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 난민 1만6천여 명이 의탁한 케브리베야 캠프의 하루
‘난민이 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극한의 대립이 부른 살육의 광기를 피해 무작정 나선 길. 삶과 죽음의 모퉁이를 에둘러 맨발로 국경을 넘었다. 그렇게 찾아간 피난처에서 더운 음식과 안온한 텐트를 만났다. 잠시나마 마음이 놓였을 게다. 분쟁의 땅에 평화는 더디 찾아왔고, 신산스런 삶은 난민캠프에서 숱한 새해를 맞았다. 부모의 옷자락을 붙잡고 생사의 기로를 넘은 아이가 자라 결혼을 하고 제 아이를 낳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난민’인 아이들이다. 이들 난민 3세대에게 국제사회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최소한의 연명뿐이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
은 지난 5월12~25일 에티오피아·우간다·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3개국 난민캠프를 방문해 소말리아·콩고·수단·부룬디 출신 난민들의 삶을 취재했다. 그들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핏빛 역사와 오랜 난민살이의 현실, 절망 속에서도 한 줌 희망의 가능성을 놓지 않고 있는 미래에 대한 얘기를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편집자
아프리카 난민캠프 르포 ① 에티오피아
▣ 아디스아바바·지지가(에티오피아)=글·사진 정인환 기자inhwan@hani.co.kr
쌍발 프로펠러의 진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덜컥’ 소리와 함께 착륙한 곳은 뜻밖에 활주로가 아니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아프리카 평원의 푸르른 들판이 고스란히 천연 비행장 노릇을 했다. 지난 5월14일 오전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출발한 소형 항공기는 그렇게 느닷없이 승객과 짐을 내리고는 남은 승객을 태운 채 다시 제3의 목적지로 숨가쁜 ‘완행’을 이어갔다.
30m 남짓 풀밭을 걸어나와 도착한 비좁은 여객 터미널은 양철 지붕을 얹고 있었다. 수레에 짐을 실은 공항 보안요원은 느긋하게 하늘색 철제 대문을 열고, 따가운 햇살 아래 아무렇게나 짐을 부려놓았다. 때맞춰 ‘구경거리’를 찾아 마을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에티오피아 동부 소말리주 주도 지지가 공항 주변에선 아연 잔칫집 분위기가 감돌았다. 크고 작은 물통을 가득 실은 채 비좁은 골목길을 ‘폭주’하는 당나귀가 천연덕스런 웃음을 흘린다.
16년… 타향살이가 이토록 길어질 줄이야
소말리아 난민 1만6천여 명이 삶을 의탁하고 있는 케브리베야 난민캠프까지는 지지가에서 다시 차량으로 40여 분을 더 달려가야 했다. 가난의 무게에 짓눌린 시내를 벗어나 오르막에 접어들면서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푸르른 초원이 남루한 ‘도심’의 먼지를 걷어내더니 이내 확 트인 고원의 벌판이 지평선 끝자락과 맞닿는다. 수염을 기른 염소와 앙상하게 마른 소떼가 초록의 대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이, 자존심 강한 낙타 한 마리가 엄숙한 표정으로 외로운 들판 한 귀퉁이에 홀로 서 있다.
1991년 2월 설립된 케브리베야 난민캠프는 사선을 넘어온 소말리아 난민 5천 명으로 출발했단다. 지지가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이곳엔 지난 4월 말 현재 소말리아 난민 1764가구 1만6518명이 3개 ‘존’으로 나뉘어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 달에 한 차례 세계식량계획(WFP) 주도로 이뤄지는 식량 배급은 1인당 하루 평균 △곡물 500g △식용유 35g △설탕 25g △소금 5g이 전부다. 난민들은 그나마 부족한 배급식량을 아껴, 캠프 바깥 시장에 내다 팔아 부족한 부식을 구해온다고 했다.
“나한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건가?”
캠프 제3존 들머리에서 만난 아르다 하산 아흐메드(45·여)는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자 손사래부터 쳤다. 크게 도움될 게 없으면 귀찮게 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는 1991년 소말리아 동부 푸리야카 지역을 탈출해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무서워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1969년 10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 시아드 바레가 1991년 1월 군벌 연합군에 축출되면서 시작된 내전 초기, 소말리아에선 종족 간 보복 폭행이 꼬리를 물고 참극을 빚었다.
그는 어렵사리 국경을 넘어 케브리베야에 도착하는 데 꼬박 석 달이 걸렸다. 고향을 떠나올 때 타향살이가 이토록 길어질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지난 16년여 세월 동안 소말리아는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는 지금껏 구호품에 의지해 대가족을 지키고 있다. 지난해 말 에티오피아의 소말리아 침공으로 시작된 새로운 난민 행렬 속엔 고향 마을을 지키고 있던 친척들도 끼어 있었다. 아르다는 “걔들은 아직 난민으로 인정이 안 돼 배급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철부지였던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데리고 온 그는 이곳 캠프에서 3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막내는 이제 고작 5살이다. 피난길에 나섰을 때 여섯 살 꼬맹이였던 장남은 어느새 22살 청년으로 자라나 따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다. ‘난민 3대’가 만들어진 기막힌 세월이다. “다른 곳에 가 살고 싶지만 갈 수 있는 데가 없고, 고향으로 가고 싶지만 아직은 안 되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허망하게 웃던 그의 눈가에 문득 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좋아하는 과목은 영어, 장래희망은 교사
갑자기 성난 목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한 남성이 어머니인 듯한 여성을 손수레에 싣고 보건소로 향하다, 캠프 운영진을 발견하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웃해 사는 다른 부족민과 말다툼을 벌이다 뭇매를 맞았다는 게다. 부족사회로 얽혀 있는 소말리아 난민캠프에선 같은 부족 아래 하위 부족끼리도 걸핏하면 주먹다짐을 하기 일쑤란다. 난민캠프에서도 고향의 ‘전통’을 잇고 있는지, 일부 젊은이를 중심으로 여성할례(FGM) 반대운동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다.
캠프 외곽으로 3km 남짓 떨어져 있는 케브리베야 난민초등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함께 따라나선 바르러베야 무고로 에티오피아 정부 ‘난민·귀민 지원청’(ARRA) 케브리베야 캠프 조정관은 “취학 연령대 어린이와 청소년 6412명 가운데 31.8%에 불과한 2037명만이 학교 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먼지와 땀이 범벅이 된 채 이방인을 맞은 난민학교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카메라를 향해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자오선을 지난 태양이 어느새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1학년 교실에선 이미 햇살이 귀했다. 어두침침한 교실을 가득 메운 40명 남짓한 아이들은 느닷없는 이방인의 출현에 아연 긴장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칠판만 바라보고 있다.
검은색 머릿수건을 두른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말 하산 모하메드(8)에게 다가섰다. 캠프에서 나고 자란 아말은 8남매 가운데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의 부모도 청소년 시절 난민생활을 시작했을 터다. 카롤리나 아세임 유엔난민기구 부법무관은 “캠프에서 태어난 인구가 캠프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며 “케브리베야 캠프 어린이·청소년 인구 절대 다수는 태어나면서부터 난민으로 등재된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학교 생활을 시작한 지 8개월째, “좋아하는 과목이 뭐냐”는 질문에 아말은 “영어”라고 짧게 말했다. 장래 희망은 ‘교사’라고 했다. 곁에 앉은 초록색 머릿수건의 아미넴 모하메드(9)는 난민들이 자체 운영하는 이슬람 율법학교에 다니느라 취학이 늦었다고 한다. 아미넴도 좋아하는 과목은 ‘영어’였고, 꿈은 ‘교사’였다. 교실 뒤편에서 겁먹은 듯 큰 눈을 굴리고 있던 압둘 카사크 모하메드(10)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진 “동생들과 땔감을 주우러 다닌 게 전부였다”는 압둘 역시 아말과 아미넴의 좋아하는 과목과 꿈을 되풀이했다. 통역을 해주던 알리 아덴 유수프 난민학교 교감은 “아이들이 볼 때 멋있어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아이들이 직접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 교사이기 때문에 대부분 똑같은 대답을 한다”고 귀띔했다.
그나마 부모의 동의 아래 학교에 나올 수 있는 아이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초등교육까지는 유엔난민기구가 무상으로 지원하지만, 취학률은 그리 높지 않다. 가난은 아이들에게도 어른의 노동을 강요했고, 더러는 멀리 지부티·에리트레아 등 이웃나라까지 가서 날품을 팔기도 한다고 무고로 조정관은 전했다. 아예 학교에 다니지 않거나,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방 1칸짜리 몬들에 식구가 바글바글
베니얌 테칼린 국제구호위원회(IRC) 케브리베야 캠프 대표는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들은 혹사를 당하거나, 별다른 할 일도 없이 캠프 안에서 몰려다니다 사고를 내기 일쑤”라며 “특히 여자아이들은 집안 살림과 동생 양육을 위해 아예 취학조차 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평균 결혼 적령기는 20~22살이지만, 난민캠프에선 갓 15살을 넘긴 청소년들이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는 사례도 많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일부 아이들은 갱단을 구성해 폭력도 서슴지 않고 휘두른다”고 덧붙였다.
구호위원회가 마련한 평생교육센터는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센터 한쪽에 자리한 비좁은 교실에선 아이를 둘러업은 샤피아 무세 로블레(35)가 20명 남짓한 아이들에게 영어 알파벳을 가르치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인 1991년 난민캠프에 둥지를 튼 뒤 결혼해 8명의 자녀를 뒀다는 그는 벌써 5년째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는 소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교사’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난민으로 떠돌기 전 소말리아에서 1년 남짓 중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흙을 바른 뒤, 비닐로 물막이를 한 다음 낡은 옷가지를 모아 지붕을 덮은 난민들의 주거지는 크기에 따라 ‘바스’(방 2칸)와 ‘몬들’(방 1칸)로 나뉜다. 작게는 6~8명에서 많게는 13~14명까지 한 가구를 이루고 있다 보니, 바스든 몬들이든 턱없이 비좁기는 마찬가지다. 존 3, 섹션 3, 21호 바스에 사는 슈그리 유스프 우아엘(18)은 “나는 결코 난민촌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소말리아 동부 바르쿨 헤르기세 출신인 그는 중등학교에 다니다 중퇴한 뒤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슈그리 곁에는 7년째 시름시름 앓고 있는 어머니 코스 알리 유스프가 힘겹게 앉아 있다. 올해 39살이라는 그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자기 나이보다 10년 이상 늙어 보였다.
“소말리아에 살 땐 가축상을 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소를 사다가 예멘 등지로 수출을 했는데, 먹고사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난민들이 직접 뽑은 ‘8인 자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슈그리의 아버지 유스프 우아엘 모하메드(42)는 피난을 떠나온 당시 상황을 묻자 불쑥 양말부터 벗어내렸다. 그의 오른쪽 발목은 잘려나간 채였다. 바레 정권 붕괴 직후 종족 간 유혈 폭력 과정에서 적대 부족의 손아귀에 붙들렸던 탓이다. 참혹한 경험을 뒤로한 채 타향살이를 해온 지 16년째, 그에게 ‘내일’을 묻자 쓸쓸한 웃음만 돌아왔다.
“미래? 희망?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물론 무언가 기다리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여기는 내 땅이 아니다. 소말리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내 가족이 터전으로 삼을 만한 새 땅을 찾을 수 있을까? ‘알라’는 아시겠지.”
한낮의 기온은 쉽게 40℃를 넘어섰지만, 밤이면 광야의 찬바람이 어김없이 난민들의 고단한 잠자리를 파고든다. 낮의 열기와 밤의 한기가 말라버린 땅이 토해낸 흙먼지와 뒤섞여 만들어내는 모진 환경은 각종 질병으로 이어지면서 고향 잃은 이들의 삶을 괴롭힌다. 기르마예 아바트 난민캠프 보건소 수석 간호사는 “급성 호흡기 질환과 각종 피부병, 결핵, 눈병, 설사 등 제때 약만 쓰면 쉽게 나을 수 있는 질병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약을 먹으라고 해도 전통의학에 기댄 채 듣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처방해준 약을 모아뒀다 시장에 내다 파는 이들도 있다”고 혀를 찼다.
한 달 평균 사망자가 서너 명인 이유
캠프 보건소의 대여섯 평 남짓한 입원실에는 폐렴을 앓고 있는 압둘 하달(6)과 급성 영양실조로 실려온 생후 6개월 된 라마단 하쉬가 온몸의 힘을 뺀 채 누워 있었다. 벽 쪽으로 배를 대고 돌아누운 이크란 압둘라히 알리(15)의 입가에선 신음처럼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최근 난민캠프 인근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그는 등뼈가 꺾여진 채였다. 사고 직후 지지가 시내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조만간 수술을 해주겠다”는 다짐만 받고 캠프로 돌아와야 했다. 이미 하반신이 마비돼버린 그는 변변한 진통제 처방도 없이 몸서리칠 통증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캠프 전체로 볼 때 공식적으론 한 달 평균 사망자가 서너 명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8년째 케브리베야 보건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간호사 자말 모하메드 이스마엘은 “사망신고가 접수되면 식량 배급 카드를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이 숨지더라도 이를 감추고 암매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캠프 뒤편의 드넓은 벌판에 촘촘히 자리잡은 돌무덤이 거대한 공동묘지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의사 1명에 간호사 4명, 전통 출산도우미(TBA)로 불리는 산파를 포함해 모두 11명이 의료 인력의 전부다. 그나마 1명뿐인 의사는 지지가 시내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은지 며칠째 소식이 없단다. 하루에 보건소를 찾는 환자는 120명가량인데, 이 가운데 25% 남짓은 현지 주민들이란다. 약품이 부족할 때면 난민에게 우선 처방을 하는 탓에 현지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친다니, 그나마 난민의 삶이 낫다는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닐 터다. 힌 캠프 관계자는 “에티오피아 국민 평균 수명보다 난민들의 평균 수명이 몇 년은 길 것”이라며 쓰게 웃었다.
16년 세월도 모자란 겐가? 지난여름 이슬람법정연대(ICC)의 수도 모가디슈 장악 이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가던 소말리아에서 최근 다시 대규모 난민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28일 에티오피아군의 침공으로 내전이 격화하기 시작하면서 생명에 위협을 느낀 이들이 앞다퉈 국경을 넘고 있는 탓이다. 남쪽 케냐가 국경을 봉쇄하면서 이들 상당수는 서쪽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고 있다. 케브리베야 캠프에서만 올 들어 630여 명이 새롭게 난민으로 등록했다. 아토 타델레 게네티 난민·귀환민지원청 지지가 조정관은 “에티오피아 동부 일대에만 최소 5만여 명의 소말리아 난민이 새로 유입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압디 아흐메드 알리. 1957년생. 소말리아 중부 본디랄리 출생. 하위에 부족 출신으로 모가디슈에서 일용 건설노동자 생활….’ 5월15일 오후 3시께, 캠프 들머리에 자리한 유엔난민기구 사무소 앞에서 난민지위 인정을 위한 심사를 받고 있는 쉰 살 가장을 만났다. 그가 모가디슈를 떠나온 것은 격렬한 교전사태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군이 모가디슈로 진주해 들어오면서 처음엔 남아 있던 이슬람 세력과 총질만 주고받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박격포탄이 날아다녔다. 모가디슈의 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카 호알라하 가축시장을 중심으로 격렬한 교전이 여러 날 이어지더니, 급기야 이웃집이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더 이상 머무르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새로운 난민의 탄생
부인 하와 자마 하산(45)과 두 딸 슈크리(19)·사에다(16), 아들 무함마드(16) 등 그의 다섯 식구는 지난 2월15일 용기를 내 길을 나섰다. 발라드와 조하르, 부라네와 불라부르데, 첸데쿤디쉬를 거쳐 페르퍼 지역에서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었다. 이어 무스테인과 칼라돈을 거쳐 1천km를 훌쩍 넘는 여정 끝에 지난 3월1일 케브리베야에 도착했다. 소말리아에선 트럭을 얻어탔고, 에티오피아로 넘어와선 버스를 갈아타며 시간을 줄였단다. 에티오피아 정부 쪽 다긴 테스페이 난민 담당관과 압둘 마흐디 유엔난민기구 부법무관이 깨알 같은 글씨로 서류를 메워가는 사이 알리 일가의 얼굴에선 불안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았다.
한참이나 귀엣말을 나누던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마흐디 부법무관이 다시 펜을 들었다. ‘믿을 만한 진술임. 신청 받아들임.’ 테스페이 담당관도 나란히 ‘동의함’이라고 쓴다. 새로운 난민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일단 난민으로 인정됐으니, 유엔과 에티오피아 당국은 이들에게 일정한 양의 식량과 간단한 가재도구, 비닐 덮개 등 거처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자재를 지원해줄 게다. 그리고 매달 일정한 양의 식량이 배급될 것이다. 그게 전부다. 가혹한 기다림의 세월은 오롯이 알리 가족의 몫이다.
땅거미가 질 무렵 마른 벌판으로 모여든 캠프의 아이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축구를 하기 시작한다. 맨발에 땀이 배어 흙발이 돼버린 아이들의 얼굴이 달궈질 무렵, 낮게 깔려 있던 어두운 구름이 슬그머니 빗줄기를 뿌려댄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메마른 대지를 적시자, 금세 매캐한 흙냄새가 콧등을 간지럽힌다. 꿈도 희망도 없는 끝 모를 난민살이, 그 모진 삶이 또 하루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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