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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완전 제거, 뻥은 계속된다

등록 2006-07-13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제사법재판소가 그 사용과 위협에 관해 “불법”으로 규정한지 10년… 지금 당장 실전 배치 가능한 핵탄두가 미국 5735개, 러시아 5830개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불법이다.”

1996년 7월8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자리한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유엔 총회의 요청에 따라 핵무기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권고의견을 내놨다. 비록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국제사법재판소가 핵 무기와 관련해 권고의견을 냈다는 것 자체가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무기급 핵분열 물질 보유급은 갈수록 늘어

“관습법과 성문법을 막론하고 국제법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허용한 것은 없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권고의견의 결론에서 이렇게 적었다.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무력의 위협 및 사용 금지 의무를 규정한 유엔헌장 제2조 4항에 위배된다.

또 헌장 제51조가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무력 공격이 실제 발생한 경우로 제한하고 있으므로 이 조항에도 저촉된다.” 이에 따라 재판관들은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국제법상 불법’으로 규정하고, “핵 보유국들이 (핵확산금지조약 등) 국제법에 따라 전력을 다해 핵 군축협상을 마무리짓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꼭 10년 전의 일이다.

‘오래된 버릇’은 고치기 어렵다. 지난 10년 세월 동안 달라진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핵무기 보유국들은 핵탄두를 여전히 국가 안보의 주춧돌로 삼고 있고, 똑같은 이유로 비보유국들은 핵무기 보유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다. 미국·러시아 등 핵 보유 5개국이 핵무기 ‘완전 제거’를 여러 차례 약속했지만 오랜 세월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무기급 핵분열 물질을 보유한 나라는 갈수록 늘고 있고, 미국의 일방적인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협정(ABM) 용도 폐기와 함께 ‘핵 선제공격’은 언제든 선택 가능한 ‘카드’가 돼버렸다. 최근 발행된 미국의 저명한 군축전문지 7~8월호가 전하는 ‘1945~2006년 전세계 핵 보유 현황’은 지구촌이 처한 음울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계 각국이 보유한 핵탄두 규모는 냉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6년 7만여 개로 절정에 이르렀다.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의견이 나온 해인 1996년 미국과 러시아 등 5개 ‘핵 영구 보유국’이 쌓아놓고 있던 핵탄두는 모두 3만7159개였다. 지난 10년 동안 하향세가 유지되면서 이 수치는 올해 2만6854개로 줄었다. 이와 함께 인도·파키스탄과 이스라엘, 그리고 지난해 2월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한 북한 등 9개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는 모두 2만7천 개에 이른다는 게 의 추정이다.

폐기된 플루토늄 언제든 재활용 가능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1945년 이후 지구상에서 만들어진 핵탄두는 모두 12만8천여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미국이 7만여 개를, 옛 소련·러시아가 5만5천여 개를 양산해냈다. 2006년 현재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는 모두 1만104개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5735개는 ‘실전 배치’가 가능한 상태로 유지·관리되고 있다. 나머지 탄두는 미사일에서 분리돼 보관되는 비축용이거나 핵물질이 제거된 상태로 보관되고 있는데, 미 정부는 이들 탄두 가운데 약 4천 개를 폐기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은 폐기된 핵탄두에서 나온 플루토늄 대부분을 ‘보관’하고 있다. 언제든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냉전이 막을 내릴 무렵 옛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는 3만여 개로 추정된다. 1993년 당시 러시아 원자력 장관이던 빅토르 미하일로프는 “1986년까지 소련은 4만5천여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며 “최근까지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폐기됐다”고 말했다. 미 정보당국은 1990년대 러시아가 매년 1천 개가량의 핵탄두를 용도 폐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는 현재 러시아가 약 1만6천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5830개 정도는 실전에서 활용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미·러 두 나라의 무기고에는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탄두의 97%가 쌓여 있다.

1952년 10월 독자적인 핵실험에 성공한 영국은 지금까지 모두 1200개의 핵탄두를 생산했다. 1970년대 한때 핵탄두 보유고가 350여 개까지 올라갔지만, 이후 줄어들기 시작해 현재는 뱅가드급 핵잠수함에 탑재된 핵탄두 200개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1998년 “실전 배치가 가능한 핵탄두 규모를 200개 이하로 유지할 것이며, 이 가운데 48개는 항상 잠수함에 탑재돼 있을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뒤늦게 핵개발에 뛰어들어 1990년대 중반까지 핵실험을 지속했던 프랑스는 1964년 이후 1260개의 핵탄두를 생산해냈으며, 현재 보유하고 있는 탄두는 350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1964년 이후 600개의 핵탄두를 만들어낸 중국은 핵 보유고를 200개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이 밖에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가 보유한 핵탄두가 110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스라엘의 핵무장에 대해선 미 국방정보국(DIA)가 1999년 “115~190개의 핵탄두를 만들어낼 만한 핵물질을 생산해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북한의 핵 보유량은 더욱 오리무중이지만, “지금까지 북한이 확보한 플루토늄은 약 45kg 정도로, 이를 통해 적게는 5개에서 많게는 15개의 탄두를 만들었을 것”이란 게 쪽의 진단이다.

“인류가 직면한 이 비극적 상황 속에서….” 냉전이 격해지기 시작한 1955년 7월9일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저명한 지식인과 과학자 11명의 서명을 받아 공동 선언문을 내놨다. 같은 해 4월18일 숨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서명에 동참해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으로 불리는 이 문서는 1995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세계적인 군축단체 ‘퍼그워시회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지구 종말 시계, 자정 7분 전

“미래에 발생할 세계 전쟁에선 핵무기가 당연히 사용될 것이라는 사실에 비춰, 그리고 핵무기는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계 각국 정부에 촉구한다. 전쟁을 통해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만인 앞에서 인정하라. 국가 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 수단을 찾아내야 한다.” 반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선제공격’과 ‘예방전쟁’의 구호가 요란한 오늘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그래서일까? 편집진이 핵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1947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지구종말 시계’의 분침은 벌써 몇 년째 핵폭탄을 처음 사용한 직후인 60년 전과 마찬가지로 ‘자정’ 7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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