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하나의 유럽, ‘개정조약’으론 묶일까

등록 2007-07-06 00:00 수정 2020-05-03 04:25

부결된 지 2년만에 ‘개정조약’이란 이름으로 재논의 시작된 ‘유럽헌법’

▣ 브뤼셀(벨기에)=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지난 2년 동안 침묵했다. 이를 두고 지도자들은 “성찰의 시간”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슈셀 전 총리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제도는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이제 성찰의 시간이 충분했다고 판단한 걸까? 6월21~22일 이틀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담’에선 헌법 부활에 시동을 걸기로 합의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활’이 아니라 ‘대체’에 관한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했다.

[%%IMAGE4%%]

‘유럽헌법’이란 무엇인가? 유럽연합의 근간을 이루는 조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설립조약이고, 다른 하나는 개정조약이다. 설립조약은 다시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된다. 즉,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조약’(파리조약·1951), ‘유럽 원자력에너지 조약’(유라톰·1957), ‘유럽경제공동체조약’(로마조약·1957), ‘유럽연합조약’(마스트리흐트조약·1992)이다. 이들 중 지금의 유럽연합을 규정하는 거의 모든 제도 규정은 1992년에 체결된 마스트리흐트조약에 근거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럽연합의 세 기둥 체제(경제·사법-내무·외교-안보)를 형성하는 것이 이 조약이다. 그리고 로마조약은 마스트리흐트조약과 함께 조약의 양대 축을 유지하고 있다. 유럽헌법은 이 조약들을 하나로 묶고 부족한 부분은 더 채워넣자는 것이었다.

유럽에 큰 좌절감 안겼던 헌법안 부결

유럽헌법 제정 논의의 출발이 된 것은 2000년 요슈카 피셔 당시 독일 외무장관의 연설이었다. 이후 2001년 12월, 라켄(벨기에) 정상회담에서는 유럽헌법 제정 필요성을 공식 선언했고, 이를 추진할 기구로 유럽헌법회의를 설치하기로 했다. 회원국 의회 의원 105명으로 구성된 이 회의는 2003년 7월 마침내 유럽헌법 최종안을 도출했다. 이어 2004년 6월에는 유럽 정상들의 서명으로 각 회원국 비준 절차만 남게 됐다. 그러나 이 헌법안은 2005년 공공파업과 정치 스캔들로 몸살을 앓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국민투표가 부결돼 좌초되고 말았다.

헌법안 부결 사건은 유럽인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좌절감을 안겨줬다. 지난 1952년 ‘유럽 방위공동체 조약’ 체결 좌절 이후 50여 년 만에 맞은 조약 좌절이라는 시련은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 제도 통합의 속도와 심리·문화 통합 속도의 괴리에 대한 논쟁이었다. 학계에서는 구성주의 논쟁, 하버마스의 소통 이론 등이 다시 집중 조명되기도 했다. 헌법 부결은 또한 유럽 각 기관의 기능적 마비를 우려하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럽연합 확대의 위기였다. 유럽헌법 이전의 마지막 조약인 ‘니스조약’에서는 회원국 수를 27개국으로 한정하고 있었는데, 이를 대체하는 헌법안이 부결되면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인 크로아티아나 터키 등의 가입 협상은 애초부터 아예 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니스조약의 규정 중에는 2009년까지만 효력을 둔 한시적인 것들이 적지 않았다.

헌법안 부결 뒤 유럽은 아래로부터의 통합이라는 문제에 집중했다. 각종 학술대회와 문화행사는 유럽인들의 문화·정신적 정체성을 찾는 데 모아졌다. 민족주의가 아닌 다자주의가 토론의 중심이 됐고, 국익보다는 환경이나 에너지 같은 보편적 이익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졌다. 더불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새로운 조약 논의를 위해 2006년에 ‘아마토 그룹’이란 정치위원회를 결성했다. 역할은 사회 통합을 반영해 부결된 유럽헌법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6월4일, 위원회는 1만2800단어(프랑스어 기준), 70개 조항으로 된 ‘개정조약’을 공개했다. 기존 유럽헌법 초안이 6만3천 단어, 448개 조항이었던 것에 비하면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그야말로 ‘미니조약’ 초안이었다.

[%%IMAGE5%%]

당초보다 후퇴한 질적·양적 ‘미니조약’

그렇다면 개정조약에선 무엇이 바뀌었고, 새로운 규정은 어떤 게 있을까? 정상회담에 제출된 초안은 단 16쪽짜리 문서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사항은 실무자들의 손을 거쳐야겠지만, 대략 알려진 것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헌법’ 대신 ‘개정조약’(Reform Treaty)이라고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됐다는 점이다. 유럽헌법과는 달리 기존의 마스트리흐트조약과 로마조약을 개정 및 추가하는 것으로 형식을 바꾼 것이다.

또 하나의 변화는 설립조약 중 하나인 로마조약의 공식 명칭을 ‘(유럽)연합의 작용에 관한 조약’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명칭이 암시하듯이 개정조약은 유럽연합의 새로운 기능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유럽헌법에 포함시키려다 좌절된 여러 기능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대통령직 신설이나, 외교안보 고등대표로 이름만 바꾼 외무장관직 신설은 이미 유럽헌법에서 규정했던 것들이다. 회원국이 늘어남으로 인해 변화를 줄 수밖에 없는 이사회의 ‘이중 다수결 제도’(인구비례+다수결) 개혁은 2017년으로 미뤄지긴 했지만 역시 헌법안에 있던 것이었다.

다만 헌법에서 규정했던 국기, 국가, 표어 등은 두지 않기로 했고 ‘법률’이란 용어 대신 현재처럼 ‘규정’ ‘지침’ 등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또한 유럽헌법과는 달리 유럽연합에 완전한 법인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연합은 회원국들을 대표해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유엔 안보리에서 유럽연합이 프랑스와 영국을 대신하려는 시도도 당분간은 어렵게 됐다. 결국 여러 가지를 종합해볼 때 이번 ‘개정조약’은 부결된 ‘유럽헌법’의 여러 내용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유럽연합의 초국가적 지위가 당초보다 많이 후퇴했음을 보여준다. 설립조약이 아닌 개정조약이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미니조약인 셈이다. 때문에 지역 통합의 모델이 되겠다는 유럽연합의 의지는 당분간 꺾이게 됐다.

한편, 이번 회담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승리였다. 메르켈 총리는 정치력을 발휘해 유럽연합에서 독일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줬다. 발틱해 에너지 파이프라인 설치를 두고 폴란드와 사이가 좋지 않은 독일이었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린 폴란드를 설득하는 수완을 보였다. 헌법 부결의 중대한 원인이 됐던 프랑스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기발한 제안- 일명 미니조약-으로 유럽연합에서 확실한 지도적 위치를 굳히게 됐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회담 내내 아침마다 브뤼셀 시내 공원에서 조깅을 즐기면서 시민들과 어울려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를 덤으로 얻었다.

일반인과의 괴리 실감했는지

무엇보다 큰 교훈은 제도와 일반인들의 사이에 괴리가 클 경우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엘리트들이 이를 제대로 실감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각국 정상들은 이번 개정조약을 헌법안과는 달리 정부 간 회담만으로 추진할 뜻임을 밝혔다. 국민투표란 위험 부담을 덜겠다는 의도에서다. 여전히 정치 엘리트와 일반인들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셈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