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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을 땐 플라망으로?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 벨기에, 플라망권의 사망 비율이 왈룬보다 훨씬 높은 이유는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지 모르나 벨기에에서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안락사를 다르게 이르는 말이다. 벨기에는 지난 2002년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안락사를 시행하는 데는 까다로운 조건이 따른다. 벨기에 법에 따르면, 환자는 안락사를 요구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요구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안락사 요구는 자발적으로, 심사숙고해, 반복적으로 표현돼야 하며 외부 압력에 따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환자는 최종적인 치료를 받는 상황에 있어야 하고 피해갈 수 없는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계속적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받는 상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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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상태는 우발적이지 않으며, 심각하면서도 치유될 수 없는 병리학적 결과여야 한다. 결국 뇌사자는 안락사를 요구할 수 없으며 환자가 한두 번 내뱉은 “죽고 싶다”는 말로는 안락사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또한 이런 조건들이라면 영화 의 매기처럼 전신마비 환자의 안락사 요구도 안락사의 범주에 들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벨기에 일간 가 최근(3월26일치) 벨기에의 안락사 문제를 기사로 다뤘다. 기사에 따르면 2006년 벨기에(인구 1천만 명)에서 파악된 안락사는 모두 428건에 달했다. 한 달 평균 38명이 안락사를 하는 셈이다. 2005년보다 10%가량 늘어난 수치며 2002년에 안락사가 인정된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플라망(네덜란드어) 지역이 왈룬(프랑스어) 지역보다 안락사를 택한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전체 안락사의 79%(340건)가 플라망권에서 있었다. 인구 비례(6.5 대 3.5)를 감안하더라도 플라망권의 안락사 비율은 왈룬보다 훨씬 높다. 브뤼셀 자유대학의 마크 엥겔트 교수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가정한다.

지난해 10% 증가…인정 뒤 꾸준히 늘어

“첫째는 왈룬 지역이 안락사 적용에 서툴다는 것이다. 프랑스어권 의사들은 안락사 관련 법률에 익숙하지 않고 실행 방법도 잘 모른다. 반면 플라망권 의사들은 안락사에 대한 연구가 좀더 체계적이다. 안락사 법이 도입되자마자 관련 연구단체가 생겼고 세미나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두 번째는 왈룬 지역이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프랑스어권 의사들은 스스로를 가부장적인 존재로 생각해서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데만 익숙해 있다. 치료 방법을 환자와 토론하며 민주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르핀 등으로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가족들에게 다만 얼마라도 환자가 더 오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소임으로 여긴다. 처방전도 요구가 없으면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환자의 죽음이 안락사인지 여부는 가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주로 안락사를 요구하는 것일까? 엥겔트 교수는 “안락사로 죽는 경우는 전체 사망자의 0.3%에 지나지 않는다. 안락사 비율이 높은 플라망 지역도 0.6%에 불과할 뿐이다. 안락사의 대부분은 암 때문(86%)이며 나이와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안락사한 환자의 17%만이 80살 이상)”고 한다.

벨기에의 사례는 두 가지의 생각할거리를 준다. 하나는 플라망권처럼 매뉴얼에 따라 안락사를 판단하고 과정에 따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왈룬처럼 의사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전신마비 환자나 뇌사자에 대한 안락사는 실제 거의 없다는 점이다. 또한 고령자라고 해서 생명의 끈을 더 빨리 놓으려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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