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오스트레일리아 인종폭력 사태의 본질은 최근에 퍼진 반무슬림 정서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참여한 하워드 총리가 이슬람 혐오증 부추긴 셈</font>
▣ 시드니= 권기정 전문위원 kjkwon@hotmail.com
여름이면 젊은 서퍼와 수영객들로 붐비는 시드니 남부 크로눌라 해변. 시드니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이 해변은 본다이 비치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바닷가다. 지난 12월11일 오후 크로눌라는 5천여 명의 백인계 오스트레일리아인들에 의해 성난 무법천지의 해변으로 돌변했다. 이 시위대는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초여름 찜통더위를 피하기 위해 바닷가를 찾은 사람들 중에서 중동계로 보이는 시민들만 보이면 무작위로 붙잡아 집단 폭행했다.
복수를 선동한 문자메시지
이날 집단 폭력사태의 원인은 지난 12월4일 오후 발생한 작은 폭행사건이었다. 백인 인명구조원 2명이 크로눌라 해변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레바논계 청년 4명에게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니 축구를 하지 말라”고 했다가 폭행을 당했다. 다음날인 5일 이 소식이 신문과 방송에 일제히 보도되고 일부 라디오 전화 대담 프로그램 진행자들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을 응징하자”며 원색적인 방송을 내보냈다. 나흘 뒤인 7일 크로눌라에서 백인 주민 3명이 해변에서 놀고 있는 레바논 청년 20명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시비를 걸었다. 그들은 레바논계 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12월11일 “일부 중동계가 크로눌라를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이 젊은 서퍼들 사이에 급속히 퍼지고 자극적인 문자 메시지가 퍼지면서 이날 5천 명의 군중이 해변에 집결했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시위였다. 그런데 약 200명의 인종주의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중동계 시민과 이들을 보호하려는 경찰과 구급 요원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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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태의 원인은 인구의 25%가 외국 태생인 이민자 사회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번 폭력사태는 9·11 이후 고조되고 있는 반무슬림 정서를 일부 극우파 인종주의자들이 자극한 것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한 예로 4일 오후 짧은 시간에 수천 명을 해변으로 모이게 할 수 있게 한 문제의 문자 메시지는 “오지(Aussie)들이여, 레바논 중동계 녀석들에게 복수를 하자!” “노스 크로렐라 비치에 모여 Lebs(레바논)와 Wogs(중동계) 격파에 협조하라!” 등이었다. 하나같이 백인들이 ‘중동계 녀석’들을 혼내줘야 한다는 것으로 중동계에 대한 미움이 극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날 폭력시위 현장에는 ‘오스레일리아애국청년동맹’의 이름으로 ‘반격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라고 쓰인 포스터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2002년 인종주의자를 자처하는 스튜어트 맥바스가 조직한 애국청년동맹은 독일 신나치 세력에 끈을 대고 있는 극우단체다. 이 단체는 이민자 추방과 유학생의 오스트레일리아 대학 입학 금지를 주장해왔다. 칼 스컬리 뉴사우스웨일스주(NSW) 경찰청장도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중동계 주민들에 대한 공격에 가담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와는 달리 곧 가라앉을 것”
1978년 백인계 이민자들만 받아들이는 이민정책을 폐지했음에도 외신들은 이번 사태를 ‘오스트레일리아=백호주의’의 고정관념을 갖고 바라본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지난 30여 년간 ‘백호주의’의 오명에서 벗어나려고 다문화주의를 기치로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대다수 오스트레일리아 시민들도 이민자들로 구성된 다문화를 오스트레일리아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지난 30년간 연간 이민 쿼터도 국가별로 하지 않고 숫자로만 하고 있다. 요건이 되는 모든 신청자들에게 이민의 문호를 연 셈이다. 최근 기술인력 부족이 심화되자, 가족 초청 이민보다는 독립 기술이민 쿼터를 늘렸다. 그래서 엔지니어나 정보기술(IT) 인력을 많이 보유한 인도 등 아시아계 이민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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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집단 폭력사태에서 우려되는 것은 백호주의의 부활이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무슬림 정서다. 백호주의가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과 백인우월주의를 반영하고 있다면 반무슬림 정서는 하워드 정부에 의해 파생된 다분히 정치적인 산물이다. 4선 재임을 자랑하는 존 하워드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불필요한 이슬람 혐오증을 부추긴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발생하는 테러도 중동계 시민들에 대한 반감을 더하고 있다. 9·11 테러와 오스트레일리아인 88명이 몰살당해 ‘오스트레일리아의 9·11’로 불리는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 테러가 그 예다.
무엇보다 반무슬림 감정을 불러일으킨 본격적인 계기는 하워드 총리가 여론을 무시하고 이라크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고, 강력한 대테러법을 입안한 것이다. 하워드 총리는 지난달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자생적인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형성될 조짐이 있다면서 반무슬림 정서를 부추겼다. 지난달 8일에는 시드니와 멜번의 주택 20곳을 급습해 테러 용의자 17명을 체포해 기소했다. 이날 체포된 사람은 대부분 중동계 시민들이었다.
한편 크로눌라 사태 이후 중동계 청년들의 보복 시위가 시드니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퍼스에서는 12일 아랍계 일가족이 백인 10여 명에게 봉변을 당했다. 애들레이드에서는 이날 레바논계 택시 기사가 백인 승객의 주먹 세례를 받는 등 소규모 폭력 사례가 전해지고 있다. 골드코스트에서도 일부 청년들 사이에 인종주의적 집단 폭력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휴대전화 SMS 메시지가 유포되고 있다. 일부 중동계 청년들은 17일 크로눌라 사태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 계획이다. 이날 집회가 자칫 대규모 보복 폭력사태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프랑스와 달리 곧 가라앉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연방통계청의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레바논계 인구는 전체의 0.9% 수준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랍계는 극소수다. 또 크로눌라 사태는 백인계가 주도해 중동계에게 집단 폭행을 행사했다. 이에 대한 보복시위를 산발적으로 벌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중동계는 대부분 대학 교육을 받고 직장을 가진 이민자들이 대다수여서 보복 공격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크로눌라 사태가 발행한 지 48시간 만에 NSW 주정부는 ‘집단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대규모 폭력 상황에 대한 경찰의 수습 능력 부재가 도마 위에 오르자 주정부가 공권력 강화에 나선 것이다. 경찰은 폭력사태 발생 사흘째인 13일 밤 시드니 주변의 순찰 경찰을 평소의 4배인 450명으로 증원했다. 이와 함께 비상사태에 대응하는 특수경찰부대(SFS)도 투입했다. 경찰의 이같은 경계 강화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최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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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올림픽 이후 최고의 경계강화
NSW 주정부는 경찰에 비상조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긴급히 상정했다. 15일 하원에서 통과되었고, 임시 소집된 상원에서도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집단 폭행이나 폭동에 가담한 사람에게 최대 15년 징역형, 인근 지역 술집이나 클럽 등 일시 폐쇄 조치, 특정 지역 출입과 통행금지 선포, 소요 발생 지역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외부와 고립시켜 수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모리스 예마 총리는 “폭도들이 사회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코 그들이 승리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부는 또 추가 폭력시위가 벌어질 수 있는 곳에 경찰을 배치하고 일부 도로를 아예 패쇄하는 등 이번 주말 발생할 수 있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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