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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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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기수 콤플렉스’ 깨주셨는데…

등록 2005-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복역 시절 광주교도소에서 인연 맺은 통일운동가 류락진 선생을 추모하며

▣ 임종수/ 광주광역시 공보관실 사무관

한평생을 민족 통일을 위해서 살아오신 통일운동가 류락진 선생이 가셨다. 선생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 선생과 만나 함께 식사할 때만 해도 정정해 보였는데 갑자기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병원에 들어서니 3개 홀을 합친 넓은 장례식장에 조문 인파가 가득했다. 선생의 영전에 향을 사르고 큰절을 올렸다. 그토록 염원하던 민족 통일을 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가시다니…. 비로소 애석함과 슬픔이 북받쳐올랐다.

빨치산·범민련… 30년 복역이 지킨 신념

선생의 영정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분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내가 광주 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일 때였다.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에 항의해 양심수들이 단식을 벌였는데, 나는 마지막까지 20일 이상 단식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때 머리가 허옇게 센 장기수들이 “부디 죽지 말고 살아서 통일 조국을 열어가자”며 뜨거운 격려를 보냈다. 특히 류락진 선생은 각별한 관심과 염려의 뜻을 누차 전해왔다. 이를 계기로 류 선생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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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류 선생은 서예에 전념하면서 낮에는 목공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서예는 국전에 수차례 입선할 만큼 뛰어난 경지였다. 내가 밭에서 경작한 신선한 야채를 선생에게 전달할 때마다 그분은 차곡차곡 모아둔 빵과 생필품을 건네주었다. 외롭고 힘든 옥중 생활이었기에 더욱 진한 정감이 오갔던 것이다. 감옥에서 선생을 만난 것은 나에게 장기수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날 투옥돼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수십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장기수들을 볼 적마다 경이로움이 앞서곤 했다. 이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미래의 꿈과 희망이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자초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하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비전향 장기수들의 꿋꿋한 신념과 따뜻한 인간미를 대하면서 이들이 역사·철학적 신념을 가진 휴머니스트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이러한 생각은 출감 뒤 사회 변혁을 겪으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남부군> <태백산맥> <송환> 같은 소설과 영화 등을 통해 우리 사회가 민족 통합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급격히 변화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할아버지

류 선생은 30년 동안 장기수로 복역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2년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민간재판소로 이양돼 5년형을 받고 1957년에 출옥했다. 그해 신애덕 여사와 결혼했지만 혁신정당 사건으로 다시 체포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나 5년 동안 전남 보성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1971년 호남통혁당 사건으로 체포돼 서울지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대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0년 복역 19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난 류 선생은 19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8년을 선고받고 또다시 수감됐다. 김대중 정부에서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이 적극적인 석방운동을 추진한 결과 1999년 광복절특사로 비전향 가석방됐다. 2002년에는 백운산 지구 위령비 비문 작성 사유로 불구속 입건되어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선생은 범민련 남쪽 본부 고문과 장기수 모임인 통일광장 임원을 맡아 통일사업에 매진하면서 평생을 민족 자주와 조국 통일을 위한 외길을 걸어왔다. 과연 선생은 무엇 때문에 사형 선고와 무기징역이라는 모진 박해와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험난한 길을 걸어왔을까? 선생은 일본에서 나라를 빼앗긴 수모를 겪으면서 고난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일본에서 지내던 선생은 8·15 해방과 함께 부푼 희망을 안고 귀국했건만 조국의 현실은 암울했다. 당시 조국에는 미군정의 지배와 친일 반민족 세력들의 득세 속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민중의 신음소리만이 넘쳐났다. 항일 애국전사들이 미군정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만 하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웠을 터다. 김구와 여운형 선생의 암살과 조국 분단, 친일파의 득세와 이승만 독재, 황국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폭압적인 유신독재, 전두환의 광주 학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조국의 현실을 선생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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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할아버지

2년6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만기 출소하기 하루 전, 류 선생이 내 손을 움켜쥐고 등을 꼬옥 감싸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선생은 “부디 나가서 건강하게 지내. 다시 볼 날이 있을까”라며 섧게 울었다. 그러면서 나무 위에 직접 붓으로 내 이름을 쓰고 조각칼로 새긴 문패를 건네주었다.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당신의 마음을 담아 몇날 며칠을 정성스럽게 만든 선물이었다. 그 뒤 20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2003년 어느 봄날, 광주시청에서 근무하면서 광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을 맡아 영화제 준비에 여념이 없던 나에게 어떤 여성이 찾아왔다. 영화배우 문근영씨의 어머니였다. 그 여성은 영화제를 돕고 싶다고 했다. 류낙진 선생 가족의 광주 사랑은 이렇게 각별했다. 결국 문근영씨는 광주국제영화제 홍보대사를 맡게 됐다. 나는 영화제 활동을 통해 그 여성을 자주 만났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이 여성의 부친이 류락진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며칠 뒤 류 선생을 만나 함께 식사했다. 출감 뒤 20년 만에 처음 만나뵌 것이다. 얼굴이 조금 여위고 주름살이 늘기는 했어도 무척 건강한 모습이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도 여전했다.

지난 일요일 도청 앞 시민공원으로 향하는 발길은 한없이 무겁고 만감이 교차했다. ‘통일애국열사 류락진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진 이날 영결식장 무대 전면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고인의 영정이 붙어 있었다. 주변에는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만장과 화환이 놓여 있었다. 사람은 죽어서 비로소 평가된다고 했던가. 이날 영결식에는 전국에서 온 각계 인사와 활동가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앞좌석에 앉아 연방 흐느끼는 유족들의 아픔이 진하게 다가왔다. 부인 신애덕(74) 여사는 전남 보성 예당중학교 교사였던 남편 류씨가 장기 복역하게 되자 시장 행상과 보험외판원 등으로 2명의 시동생과 4남매를 교육했다고 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어릴 적부터 자식처럼 길러온 시동생이 진압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자식들의 투옥마저 겪어야 했던 신 여사와 가족들의 삶은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비극과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시대의 비극이여, 고이 잠드소서

고인의 장남은 부친 때문에 가족들이 짊어졌던 멍에를 떠올리면서 “아버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 용서해주십시오. 아버님의 수많은 동지들 앞에서 아버님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버님은 정말 자랑스런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라며 오열했다.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솟구쳤다. 그것은 바로 나의 고백이자 절규였다. 선생의 치열한 삶과 열정이 내 마음 속에서 뜨겁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부디 고이 잠드소서, 류락진 선생이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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