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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에는 희망이 있을까

등록 2007-06-22 00:00 수정 2020-05-03 04:25

루콜레 난민캠프 대대적인 귀환 캠페인, 끔찍한 악몽을 잊고 짐을 싸지만…

아프리카 난민캠프 르포 ③ (마지막회) 탄자니아

▣ 은가라(탄자니아)=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끝없이 펼쳐진 구릉은 차라리 산맥이라 불러도 좋았다. 평균 해발고도가 1800여m에 이르는 탄자니아 서북부 국경지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끊김 없이 이어진 탕가니카의 고산지대는 꼬불꼬불 이어진 도로를 따라 나라와 나라를 쉽게 뛰어넘고 있었다. 지난 5월22일 오후 6시께, 탄자니아와 르완다가 만나는 국경마을 루수모를 향해 달렸다. 수도 없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면서도, 국경택시 기사는 능숙하게 시속 120km를 유지하며 신바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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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도 없는 이방인에게 길을 내주네

국경이랄 것도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선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아래 르완다 땅이 이웃집같이 가깝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중턱에 자리한 탄자니아 국경 검문소 요원은 여권도 없이 찾아간 이방인에게 선선히 길을 내줬다. 그나마 국경임을 알리려는 듯 육중하게 내려진 철제 차단막을 비켜 지나 ‘중립지대’로 들어섰다. 르완다 국경까지 1km 남짓 내리막길을 걷는 사이, 맨발로 국경을 넘어온 아이들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내리막이 끝나는 자리에서 방향을 왼쪽으로 트니 갑자기 ‘쏴아∼’ 물소리가 요란하다. 탄자니아가 자랑하는 ‘루수모 폭포’다. 르완다에서 흘러온 카게라 강물은 기적처럼 국경에서 거대한 폭포를 만들어내며 탄자니아로 휘감아 돌고 있었다. 관광객일 리 없는 짐자전거를 탄 이들이 흙탕 강물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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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50m나 될까? 천천히 루수모 다리를 건너 르완다 국경에 다가섰다. 1994년과 1995년 후투와 투치로 갈린 피의 내전을 피해 수십만 난민이 바로 이곳을 지났다. 탄자니아 국경의 끝자락에서 만난 르완다 이민국 보안요원은 눈에 띄는 짐보따리가 없는 이들에겐 증빙서류를 요구하는 법도 없이 눈짓만으로 월경을 허락했다.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카게라 강이 갈라놓은 탄자니아와 르완다는 그렇게 쉽게도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어느새 서쪽 하늘은 붉은 기운이 다한 듯 검은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르완다 인종학살 당시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주변에 있다”는 국경 수비대원의 귀띔에 차를 돌려 다시 언덕을 올랐다. 국경에서 불과 5분여 거리, 오르막 중턱에서 차를 세우고 무성한 풀숲을 헤집고 샛길로 들어섰다. 찾는 이도 없을 한적한 추모비 주변에선 쓸쓸함만 묻어났다. 직사각형 묘비의 4개 면마다 스와힐리어·영어 등 4개 언어로 된 추모사가 새겨진 현판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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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917명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 묻혀 있다. 이들은 1994년과 1995년 사이에 르완다에서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주검은 카게라 강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졌고, 탕가니카 기독교 난민 지원단체와 루터란 세계연맹 활동가들이 그 가운데 일부를 수습했다. 하지만 수많은 다른 주검들은 끝내 강물에서 건져내지 못했다. 신께서 그들의 영혼이 평화롭게 쉴 수 있도록 지켜주시길. 신이시여, 학살의 생존자들이 용서와 화해로 서로를 보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르완다와 부룬디 국경을 사이에 둔 탄자니아 북서부 은가라에 자리한 루콜레 난민캠프는 인종학살의 광기 어린 ‘극단의 세기’를 증언하는 곳이다. 애초 지난 1994년 인종학살을 피해 루수모 다리를 넘어온 40만~50만 명의 르완다 난민들을 위해 은가라 일대에 세워진 5개 난민캠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곳엔 지난 3월 말 현재 3만8927명의 부룬디 출신 난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르완다 난민들이 1990년대 말 모두 귀환하면서 캠프 대부분이 문을 닫았지만, 부룬디 난민들의 루콜레행은 쿠데타로 집권한 투치족 출신 피에르 부요야 대통령과 후투족 반군세력이 2003년 봄 휴전에 합의할 때까지 이어졌다. 현재 루콜레 캠프 난민 인구의 절반이 넘는 2만2808명은 17살 이하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대량 난민 사태는 동전의 양면이다. 독일과 벨기에의 식민지배를 차례로 받은 두 나라는 1962년 비슷한 시기에 독립을 이뤘다. 르완다에선 식민지 시절 억압당했던 다수 후투족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부룬디에선 소수 투치족이 제국주의가 물러간 뒤에도 정권을 놓지 않았다. 쿠데타와 역성혁명의 휘몰이 속에 후투와 투치로 갈라서 핏빛 낭자한 종족 간 분쟁을 장기간 이어온 점도 두 나라가 공유한 슬픈 역사다. 르완다에선 후투가 투치를, 부룬디에선 투치가 후투를 겨냥해 살육을 벌였다. 모두가 미쳐 돌아간 시대였다.

“내년 말 캠프를 정리할 수 있을지도….”

“시간이 됐다. 이제 부룬디는 안전하다.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게다.” 르완다에 이어 부룬디에도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다. 산발적인 종족 간 유혈사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루콜레 난민캠프에선 난민들의 ‘자발적 귀환’을 독려하기 위한 캠페인이 한창이었다. 트란시스 미산나 유엔난민기구(UNHCR) 활동가는 “난민들의 귀환을 독려하기 위해 캠프 전역을 거리별로 나눠 돌며 설명회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루콜레 난민캠프에선 이미 지난 2004년과 2005년 각각 2만5032명과 2만6천 명이 귀환을 결정한 데 이어, 지난해에도 9486명이 제 발로 부룬디로 돌아갔다. 미산나 활동가는 “올해 들어선 귀환 분위기가 주춤하면서 4월 초 현재까지 귀환한 난민은 1200여 명 수준에 머물렀다”며 “부룬디 상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만큼 귀환 작업에 다시 속도가 붙으면, 내년 말까지 캠프를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가족까지 모두 10명이 오늘 부룬디로 돌아간다.” 시눈 바야보 아리네(22) 일가족은 지난 4월 귀환을 결정했다고 했다. 5월22일 오전 루콜레 난민캠프 들머리에 자리한 유엔난민기구 임시 집결지에서 만난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난해 남편이 숨졌다. 캠프 바깥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가 뭇매를 맞고 숨졌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주검은 확인하지 못했다.” 두 아이의 어머니임에도 앳된 모습인 그는 “여긴 돌봐줄 사람이 없지만, 부룬디엔 그래도 친척이 좀 있다”면서도 “당분간은 식량 배급을 해주겠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는 게 제일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곁에 앉은 시누이 니하보스 레베카(24)는 말이 없었다. 셋째아이를 낳은 직후인 지난 2005년 남편은 홀연 그의 곁을 떠났다. 난민캠프에서 만난 다른 여성과 함께였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지난 2년여간 남편에게선 소식이 감감하다. 연방 새나오는 딸의 한숨 소리에 그의 어머니 미사고 로사(48)가 고개를 숙인다.

“1972년 처음 탄자니아에 왔다. 내 나이 13살 무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곱지 않다.” 부룬디 부반자 지역이 고향이라는 로사의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등진 것은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그는 “핍박받지 않고 살 수 만 있다면 뭐든 할 것”이라며 웃었지만, “농사꾼이 땅이 없으니 뭘 할 수 있겠느냐”는 며느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초탈한 척 굴다가도 이내 까르르 웃음을 흘리는 그의 두 딸 위제 이마나 도로테아(18)와 음보니 마젠(16)은 “너무 오래 살았다고 가라는데 무슨 재주로 버티냐”며 “우린 여기서 태어나 사실 여기가 고향이지만, 자꾸 가라니까 남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고 새침해했다.

캠프 반경 4km가 마지노선

지난해 중반부터 탄자니아 정부는 국경지대인 은가라 일대에 경찰특공대를 배치하고 대대적인 불법이민자 단속작전을 벌이고 있다. 특정 국가 출신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게 탄자니아 정부의 공식 발표지만, 대대적인 귀환 캠페인과 맞물리면서 난민들 사이에선 “탄자니아 정부가 더 이상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실제로 국제법상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난민들도 단속과 추방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인드리카 나트와트 유엔난민기구 탄자니아 사무소 부대표는 “2007년 들어서만 최근까지 모두 153명의 난민이 불법 이민자로 분류돼 부룬디로 강제 추방됐다”고 전했다.

“캠프 반경 4km가 마지노선이다.” 루콜레 난민캠프에서 만난 한 난민은 “그 바깥에서 땔감을 줍거나 밭을 일구다 재수없이 탄자니아 경찰에게 발각되면 뭇매를 얻어맞고, 지니고 있던 것을 모두 빼앗긴 뒤 부룬디로 추방을 당한다”고 말했다. 강제 추방은 두 가지 박탈을 동반한다. 난민 지위를 잃게 됨으로써 식량 배급 등 보호 조처를 받을 수 없다는 점과 캠프에 남은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장기간의 난민 생활로 생활 능력이 취약해진 이들에겐 사지로 내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난민이 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목숨을 건 탈출과 오랜 기다림 끝에 난민들이 마주하게 되는 현실도 가혹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땅으로 돌아가는 ‘귀환’도, 난민 수용국에 편입되는 ‘통합’도, 제3국으로 떠나는 ‘재정착’도,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선택이다. 유혈의 참화가 휩쓸고 간 땅에 남겨진 게 있을 리 만무하고, 대부분의 난민 수용국은 이방인을 자국민으로 대우하려 들지 않는다. 극소수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재정착 역시 온통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재정착에 나선 난민 상당수가 적응에 실패하고 있는 탓이다. 탈북 동포들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처음 소식을 듣고 믿겨지지 않았다. 신께 감사한다는 말 외에는….” 루콜레 난민캠프에서 10년을 넘긴 하리니마나 사베라(28)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재정착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1993년부터 부룬디에서 국내 실향민으로 떠돌다 1996년 루콜레에 정착했다. “1998년 캠프에서 만난 사내와 결혼을 했다. 내리 3형제를 낳았고, 2004년 남편이 캠프 바깥에서 일자리를 구하면서 생활이 좀 나아지려니 했다.” 하지만 남편이 원인 모를 폭력사태에 휘말려 목숨을 잃으면서 그의 삶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지난 4월 재정착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그는 절망 끝에서 다시 한 번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었다.

“캠프 생활에 비해 아이들이 교육도 많이 받을 수 있을 테고, 그럼 앞으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테고….” 수줍게 ‘미래’를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그쪽에서 시키는 일은 뭐든 하겠다. 아직은 뭘 하라고 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오랜 난민살이로 ‘시키는 것’을 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그에게 다시 한 번 ‘꿈’을 물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배운 것도 없는데. 글쎄, 이제라도 학교에 다닐 수 있을까? 학교에 다니지 못해 숫자만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 내가 간호사나 의사는 될 수는 없을 테고, 그저 공부를 좀더 하고 싶기는 하다.”

누가 이들의 손을 잡아줄 것인가

마추미 레스데라자(51)도 사베라와 함께 ‘억세게 운 좋은 소수’에 포함됐다. 1973년 한마을에 살던 청년과 결혼한 그는 1988년 반군 손에 남편을 잃었다.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도 반군이 마을을 덮친 날에 죽거나, 다치거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허위허위 르완다로 몸을 피한 그는 그곳 난민캠프에서 연락이 끊겼던 시동생을 만났다. 형을 잃은 시동생과 남편을 잃은 형수는 서로를 보듬었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낯선 땅에서 편할 날은 없었고, 이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삶터를 옮긴 그는 1996년 콩고 정부의 집단 난민 추방 와중에 두 번째 남편마저 잃고 말았다. “쫓기는 과정에서 실종됐는데, 필경 죽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 2003년 루콜레 난민캠프에 정착한 그는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힘겨운 나날을 버텨왔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할 준비가 돼 있다.” 레스데라자 역시 사베라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재정착은 “아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을 의미했고, 그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나 같은 사람한테 일자리나 있겠나. 그게 걱정이긴 한데….” 재정착 결정이 내려진 뒤 축하를 해주는 이웃보다 질투와 노골적 반감을 보이는 이들이 많은 것도 가슴 아프다. 떠날 날이 다가오지만, 그는 자꾸 뒤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20살 아들이 지난 1월 뒤늦게 루콜레로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재정착 등록을 마친 뒤였다. 그 아이를 또다시 버려두고 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레스데라자가 큰 눈에서 굵은 물방울을 꾹꾹 찍어냈다.

유엔난민기구가 최근 내놓은 ‘2006년 세계 난민 현황’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말 현재 지구촌 난민 인구는 989만448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절반에도 못 미치는 449만여 명만이 난민기구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만 250만여 명의 난민이 있다. 자국 내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국내 실향민’도 1423만4천여 명에 이르며, 아예 국적이 없이 떠도는 이들도 581만9천여 명이나 된다. 또 정치·종교적 이유 등으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이도 74만1천여 명에 이른다. 유엔난민기구는 자기 땅으로 귀환한 난민 출신자를 포함해 “국제사회의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지구촌 인구가 모두 3436만550명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누구라도 이들의 손을 붙잡아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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