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 지역 고유의 민간대중예술은 지금 현대화·상업화 속에서 고민 중
5년 전부터 여성 변검사 허용하고 엄격하게 통제했던 외국 공연도 활발
▣ 청두= 글·사진 모종혁 한겨레 통신원 jhmo71@chinawestinfo.com
인구 9천만여 명이 사는 중국 쓰촨성의 수도인 청두시 국제전시센터 3층에 자리잡은 순싱(順興)차관. 초현대식 건물 외관과 달리 쓰촨성 각지에서 뜯어온 명·청대의 건축물과 벽조 장식, 목각, 가구 등으로 내부를 꾸민 이 고풍스런 차관에서는 매일 밤 8시에 특별한 공연이 벌어진다. 절반은 식당, 절반은 찻집인 순싱차관을 밤마다 열기로 가득 채우는 것은 다름아닌 중국에서 인기 최고의 민간예술인 변검이다.
순싱차관의 식당 구역은 초저녁부터 가족, 연인, 친구끼리 식사하는 사람들로 붐비지만 찻집 구역은 저녁 7시가 넘어도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저녁 8시가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식당에서 찻집 구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내 찻집 구역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찬다.
“볼 때마다 마술에 걸려요”
저녁 8시 정각. 관중으로 메워진 순싱차관의 공연이 시작된다. 도마단(刀馬旦), 수축(水袖), 왜자공(矮子功) 등 쓰촨 오페라인 천극(川劇)부터 중국 최고의 원시예술인 손 그림자(手影戱) 공연, 쓰촨 민중의 삶과 애환을 서커스 양식으로 보여주는 곤등(滾燈), 쓰촨에서 시작돼 중국 전역으로 퍼진 차기예(功夫茶藝)까지 쓰촨 민간예술의 정수가 하나씩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관중의 탄성과 환호가 순싱차관을 뜨겁게 달군다. 공연이 클라이맥스에 접어들면 주인공 변검이 등장한다.
여성 변검사 한 명과 남성 변검사 두 명이 한 팀을 이룬 변검 공연에서 난데없이 불쇼인 토화(吐火)를 벌인다. 무시무시한 탈과 화려한 의상을 갖춘 남성 변검사의 불쇼에 관중의 열기는 더해진다. 뒤이어 여성 변검사의 변검이 이어진다. 한 장, 두 장, 세 장…. 쿵후를 연상시키는 호쾌한 춤사위 속에 여성 변검사의 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고 몇 분 만에 미모의 얼굴이 드러난다. 숨쉴 새도 없이 남성 변검사는 유려한 춤과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변검의 진수를 선보인다. 10여 장의 탈이 몇 분 만에 모두 떨어져나가고 마침내 나타나는 변검사의 맨얼굴. 순식간에 이뤄진 놀라운 변검 세계에 관중의 박수가 쏟아진다.
상하이에서 온 친구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천린쥔(53)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열렬한 박수로 변검사의 신비한 기예에 환호했다. 천씨는 “변검 공연을 수십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항상 마술에 걸리는 느낌”이라며 “변검은 중국 민간예술 중 으뜸”이라고 격찬했다. 푸젠성에서 온 한 쌍의 연인은 “TV에서 공연을 본 뒤 일부러 여행 일정을 조정해 변검을 보러 왔다”면서 “탈이 한 장씩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며 즐거워했다.
5년제의 혹독한 교육과정
우리에게는 1997년 개봉된 영화 <변검>(The King Of Masks)으로 잘 알려진 변검은 중국 내에서도 쓰촨 지역에서만 전승되는 독특한 민간예술이다. 쓰촨은 불도옹(不倒翁·오뚝이) 덩샤오핑의 고향이자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등의 영웅호걸이 누볐던 <삼국지>(三國演義)의 역사적 무대로도 유명하다. 청두 분지를 중심으로 “산세가 험해 외부의 침입이 어려운”(제갈량) 쓰촨의 지리적인 환경은 독특한 지역문화를 발달시켰다. 쓰촨 출신인 당대의 시성 이백이 시 ‘촉도난’(蜀道難)에서 “아, 아찔하게 높고 험하구나. 촉 가는 길은 험하고 하늘 오르기만큼 힘들다”(噫*旴*戱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于上靑天)라고 읊을 정도로 중국의 주류문화와 차별되는 민중적이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쓰촨 민간예술의 특징이다.
이런 쓰촨 민간예술의 대중적인 특색 때문일까. 여성에게는 변검을 전수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최근 들어 깨지고 있다. 3개월간의 미국 순회 공연을 마치고 갓 고향으로 돌아온 순싱차관의 여성 변검사 뤄야오(24)는 “변모하는 비즈니스 환경과 관중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5, 6년 전부터 여성에게도 변검이 전수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쓰촨성 천극예술센터 량천(46) 주임도 “한 천극단에 단 한 명의 여성 변검사 양성을 전제로 여성에게도 변검 기술을 전수케 하고 있다”면서 “처음에는 연로한 천극 예술인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지금은 모두 이해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영화 <변검>에서처럼 주인공 계집아이가 떠돌이 변검왕과 함께 지내기 위해 남자아이인 양 행동하고 변검왕을 극진히 모시는 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촉한을 건국한 명재상 제갈량의 신위를 모신 무후사 뒤에 위치한 다시타이(大戱臺) 천극 공연장에서 상업화의 추세는 더욱 확연히 느낄 수 있다. 1시간 반 동안의 다시타이 공연에서 전통 천극에 할애된 시간은 극히 적다. 모두 8개의 레퍼토리 가운데 전통 천극 공연은 단 2개, 시간도 각각 5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방류 격이면서 인기가 높은 변검, 곤등, 차기예 등은 1시간 가까이 공연이 진행된다.
다시타이 장리(37) 사장은 “수십 차례의 국내외 공연을 통해 전통 천극보다는 변검, 곤등, 차기예 등이 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기에 이들 공연의 레퍼토리가 다양해지고 확대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9명의 한국 단체관광객을 이끌고 다시타이를 찾은 조선족 동포 가이드 김희연(24·여)씨도 “손님에게 천극을 보러 간다고 하면 전혀 이해를 못한다”면서 “변검이 천극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예술 영역을 구축한 듯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변검사가 되는 길은 오직 쓰촨에서만 가능하고 천극의 기초 수업을 받아야 한다. 지난 1953년 충칭에서 개교해 1950년대 말 청두로 자리를 옮긴 옛 쓰촨성천극학교는 천극 예술인들을 양성하는 요람이다. 쓰촨성천극학교는 1980년 교육과정을 다양화하면서 쓰촨성예술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중국에서 유일한 천극 예술인 양성학교다.
쓰촨성예술학교 샤오더메이(34·여) 학무처 부처장은 “이미 기본기가 있는 중학교 졸업자를 뽑아 고등학교와 전문대를 합친 5년제의 혹독한 교육과정을 통해 천극의 다양한 기예와 엄격한 정신자세를 배우도록 하고 있다”면서 “학생도 2, 3년에 한 번만 선발하고 정원도 5명이 넘는 법이 없으며 쓰촨과 충칭 지역 출신으로만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덕화가 전수받고 싶었으나…
쓰촨성예술학교에서 기본기를 다진 학생들은 졸업 뒤 성적에 따라 각지의 천극단에 취업한다. 순싱차관에서 공연하는 쓰촨성 천극단 소속의 국가 1급 변검사 리옌둥(45)은 “천극단 입단 뒤에도 다시 3~5년 동안 천극의 각종 공연 기술을 깊이 있게 연마한다”면서 “재능과 표현력이 특출한 극소수만이 극단에서 선택돼 변검사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타이 천극단의 예술감독인 류스후(43)는 “1980년대 말만 하더라도 늘어난 공연 때문에 국가에서 변검사의 양성을 독려했지만, 당시 변검사 양성의 책임을 맡은 왕다오정(68) 사부가 받은 학생은 4, 5명에 지나지 않았고 제자로 공인받은 것은 나와 허홍칭 두 사람뿐”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변검은 배우는 데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데다 교습의 폐쇄성으로 전수자가 극소수다. 현대 변검의 창시자인 왕다오정은 “2000년 홍콩 최고의 영화배우인 류더화(유덕화)가 변검을 배우고 싶다며 청두로 날아와 거액의 수업료를 내밀었지만 거절했다”고 회상했다. 은퇴한 변검계 원로 주거셴(76)도 “변검은 가업으로 자식에게 전수하거나 사부가 한두 명의 제자에게 도제식으로 전수할뿐더러 가르치는 데만 최소한 3년 이상이 걸린다”고 말했다.
민중과 호흡하는 변검을 위하여
하지만 전통을 깨고 여성 변검사가 탄생했듯이 상업화와 세계화의 흐름은 쓰촨 변검계도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청두시 솽린루 서민 주택가의 한 공원에서 매일 오후 2∼5시 천극 공연을 벌이는 신훠(新火)천극단. 주로 공원 주변에 사는 노인들이 관객층인 이 극단 공연의 입장료는 3위안(한화 380원)으로 저렴하다. 쓰촨성예술학교 출신이 아닌 비정규적인 교육과 여러 경로로 천극과 변검을 배운 신훠천극단원들의 단출한 공연이지만 공연장 분위기는 다른 어느 곳보다 뜨겁다. 쓰촨성 내에서도 보기 드문 라이브 전통음악으로 공연 반주를 곁들이는 것도 특이하다.
3시간 동안 신명나는 공연을 마친 신훠천극단원들은 밤 시간이 더욱 바쁘다. 3, 4명이 한 팀을 이루어 각자 오토바이에 몸을 의지한 채 식당으로 술집으로 잔칫집으로 심지어는 상가(喪家)로 분주히 움직인다. 날마다 반복되는 떠돌이 예술생활인 것이다. 예술적 긍지와 정열보다는 오직 돈벌이를 위해 공연하는 이들 신훠천극단원들에게 최대의 꿈은 해외 진출이다. 변검사 칭위치(35)는 “지난해 한 동료 변검사가 한국에 가서 대형 술집과 식당을 무대로 공연을 해 큰돈을 벌어 돌아왔다”면서 “나도 한국으로 진출해 공연을 하고 싶은데 내 매니저가 될 의사가 없느냐”고 필자에게 제의하기도 했다.
천극예술센터 량천 주임은 “중국 정부가 변검 기술의 외부세계 유출을 막기 위해 변검사의 외국 공연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면서도 “정부가 운영하는 천극단 소속의 변검사도 개인적인 연줄을 통해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면 특별한 제재 수단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왕다오정은 “나도 1990년대 중반에 대만, 싱가포르 공연 때 현지에서 엄청난 금전 공세를 받았다”면서 “최근 중국 내에서 천극계가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변검사들이 외국 진출을 더욱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타이 장리 사장은 “변검의 현대화와 상업화, 외국 진출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며 “전통적인 예술 가치를 지키면서 변화하는 관중의 요구를 지혜롭게 수용하는 문제를 천극과 변검계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훠천극단 공연장에서 만난 민간예술 전문사진가 라이우(41)의 진단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쓰촨의 모든 민간예술 공연은 민중 속에서, 길거리에서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변검이 현대인의 취향에 부응하는 것, 중국인과 함께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민중과 호흡하는 변검의 참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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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유럽 4개국 공연에 나선 쓰촨성 청년천극단은 천극 <백사전>(白蛇傳) 말미에 이전에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공연을 했다. 당시 20대 청년 천극 예술인인 왕다오정이 동료 자오수친, 양룽화와 함께 탈 3장을 바꾸는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 것이다. 왕다오정은 “처음 변검을 접한 유럽 관중은 탄성을 지르면서 열띤 박수로 극장을 진동시켰다”면서 “변검이 외국에 선보인 첫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변검은 19세기 말 저명한 천극 예술인인 캉쯔린이 천극 <귀정루>(歸正樓)에서 3장의 탈을 바꾸는 삼변화신(三變化身)을 선보이면서 세상에 등장했다. 변검의 기술과 탈을 직접 연구하고 제작한 캉쯔린의 혁신적인 기예는 곧 쓰촨성을 진동시켰고, 뒤이어 수많은 무명의 변검사들이 명멸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검은 삼변화신의 격식에만 연연하고 제대로 된 공연 형식조차 없었다.
그러다 1980년대 초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다. 쓰촨성 천극단의 최고 예술인 중 한 명이었던 류중이가 홍콩 공연 중 탈을 4장까지 바꿔 삼변화신의 틀을 처음으로 깨뜨린 것. 류중이의 사제인 왕다오정은 1985년 독일 공연에서 탈을 5장까지 바꾸고, 1987년 일본 공연에서는 불가능하리라 여겨지던 탈 10장을 변환하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1996년 홍콩에서 이뤄진 공연에서 왕다오정은 자신이 개발한 변검의 독자적인 공연 양식과 다양한 공연 기구를 더해, 3분 안에 8장의 탈을 변환하는 절기를 선보이고 탈 24장을 바꾸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다. 이에 왕다오정은 홍콩 <대공보>로부터 중국 최고의 ‘변검왕’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왕다오정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당시 삼변화신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변검이 천극 공연의 작은 배역에서 독자적인 공연 양식으로 발돋움한 것은 나와 류 사형의 노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변검이 어머니 격인 천극을 뛰어넘어 쓰촨을 대표하는 민간예술이 된 데에는 끊임없는 연구와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변검만의 공연 양식과 의상, 탈 등 예술 도구를 개발하기 위해 지금도 후학들과 함께 토론하고 있다”고 말했다.
왕다오정은 그동안 생활이 어려운 동료 천극·변검 예술인들을 도와주느라 제대로 재산도 못 모았다고 멋쩍게 웃었다. “핍박받는 쓰촨 민중을 돕고자 의적이 된 <귀정루>의 주인공이 관병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얼굴을 바꿔가면서 선행을 하는 과정에서 변검이 탄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그는 “변검은 단순한 기예가 아니다.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과 분노, 선행을 베푸는 즐거움과 환호 등 인간의 감정을 변검만의 공연 양식으로 표현하기에 독자적인 예술 가치를 얻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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