 1980년 대선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로널드 레이건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부통령이 됐다. 1978년 주 의회 진출 좌절 뒤 기업 경영에 골몰하던 아들 부시의 정계 ‘복귀’를 줄기차게 권유한 것도 로브였다. 그는 1989년 이듬해 치러질 주지사 선거 출마를 아들 부시에게 적극 제안하는 한편, 지역 언론인과의 만남 등을 주선했다. 하지만 아들 부시는 당시 선거 출마를 포기했고, 4년 뒤 선거에서 결국 출사표를 던졌다.

리크 게이트 등 추문 뒤에 이름 드러내

1994년 치러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서도 로브 부실장의 ‘잔꾀’는 세간의 논란을 불렀다. 당시 부시 캠프의 선거운동이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던 민주당 출신 현역 주지사 앤 리처즈에 대한 비방으로 점철된 탓이다. 이를테면 여론조사원으로 위장한 부시 캠프 선거운동원들은 유권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리처즈 주지사 선거 운동원이 대부분 ‘레즈비언’인 사실을 알게 될 경우 그에게 표를 주겠느냐”는 등 인신공격형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이런 전술의 배후에 로브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텔레비전 토론에서 ‘뜻밖’의 선전을 펼친 부시 후보는 일약 지지도를 급반등시켰고, 결국 52%의 지지율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1998년 주지사 연임을 성공한 아들 부시는 대선 준비에 본격 나선다. 자신이 운영하던 홍보대행사까지 처분한 로브는 대선 캠프에서 선거전략 수립에 본격 착수했다. 2000년 11월 치러진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은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득표율은 앨 고어 후보가 앞섰지만, ‘승자 독식’이란 독특한 미국식 투표 때문에 플로리다주 재개표 문제가 막판 변수가 됐다. 로브는 ‘신속대응팀’을 플로리다로 급파해 상황을 장악했고, 이는 결국 아들 부시의 ‘당선 확정’으로 이어졌다. 이후 로브는 대통령 정치담당 고문으로 백악관에 화려하게 입성했다.

기독교 우파를 움직여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 기반으로 만든 로브 부실장은 사회보장제도 민영화와 조세제도·이민법 개정 등 국내 정책뿐 아니라, 이라크 침공 결정 등 대외 정책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그의 동료인 조엘 캐플란 백악관 비서실 부실장은 “로브는 부시 대통령이 내리는 모든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 초기 단계부터 관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끊이질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는 8월14일 텍사스주 공화당 의장을 지낸 토머스 포컨의 말을 따 “정치 컨설턴트가 정책 노선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전했다.

최근 몇 년 새 로브는 여러 추문에 연루되면서 사임 압박에 시달렸다. 백악관 이라크그룹이라는 비공식 조직을 통해 거짓 정보를 바탕으로 이라크 침공을 주도했고, 중앙정보국 비밀요원 발레리 플레임의 신원을 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리크 게이트’에 개입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또 최근엔 지난해 미 법무부가 부시 행정부에 비판적인 연방검사 9명을 무더기로 해임한 것과 관련해 상원 법사위가 그에게 청문회 출두를 요구한 상태다. 백악관 입성 이후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몰린 게다.

“30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왔다”

지난 2004년 부시 대통령의 재선 직후 로브는 〈PBS방송〉 등과의 인터뷰에서 “공화당을 영구적 다수당으로 만들기 위해 30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악화일로를 치닫는 이라크 상황으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 이후 사상 최악으로 떨어졌다. 급기야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선 상·하 양원을 모두 민주당이 장악했다. 밑바닥부터 출발해 화려하게 백악관에 입성하며 미 정가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킨 칼 로브의 쓸쓸한 퇴장을 부른 근본 이유다. 부시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도 1년 반가량이나 남아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